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61)

테라스에는 적막 속에 식기만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다.

참담한 얼굴로 연신 찬물만 들이키는 에테르온을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당연히 황제에게 이쁨을 받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카로스는 찬바람이 불 정도로 에테르온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의외의 관계에 내심 놀랄 때였다.

“그간 잘 지냈느냐, 리즈벳.”

나는 놀라 사레에 걸릴 뻔했다.

“……네, 아바마마. 언제나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대답을 하며 급히 물을 찾고 있는데 카로스가 모로 고개를 기울였다.

“짐은 너를 찾은 적이 없는데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느냐?”

“……네. 아바마마가 아니시면 제가 어떻게 황성에서 풍족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뺨이 따갑다 못해 뚫릴 것 같았다. 한참 후에 카로스가 바람 빠진 소릴 내며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다니 기특하군. 황녀가 아주 잘 자라 주었어. 그렇지 않나, 아틀레아?”

“……네, 폐하. 기특하게도 황녀가 아주 잘 자라 주었습니다. 고맙구나, 리즈벳.”

처음으로 황제에게 눈길을 받은 아틀레아가 급히 입 안에 들어있던 음식물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녀의 안색은 어느 순간부터 불안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에테르온.”

“네, 아바마마.”

조금 전부터 식사를 전혀 하고 있지 않던 에테르온의 안색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그는 드디어 카로스가 자신에게도 말을 걸어 주어서 기쁜 눈치였다.

“최근 여신의 궁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던데.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시녀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하던데. 이미 저잣거리에도 퍼졌다더군.”

카로스가 싸늘하게 표정을 지우고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물었다, 에테르온.”

에테르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놀라 카로스를 힐끔거렸다.

여신의 궁 시녀에 관한 건 카로스도 묵인한 사안이 아니었나?

잔인하기는 하나 황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었다.

‘근데 왜 이걸 이 자리에서 문제 삼아?’

공식적으로 나는 시녀들에 대한 일을 몰라야 했기에 어떻게든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내리 깔았다.

카로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내게 과하게 관심을 두면서, 아틀레아와 에테르온에게 날카롭게 구는 태도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식당에 적막감이 도는 가운데, 시선이 느껴졌다.

카로스가 나를 보고 있었다.

“리즈벳.”

“……네, 아바마마.”

“네 생각은 어떻지. 에테르온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하는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나는 그의 속내를 파악할 수 없어 결국 고개를 들고 얼굴을 마주 봤다.

카로스는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에 나는 묘한 확신을 얻었다.

카로스는 지금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확신.

나와 에테르온을 두고 어느 쪽에 손을 들어 주어야 할지를 말이다. 아직 신성력은 모두 옮겨진 게 아니니까.

‘하지만 카로스는 황실의 비밀을 지켜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려면 아틀레아와 같은 입장인 게 맞을 텐데. 왜 저 두 사람을 견제하는 것 같지?

“폐하!”

“왜 그러지, 아틀레아?”

결국 아틀레아가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농이 과하십니다.”

“그런가?”

흥이 식었는지 카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벽안이 날카롭게 반짝이며 아틀레아에게 경고했다.

“황후의 기세가 곧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되겠군. 명심해,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라는 걸.”

아무래도 나뿐만 아니라, 황제와 황후 사이에도 말 못할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 * *

기다리던 밤이 찾아왔다.

나는 자는 척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려다봤다.

성기사 수십 명이 황성 곳곳을 지키고 있는 게 보였다.

“마법을 쓸 수 있으면서 왜 밤에 보자고 한 거람.”

당장 떠나면 그만인데.

홀연히 사라졌다 나타났던 걸 보면 이동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오면 물어봐야지.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눈을 뜨고 있으려니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았다.

억지로 잠기운을 물리며 렘무트를 기다리고 있는데 스륵 방문이 열렸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렘무트!”

“쉿, 조용히 해. 그러다 들키겠어. 아직 성에 있는 기사를 전부 처리한 게 아니라고.”

그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덩달아 목소리를 작게 했다.

“네. 알겠어요.”

“나가자.”

우리는 복도로 나왔다. 불이 꺼진 복도는 고요했다. 곳곳에 기사들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검도 채 뽑지 못한 상태를 보니 렘무트가 그 전에 처리한 듯싶었다. 나는 궁을 나가며 그를 불렀다.

“그런데 렘무트.”

“왜.”

“하필 밤에 움직이는 건 왜 그런 거예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잠시 입을 다물었던 렘무트가 정면을 보며 말했다.

“말했잖아. 구경을 제대로 못 했다고. 네가 같이 다녀 준 걸로 끝내기에는 튜니아트 황성이 워낙 커야지.”

“…….”

“뭐.”

“제가 뭘요.”

“그럼 그 눈은 뭔데.”

보지도 않고서 어떻게 눈빛을 알았지.

나는 떨떠름하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단한 이유를 기대했던 내 잘못이었다.

“그럼 이렇게 몰래 움직이는 이유는 뭔데요? 마법을 사용하면 되잖아요.”

설마 다 구경하지 못한 구역을 둘러보고 가려는 계획은 아니겠지.

내 의심스러운 표정에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동 마법은 마력이 많이 필요해서 황성 안에서는 사용할 수 없어.”

“낮엔 잘만 사용했잖아요.”

“그건 혼자일 때고.”

“그럼 정문으로 황성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거네요?”

다행히 그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만 길을 골라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열심히 구경하고 다녔나 봐요?”

“…….”

“길을 아주 잘 찾네요.”

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렘무트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네가 오백 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와 봐.”

“오백 년 동안 어디서 뭐 했는데요?”

렘무트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 골목을 따라 걷던 중, 그가 힐끗 사방을 둘러보더니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슬슬 눈치챈 것 같아. 꽉 잡아.”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렘무트가 내 허리를 강하게 낚아채며 지면을 박찼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땅이 보이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하얗게 질린 채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렘무트는 황궁 건물을 뛰어넘으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발이 어딘가에 닿을 때마다 기도했다.

제발 이 순간이 빨리 끝나게 해 주세요!

억겁의 시간이 지난 게 아닐까 생각이 들 때쯤. 마침내 땅에 완전히 발이 닿았다.

심호흡 하며 진정하고 있는데 정수리 위로 렘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까지 제대로 가렸을 텐데, 어떻게 알고 따라붙었지?”

“네놈은 누구냐.”

“……로이드?”

자리를 비운다더니. 왜 황성에 있는 거지?

검 끝을 날카롭게 겨눈 로이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하얗게 질린 나를 보고는 검기를 만들어냈다.

저러면 나도 같이 위험해지는 거 아니야?

“자, 잠깐만요, 로이드! 진정해요. 언제 돌아온 거예요?”

“오늘 돌아왔습니다.”

“……가까운 곳에 다녀왔나 봐요.”

“스크롤을 사용했습니다.”

그렇구나. 하긴, 찢기만 하면 바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

잠시 깜빡했다. 그가 윈저 공작 가문의 공자님이라는 것을.

나는 살짝 렘무트의 팔을 흔들었다.

“렘무트, 저 사람은 다치게 하지 말아요.”

“왜?”

“……황성에서 저한테 제일 잘해 준 사람이거든요.”

“아, 그래?”

“네.”

“그럼 너한테 고대어를 알려 줬다는 인간도 저쪽?”

나는 대답 대신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렘무트가 생긋 웃으며 로이드를 돌아봤다. 진지하게 자세를 잡은 그가 갑자기 지면을 강하게 내려쳤다.

땅이 진동하며 검은 용암 줄기가 사방에서 폭발하듯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이에요?!”

“처리하는 중이잖아.”

“방금 내 말 듣기는 했어요?”

“들었어.”

렘무트가 입매가 비틀어 올라갔다.

“그러니까 처리해야지.”

뭐?

나는 표정을 굳혔다.

그러니까 처리한다니. 무언가 잘못됐다.

로이드가 뒤로 물러나며 덮쳐 오는 용암들을 검신으로 막았다.

“로이드!”

파훼된 용암 줄기가 순식간에 높이 솟구치더니 로이드가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로이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렘무트를 말리려 팔을 잡아 내렸다.

“렘무트, 당장 그만둬요!”

“싫어.”

콰앙-!

용암 사이를 뚫고 푸른색 검기가 날아들었다.

렘무트가 호오 감탄하며 나를 잽싸게 안아들고 몸을 피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반동에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억!”

마력이 흐트러진 찰나, 용암 사이로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로이드가 렘무트의 목을 베려 달려들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공격은 피했으나 머리카락 끝이 조금 잘려버렸다. 이에 렘무트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렸다.

허공에 흩날리던 적발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로이드의 기운이 단숨에 바뀌었다.

“네놈. 인간이 아니군. 마물인가?”

“그건 아니지만, 이것만 보고 어떻게 알지? 튜니아트의 제국민이 마물을 본 적 있어?”

“…….”

“봤구나?”

로이드의 검 끝이 매섭게 쏘아졌다.

묵묵히 그것을 보고 있던 렘무트가 나를 방패처럼 앞세웠다. 흠칫한 로이드가 빠르게 뒤로 빠졌다.

나는 헉 숨을 들이키며 외쳤다.

“미, 미쳤어요?!”

“그렇게 달려오면 안 되지. 인질이 나한테 있다는 걸 잊었어?”

“나를 끌어들이면 어떡해요?!”

사색이 되어 외치자 렘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잖아.”

이 배신자.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렘무트는 모른 척 뻔뻔스럽게 웃었다.

로이드는 살벌하게 렘무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감히 황녀님을 방패로 사용하다니.”

“필요에 따라 그럴 수도 있지.”

뭐가 필요에 따른다는 거야?

나는 그의 옆구리를 아프게 꼬집었다.

렘무트는 꿈틀거렸지만 미소를 유지한 채 이를 악물었다.

그때 하늘 높이 금색 조명탄이 쏘아져 올라갔다.

“침입자다!”

챙! 챙!

족히 수백은 넘어 보이는 황궁 기사들이 뛰쳐나와 포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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