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61)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상대가 너무 많았다.

걱정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는데 렘무트가 담담하게 말했다.

“안 되겠다.”

“뭐, 뭐가 안 돼요?”

설마 나 버리고 가는 거 아니지?

좁혀오는 포위망에 주춤거리며 렘무트에게 바짝 붙을 때였다. 그가 나를 냅다 둘러맸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놀란 건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렘무트의 어깨에 거꾸로 매달린 채 앞으로 시선을 올리니 여실히 당황한 눈빛들이 보였다.

“내가 누굴 지켜 본 적이 없어. 일단 이러고 있어 봐.”

“죽고 싶어 환장했나 보군.”

급기야 로이드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나는 그가 단 한 번도 저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기에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녀님을 당장 풀어 줘!”

“당장 황녀님을 내려놓고 투항해라.”

기사들이 움찔거리며 섣부르게 다가오지 못하고 외쳤다. 내가 인질로 잡혀 있어 공격이 쉽지 않은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라도 쓸모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때였다. 돌연 렘무트가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곳은 황성에서 제일 높은 시계탑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검은 구가 형상화되기 시작하더니 강하게 쏘아져 나갔다.

콰아앙-!!

검은 기운이 조금이라도 닿은 곳이 바스라지며 형체를 잃었다.

고막이 아플 정도로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거대한 돌덩이가 우수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계탑이 쓰러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멍하게 보았다.

“이러면 되는 거지?”

“…….”

뭐가 태연스럽게 ‘이러면 되는 거지?’야.

나는 짐짝처럼 흔들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할 말이 없었다.

빠르게 떨어지는 큼직한 돌덩이를 밟고 하늘을 날아오르며 렘무트가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찼다.

“계속 따라오네. 저 인간은 포기를 모르는군.”

“그야 제가 황녀라서 그렇죠.”

“귀찮아.”

“다치게 하면 안 돼요. 적당히 하란 말이에요! 저러다 진짜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렘무트가 뒤를 향해 다시 한번 마력 구를 쏘았다. 뒤를 바짝 추격해 오던 로이드가 황급히 검을 들어 막아냈다.

먼지바람이 이는 사이, 렘무트는 가볍게 황성을 빠져나왔다.

가볍게라기엔 조금 많이, 소란을 피우기는 했지만.

그는 한참을 달려 수도의 어느 골목길에 다다라서야 나를 내려 주었다.

나는 시야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자 어지러운 느낌에 눈을 감았다 떴다. 속이 울렁였다.

“이제 말해 봐요.”

“뭐를?”

“왜 로이드를 공격했어요?”

그것도 꽤나 진심이었다. 적당히 도망치면 될 일이었는데.

렘무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널 도와줬다고 하길래. 방해되잖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하는데. 혹시라도 저 인간이 널 살릴 방법을 알고 있으면 성가셔지고.”

……뭐?

그게 무슨 의미야?

어느새 바닥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떠올랐다.

렘무트가 생긋 웃으며 입고 있던 검은 후드를 벗어 내게 둘러 주었다.

머리카락까지 잘 가려지도록 끈을 꽉 당겨 리본으로 묶어 주었다. 그는 내 양 뺨 쪽의 후드를 덥석 잡고는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그가 하는 행동을 이상하게 보고 있는데 문득 한 걸음 물러나더니 내게 손을 흔들었다.

마법진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이게 뭔가 싶어 멀뚱멀뚱 그를 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가는 사람은 나 혼자야……?

“내가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따라 나선 네가 잘못한 거야, 리즈벳.”

“렘무트 당신……!”

“도착하면 탑 앞일 거야.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보석처럼 생긴 것을 찾아 삼켜. 망설이지 말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서서히 배경이 바뀌고 있었다.

나는 손을 허우적대며 마법진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게 네가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명심해.”

렘무트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나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탑이었다.

* * *

그래서 현재. 나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 렘무트가 말한 대로 탑을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허억, 허억……. 절대 가만 안 둬. 탑을 올라야 하는 거면 미리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검은 후드가 걸리적거렸지만 손에 들고 가는 것보다 입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계단을 오르며 이를 으득 갈았다.

다음에 만나기만 해 봐. 절대 가만 안 둬. 보물도 주지 않을 거야.

“……하아. 하아. 목말라.”

언제 꼭대기 층에 오를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나는 흐르는 땀을 닦아 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된 이상 몸이라도 살리고 봐야 했다. 이미 망가진 몸 상태라도 온전하게 만들어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나는 곳곳마다 성해 보이지 않는 성 내부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여기는 주인이 없나 봐.

여기를 다 오르고 난 다음에는 어떡하지.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어디든 몸을 숨길 수 있다면 상관없었지만.

……일단 후드는 계속 쓰고 다녀야겠어.

렘무트가 웬일로 후드를 입고 왔나 했더니, 마지막에 내게 주려고 입은 모양이다.

“지금쯤 황성이 뒤집어졌겠지.”

다들 나를 찾으려고 안달이 났을 것이다.

카로스도, 아틀레아도, 에테르온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테고. 조금은 쌤통이다.

나는 벽을 짚고 열심히 계단을 올랐다.

어느새 높이는 적어도 중간층은 온 것 같았다. 탑의 중앙에 있는 기둥으로 대략 가늠할 수 있었다.

기둥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땅이 아찔할 정도로 멀었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솔직히 무서웠다.

“오, 올라가고 난 다음에 얼른 삼키고 내려가야지.”

내려가는 건 금방일 거야, 아마도. 눈물이 앞을 가렸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이러다 다 오르기 전에 숨이 넘어가는 게 아닐까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라도 결국 끝까지 등반하기는 했으니까!

“와아아아!”

나는 환희에 젖어 두 손을 번쩍 올렸다.

드디어! 드디어!

나는 힘들었던 것도 잊고 안으로 들어갔다. 렘무트가 말했던 보석을 찾기 위해서.

그러나 꼭대기까지 올라왔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내부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볼품없었기 때문이다.

벽돌 사이사이마다 이끼가 피고, 천장은 거미줄로 가득했다. 나는 의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렘무트가 나한테 거짓말은 하지 않았겠지. 그도 나를 통해서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는 걸로 알았다.

설마.

아니, 설마가 맞을지도 몰라. 마족의 말을 어떻게 믿겠어.

그러나 나는 다행히도 보석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끝에 채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툭-.

“응?”

시선을 내리자 어둠 속에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이거구나!

렘무트가 말했던 게 이 안에 들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겉보기에 조금…… 아니 많이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내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는 아니지.”

달칵.

나는 보석함의 입구를 열었다.

틈 사이로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무척 신비로운 푸른 빛깔이었다.

갑작스러운 작열감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나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보석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보석의 표면에 손을 대 보았다. 차가운 감촉과 함께 기분 탓이겠지만 보석이 찌르르 울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리 없는데도.

“좋아, 삼킨다.”

나는 단숨에 끝내기로 결심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꿀꺽.

통증이 있을 거라 예상한 것과 다르게 목 넘김은 아주 부드러웠다.

나는 보기와는 다른 느낌에 놀라 목을 쓸어내려 보았다.

그때였다.

쿵-!

“어……?”

심장이 요동치고 강하게 추락하는 듯한 충격이 온몸을 덮쳐 왔다.

시야가 여러 개로 겹쳐져 흐릿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왜, 왜 이러지……?”

휘청이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급히 벽을 짚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두근. 두근. 두근.

계속해서 이상 증세가 지속되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도 피부 위로 느껴질 정도였는데, 그 위로 손을 올려 보니 손바닥 아래에 강한 맥동이 전달됐다.

나는 우선 진정하기 위해 숨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몇 차례 반복하니 조금씩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 행위에 집중하다 보니 알아차리지 못했다. 탑 안에 나를 제외하고 다른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쥐새끼가 숨어들었기에 와 봤더니.”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쯤 중략하겠다.

그다음은 앞으로 돌아가 벌어진 것 그대로였다.

나는 이카르센 마도 제도로 끌려왔다.

동이 트고 있는 새벽, 한적한 호숫가를 본 나는 얼떨떨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그분은 누구십니까. 라히트리안 님?”

“탑에 숨은 도둑.”

“네? 도둑이라니요.”

회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짧게 묶은 남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를 보고 있었다.

라히트리안의 보좌관이자, 이카르센 제도에서 두 번째로 서열이 높은 이안이었다.

그는 나를 살펴보더니 곧 하얗게 질린 낯으로 비명을 질렀다.

“튜니아트 제국의 황녀가 아닙니까!”

라히트리안이 긍정의 뜻으로 매끄럽게 입술을 올리며 웃었다.

나는 현행범으로 발각된 처지였기에 처음 보는 이안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태평하게 인사를 하고 있기는 했으나 속은 누구보다 착잡한 상태였다.

“앞으로 이카르센에서 지내실 예정이지.”

이제 하다 하다 이카르센 제도에서 지내게 생겼다.

바야흐로,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두 번째 사건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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