소설리스트

17화 (18/61)
  • ……쫓겨났다. 나는 멍하게 문을 바라봤다.

    “그럼 가시죠.”

    “아니카. 다시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그렇지. 내가 봐도 그래. 그럼 얌전히 돌아가야지.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하긴, 심장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누가 들어주겠어.

    라히트리안은 하루라도 빨리 심장을 회수하고 싶어 할 테니 들어줄 리 없었다.

    이유는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나를 이카르센 제도에 데려온 이유도 심장을 안전하게 간수하기 위해서겠지.

    심장을 빼앗기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나는 울적하게 발끝을 내려다봤다. 튜니아트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보라색 단화가 보였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대화가 잘 안 되었나 보군요.”

    “……네.”

    정면을 보고 있던 아니카가 힐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미간이 희미하게 좁혀졌다.

    무슨 생각인지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자그마하게 말했다.

    “성 구경을 하러 가시겠습니까?”

    “네?”

    “마법을 꺼리는 게 아니시라면…… 근처에 산책로가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기분이 좀 나아지실 겁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였다.

    지금 위로해 주려고 한 말인 건가?

    아니카의 귓불이 살짝 붉어진 게 보였다.

    이런 종류의 말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긴장하며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저 마법 안 싫어해요. 본 적이 없어서 익숙하지 않은 것 뿐이지…….”

    “…….”

    “거기가 어디예요?”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아니카가 조금 빠른 걸음걸이로 앞서 나갔다.

    * * *

    리즈벳이 나가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이안은 사색이 된 채 굳어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라히트리안의 심장을 그녀가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이안, 정신 차려.”

    “……튜니아트 황녀가 왜 심장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당장 돌려받아도 모자랄 판에요!”

    “그래서 데려왔잖아.”

    지금 그걸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건가. 이안은 이마를 짚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럼 황녀는 언제 돌려보내실 생각입니까?”

    “내가 흔적을 지우라 했을 텐데.”

    “그럼 안 돌려보내신다고요?!”

    라히트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이었다.

    미치고 팔짝 뛰고 환장할 상황에 이안은 어디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평소 튜니아트 제국과 엮이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던 라히트리안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이 저리 심장을 빌려 달라 애원하니 들어줘야지.”

    “그럼 아까 왜 그렇게 내보낸 겁니까?”

    “바로 들어주긴 싫어져서.”

    “…….”

    황녀는 라히트리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겉으로는 웃는 표정을 잘도 꾸며대며 시치미를 뗐었다.

    이안은 아찔할 정도로 유치한 이유를 대는 제 주인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차라리 청력에 문제가 생긴 거였으면 했다.

    “……그, 그래도 심장은 중요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

    “아니. 오히려 잘됐어.”

    “잘됐다니요……?”

    라히트리안이 귀에 걸려 있던 제어구를 하나씩 풀었다.

    이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순식간에 도망갈 준비를 마친 그가 창문을 열고 여차하면 뛰어내릴 기세로 멀찍이 떨어졌다.

    집무실은 최소한의 마법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게 어떻게 된 겁니까?”

    “황녀의 생명력이 바닥을 쳐 준 덕분에.”

    한계까지 다다른 리즈벳의 몸을 유지시키기 위해 라히트리안의 심장은 활발히 움직이며 마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덕분에 제어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마력이 급속도로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여신 튜니아가 걸어 온 장난은 아무래도 라히트리안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모양인 듯싶었다.

    그는 귀걸이 형태의 마력 제어구를 서랍에 넣었다.

    “심장을 빌려 달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잘도 그 입으로 부탁하다니.”

    겁도 없이.

    라히트리안은 리즈벳의 부탁을 들은 순간 엄청난 희열감이 저 아래에서부터 차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너무 쉽게 내어 주면 재미없지.

    “마룡은 어디에 있는지 추적하고 있는 거겠지?”

    “네. ……그런데 이상합니다. 아무래도 튜니아트 황성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라히트리안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웃었다.

    “내가 황녀를 돌려보낼 거라고 판단했을 테니.”

    “어떻게 할까요?”

    “적당히 지켜보다 잡아 와. 황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렇게 리즈벳을 보고 싶어 한다면 직접 보게 해 주면 그만이었다.

    * * *

    리즈벳을 탑으로 보낸 지 이틀이 지났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건 라히트리안이 이카르센으로 리즈벳을 데려갔다는 의미일 수 있었다.

    아니면 그 자리에서 처리해 버렸거나.

    하지만 후자는 아닐 것이다. 지난번 리즈벳을 탈출시키며 맨살이 닿은 부위가 아직도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신성력이 아직도 렘무트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흐음. 이제 어떻게 할까.”

    렘무트는 튜니아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의 지붕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상태라면 튜니아트는 리즈벳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카르센 쪽에서 리즈벳의 흔적을 의도적으로 지우고 있는 듯했다.

    최근 튜니아트 근방에서 이카르센에서 파견한 마법사들이 보이기 시작한 게 그 증거였다.

    그들은 수도에 있는 모든 마력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그 말은 렘무트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다는 것일 텐데.

    이카르센 쪽에서는 굳이 부딪힐 생각이 없다는 듯이 가증스럽게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무슨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라히트리안이 리즈벳을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는 건 충분히 알았다.

    ‘그건 안 되지.’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리즈벳을 손에 넣어야 했다.

    “당연히 돌려보낼 줄 알았는데.”

    심장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그게 가장 편리한 방법이었으니까.

    하긴, 천 년 전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나.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렘무트가 느긋하게 일어났다. 이대로 한없이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역시 간절한 인간에게 말을 흘리는 게 가장 좋겠지.”

    그의 적안이 여신의 궁 쪽으로 향했다.

    누구보다 리즈벳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저곳에 있었다.

    에테르온 반 튜니아트.

    그 인간이라면 렘무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터였다. 그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졌다.

    * * *

    아트레시아 제국의 국경 부근.

    금발에 적안을 지닌 수려한 남자가 황성에서 온 서신을 보고 픽 웃었다.

    [세이어드 아트레시아는 귀환하라.]

    짧은 문장이었지만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곧 황성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변방에서 세력을 모으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세이어드가 마침내 승기를 잡은 시점이었다.

    “지금쯤 황후가 난리를 피우고 있겠군.”

    그 성정에 아랫사람에게 난리를 피우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무능력한 1황자가 최근 외교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가 상대국에 무례를 저지른 것으로도 모자라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왔다 하니. 이보다 반가운 소식이 또 어디 있을까.

    아트레시아 제국을 등에 업고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으니 황제의 눈 밖에 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축하드립니다, 세이어드 님.”

    “그동안 수고했다, 유스티아.”

    “수도로 돌아가면 황태자가 되시겠군요.”

    세이어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1황자의 무능력함에 질려 버린 귀족들이 하나둘 등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아트레시아 제국의 귀족들은 언제고 다시 1황자의 편으로 돌아설 확률이 높았다.

    “계획을 서둘러야겠군.”

    “라리에트 침공 말씀이십니까?”

    “그래.”

    황태자가 되고 나서도 입지를 탄탄히 다지기 위해서는 걸림돌인 혈통부터 해결해야 했다.

    황후 쪽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확실하게.

    “이카르센 제도에 연락을 넣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방안도 생각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이어드가 통솔하는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유스티아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꺼냈다.

    세이어드의 판단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기에 유스티아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세이어드 님. 하지만…… 라히트리안 그 자만 믿기에는 중요한 문제인지라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렇지.”

    세이어드도 그걸 염려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확신이 있었다. 기록을 살펴보면 라히트리안은 일정한 주기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이카르센이 움직이는 것은 아주 드물고 대단한 일인지라 황실은 그들의 등장을 남김없이 기록해 두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마력이 어디까지라고 생각해?”

    “네?”

    “결국에는 라히트리안 이카르센도 한낱 인간일 뿐이지.”

    그러니 마력을 방출해야 하는 구실이 필요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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