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61)

* * *

이안은 오늘따라 라히트리안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확히 그의 입매가 올라간 걸 목격한 게 무려 다섯 번이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별로 그렇지는 않아.”

“그럼 왜 그렇게 이유 없이 웃으시는 건데요?”

“재밌어서.”

라히트리안의 손에 들린 펜이 화려하게 돌아갔다.

일반적으로 이카르센 마도국은 외부의 사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발을 빼는 건 불가능해서 라히트리안이라도 서류 업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늘상 성의 없는 업무 태도를 보여 왔던 라히트리안이 오늘은 집무실에 있는데도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이안.”

“네?”

“튜니아트에서 황녀를 찾지 못하도록 모든 흔적을 지워.”

“……네?! 다시 안 돌려보내십니까?”

이카르센과 튜니아트는 오랜 앙숙 관계였다.

서로 다른 힘을 숭배하는 입장을 고수하며 한 치의 양보를 하지 않으니 그만큼 감정의 골이 깊었다.

각각 신성력과 마력을 필두로 한 대치는 무려 천 년이 넘도록 이어져 오고 있었다.

“걸리면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안 들키면 되는 거 아닌가?”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라히트리안이 생긋 웃으며 턱을 괴고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입꼬리와 달리 냉정한 자안은 어느 때보다 서늘했다.

“내가 이겼어.”

“…….”

“그러니 가장 아끼는 존재가 내 옆에서 영생을 얻어 살아가는 걸 지켜보라지.”

라히트리안은 천 년 전처럼 물러나 줄 생각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미간이 살벌하게 구겨졌다.

“……이번에는 또 왜 그러십니까.”

또 나왔다. 라히트리안의 이상 반응이.

아침부터 다섯 번이 넘게 입매가 올라갔다면 그와 반대로 표정이 구겨지는 것도 벌써 세 번은 넘게 목격하는 중이었다.

“하.”

얼굴을 감싼 라히트리안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뜩였다.

황녀로 인한 부작용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라히트리안을 상당히 곤란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오늘 마법으로 성의 건물을 날려 버릴 뻔하기도 했다.

이유는 모두 하나 때문이었다.

그의 심장을 삼킨 리즈벳의 감정이 현재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었다.

일평생 이렇게 널뛰는 감정은 처음이었기에 라히트리안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으나 그 속은 휘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무섭고 꺼림칙한 기분이 쎄하게 피부에 느껴졌다.

라히트리안으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기에 불쾌함이 올라왔다.

“이안, 성내에 황녀가 보고 겁을 먹을 만한 게 있던가.”

“그런 건 없을 겁니다. 아, 마법을 접해 본 적이 없을 테니 그런 걸 보고 놀랄 수도 있겠네요.”

일리가 있었다.

튜니아트 내에서는 마법을 금기시하여 그것에 손을 댄 자는 누구나 예외 없이 처형당했다.

그러니 마법에 면역이 없는 리즈벳이라면 놀랄 만도 했다.

‘그럼 조만간 잠잠해지겠군.’

라히트리안은 다시 평정을 찾고 표정을 지웠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똑똑.

“라히트리안 님, 아니카입니다.”

“무슨 일이지?”

“황녀께서 만남을 청하셨습니다.”

“…….”

“라히트리안 님?”

그는 침묵했다.

황녀가 마법을 보고 놀라? 겁을 먹어?

전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리즈벳 튜니아트는 자신을 만나러 오는 중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한 절망적인 감정을 느낀 거였다.

‘이 여자가 날 뭘로 보고.’

아무리 라히트리안이라 해도 누군가 대놓고 자신을 향해 그런 감정을 느낀다면 기분이 상하기 마련이었다.

생각해 보면 리즈벳은 마탑에서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당연히 자신을 죽일 거라 여기며 눈을 감던 모습이 떠올랐다.

방금 느낀 감정도 그때와 다름없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었다.

순식간에 극악무도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파렴치한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라히트리안의 기분은 바닥에 처박혔다.

그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 * *

‘저, 저 남자 왜 저렇게 기분이 안 좋아?’

나는 빳빳하게 굳어 문턱을 넘으려던 발을 다시 뒤로 물렸다.

그러자 라히트리안의 열 받은 듯한 뒤틀린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뭐 하고 있어, 황녀. 어서 들어오지 않고.”

“…….”

“제 발로 직접 나를 찾아왔으니 아주 중요한 일일 거야. 그렇지?”

“하하……. 제가 일을 방해했나 봐요. 나중에 다시 올까요?”

“당장 들어와.”

나는 울상을 지으며 문턱을 넘어섰다.

그러기 무섭게 라히트리안이 뒤에 있는 아니카에게 지시했다.

“아니카, 그만 나가 봐.”

“네, 알겠습니다.”

탁.

뒤로 문이 닫혔다. 더 물러날 곳도 없어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안이 내게 앉으라며 소파를 가리켰다.

“여기에 앉으십시오.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네, 부탁할게요.”

입 안이 바짝 말라서 목소리가 잘 안 나올 것 같으니까.

입술을 그러 물며 어색하게 소파에 앉자 라히트리안이 맞은편에 앉아 나를 응시했다. 그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틀자 긴 흑발이 흘러내렸다.

그는 원작에서 설명한 대로 무척 위험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동시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고혹적인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흑발 사이로 붉은 귀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못 본 척 시선을 내리깔았다.

라히트리안은 저 제어구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세이어드 아트레시아가 향후 제안할 ‘라리에트 침공’을 수락할 것이다.

그는 주기적으로 넘치는 마력을 방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용건 있으면 말해, 황녀.”

이안이 마법으로 만들어 내어 준 차를 마시며 라히트리안이 운을 뗐다.

그래, 뭐든 이제 물러날 곳이 없었다.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뭐지?”

“……날 여기 왜 데려온 거예요?”

그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황녀가 내 물건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방도가 있나.”

“그럼 바로 가져갈 생각이 없는 거예요?”

날 데리고 있으면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내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흡. 숨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자 라히트리안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러는 황녀는 바로 돌려줄 생각이 있으신 건가?”

이제 결전의 순간이 왔다.

기다렸던 말이 나왔으니 나는 활짝 웃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라히트리안.”

어쩌면 이 말을 해서 쫓겨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간절한 것이었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침묵이 맴돌았다. 라히트리안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억지로 웃느라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언제까지 그렇게 웃고 있는지 보겠다는 듯 가만히 날 응시했다.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이안이 궁금한 눈치로 물었다.

“황녀님께서 뭘 빌리셨습니까?”

질문에 대한 라히트리안의 대답은 이안이 아닌 내게 돌아왔다.

“나는 황녀에게 빌려준 게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

“일방적으로 도난당한 건 몰라도.”

“하하……, 하.”

라히트리안의 뼈 있는 말에 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의 자안이 어디 변명해 보라며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무의식적으로 팔을 엑스차로 교차하며 상체를 가리자 라히트리안이 헛웃음을 들이켰다.

자안이 얼핏 내 가슴팍으로 향했다.

우리를 번갈아 보던 이안은 라히트리안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 충격받은 얼굴로 급히 손을 들어 그의 눈을 가렸다.

“어디를 보시는 겁니까, 라히트리안 님!”

“……뭐 하는 거냐, 이안.”

“황녀님이 무엇을 훔쳐 갔는지 몰라도……, 몰라도……?”

이안이 설마하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보았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멍하게 물었다.

“설마 황녀님이 빌렸다는 게…… 라, 라히트리안 님 심장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이 손 좀 치우지.”

“헉!”

라히트리안이 시야를 가리고 있는 이안의 손을 밀어내자, 이안이 숨 넘어갈 듯이 놀라며 입을 가렸다.

나는 지은 죄가 있었기에 두 사람을 외면한 채 애꿎은 찻잔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긴 정적 끝에 나는 라히트리안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꺼내 들었다.

“아, 아량을 베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

“……네?”

“두 번 말 하는 건 안 좋아하는데.”

나는 무심결에 전부라고 대답할 뻔하다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할 말 남았어요.”

본디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갈수록 강하게 나가 줘야 하는 법이다.

내 기세가 달라지자 라히트리안이 들어 보겠다는 듯 고갯짓했다.

“제가 튜니아트 황녀라는 건 알죠? 털끝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여신이 가만히 안 있을 걸요?”

그러니 서로 간의 합의 없이 강제로 회수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호오.”

“게다가 현재 당신 심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저잖아요. ……그러니 일단 저한테도 일부 권한이 있다고요. 혹시 가져가시려면 사전에 동의를 구해 주세요.”

“상당한 억지군.”

……이런, 안 통하나. 하긴 내가 들어도 이건 억지이긴 했다.

라히트리안이 생긋 웃었다.

갑자기 왜 저렇게 웃어?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내 감은 적중했다. 순식간에 표정을 지운 라히트리안이 문밖에 대기하고 있는 아니카를 불렀다.

“아니카.”

“네, 라히트리안 님.”

“황녀가 볼일이 끝났다는군.”

축객령이었다.

“잠깐만요, 라히트리안!”

“나가.”

그 말을 끝으로 아니카는 나를 끌고 집무실을 나왔다.

쾅-!!

그리고 내 부탁에 답하듯 거세게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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