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61)

황제 카로스는 그 사실이 알려지는 걸 막기 위해 로이드를 부른 것이다.

황후의 남동생인 로이드가 황실을 배신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서.

황제의 판단은 탁월했다.

결국 로이드는 윈저 가문에서 끌고 온 기사들의 목마저 베어 버리고 말 것이다.

로이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테드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로이드 님, ……제가 하겠습니다. 기다려 주시면…….”

“아니.”

로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을 테드에게 맡길 수 없었다.

이건 황제가 그에게 시킨 일이었다.

본인이 하겠다고 나섰으나 마음이 좋지 않은 건 테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로이드의 검날 끝에 검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결심을 마친 로이드는 살아남은 기사들에게 달려가 거침없이 한 명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아군인 자신들을 공격하는 로이드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기사들이 단말마를 지르며 쓰러졌다.

로이드는 손등이 하얗다 못해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세게 검을 쥐었다.

모든 것은 튜니아트를 위해서라고 했으나 진정 제국을 위한 일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까지 황실에 의구심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느냐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었다.

“리즈벳에게 고대어는 안 돼, 로이드. 이걸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너뿐이야. 정말 미안하구나. 일이 전부 끝나면 너에게 다 설명하마. 그러니 그때까지만 나를 지켜 줘.”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후, 차기 기사단장으로 거론되어 있던 시기.

탄탄대로인 미래가 그려진 로이드를 황후 아틀레아가 은밀하게 황성으로 불러들였었다.

그리고 리즈벳의 선생님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을 지켜 달라며.

마땅히 믿을 사람이 없다고 고백한 아틀레아는 리즈벳에게 고대어를 알려 주어서도, 세상 밖을 궁금하게 내버려 둬서도, 너무 똑똑하게도, 황실의 체면을 구길 만큼 멍청하게 키워서도 안 된다며 눈물을 흘렸다.

리즈벳의 눈과 귀를 막아 달라며 애원했다.

그때는 누이가 소중했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러겠노라 답했다.

아틀레아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황실의 이면과 관련이 있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주 어린 리즈벳을 처음 마주한 그 순간부터, 로이드는 누이의 부탁을 머릿속에서 서서히 지워버리고 말았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올려다보며 해맑게 인사하는 얼굴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리즈벳이 어떤 이유로 황실의 희생양으로 점찍어졌는지 몰라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스스로 지킬 수 있을 기회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로이드는 아이에게 아주 쉬운 것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가르치고 있었다.

조금씩 성장해 가는 자신의 조카는 무척 사랑스러웠다.

누구나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어여뻐서 지켜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틀레아의 부탁이 마음에 걸렸지만 로이드는 리즈벳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지금 와서 보면 아틀레아의 부탁은 아무리 좋게 봐도 결코 정상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그리고 황실에 의구심을 다시 갖게 된 지금, 모든 것은 수도로 돌아가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황실의 이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테드. 죽은 기사들은 이곳에 묻고 돌아가는 걸로 하지. 윈저 공작가의 표식이 남지 않도록 주의해.”

“네, 로이드 님.”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고 수도로 귀환한다.”

“……어, 저는 살려 주시는 겁니까?”

테드가 어정쩡하게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 본 일은 함구하라.”

로이드가 검집에 검을 넣었다. 그의 손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붉은 팔찌가 흔들리고 있었다.

* * *

“오늘 밤 기다려.”

결국 렘무트는 내 꼬임에 넘어왔다. 오늘이 황성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황성에서 자유롭게 마법을 사용하는 그를 보면 탈출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주체되지 않는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비죽비죽 올라갔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하는 점심 식사를 위해 오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단장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보다 훨씬 풍성하고 화려한 사파이어 빛 드레스와 머리, 귀, 목, 팔, 손가락까지 빠짐없이 장식하고 있는 장신구가 휘황찬란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황녀님.”

“응, 아마 절대 잊지 못하는 날이 되겠지.”

나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꾹 내리며 어깨를 떨었다.

의미심장한 내 말에 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럼 다녀올게, 리사.”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가자 바로 앞에 황제가 직접 보낸 마차가 서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카로스가 한 번이라도 내게 이런 성의를 보인 적이 있던가?

‘당연히 내 마차를 타고 걸어 올라가야 할 줄 알았는데.’

나는 신기하게 마차를 살펴봤다.

어릴 적부터 카로스는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이런 호의를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다.

황제의 인장이 새겨진 마차가 아니면 그가 있는 길리트 궁에 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카로스는 내게 한 번도 마차를 보낸 적이 없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 지금 마차를 보내다니.’

이건 누가 봐도 의미심장한 의도가 담겨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 화려한 모습에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던 마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예의를 갖췄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즈벳 황녀님. 어서 타시지요.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응, 어서 가자.”

마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문을 벌컥 열자 그가 당혹스럽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나는 생긋 웃으며 안으로 올라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달리는 마차는 무척 안정적이었다.

편안한 자세로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황제가 머무는 길리트 궁전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을 빼꼼 열어 보자 황성의 다른 궁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웅장한 성문이 버티고 있었다.

“안에 계신 분은 누구지?”

“리즈벳 황녀님이십니다.”

“들어가시게.”

허가가 떨어지자 이윽고 성문이 열렸다.

여기가 바로 제국의 정점에 서 있는 황제가 머무는 곳.

신들의 낙원이라 불리는 길리트 궁이었다.

황성에서 유일하게 모든 것들이 황금으로 만들어진 궁이었다.

마차가 한참 일직선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달리자 지상 낙원을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은 화려한 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색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세를 바로 하고 하늘 높이 검을 올렸다.

“리즈벳 황녀님을 뵙습니다!”

나는 급히 창문을 닫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막상 길리트 궁에 도착하니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긴장되어 몸이 굳었다.

마차가 완전히 멈춰서고 마부가 문을 열었다.

“황녀님, 도착했습니다.”

“…….”

“황녀님?”

“아, 그래.”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성기사 한 명이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안내받는 내내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만 날 뿐, 주변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숨 막혀.’

길리트 궁 분위기는 항상 이런 식인 건가? 이게 무슨 지상 낙원이야.

“이곳입니다.”

“고마워요.”

할 일을 마친 성기사가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길리트 궁의 삼층, 동쪽 테라스로 들어가자 미리 도착해 있는 아틀레아와 에테르온이 보였다.

에테르온은 바깥에서 소란스럽게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는지 기다렸다는 듯 타박했다.

“늦었구나. 감히 나와 어머니보다 늦게 도착하다니.”

“죄송해요, 오라버니.”

“꼴이 그게 뭐지? 하나같이 값비싼 장신구로 휘감았구나. 황실 예산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다니 정신머리를 어디에 두는 게냐. 사치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나 보지?”

에테르온은 과할 정도로 화려하게 꾸민 내 모습을 비웃으며 혀를 찼다.

“그러니 아바마마가 찾지를 않지.”

에테르온은 나를 공격하기 위해 일부러 기분 나쁠 만한 말만 골라 했지만, 애석하게도 그 말에 표정이 굳은 사람은 내가 아닌 아틀레아였다.

그녀의 치장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에테르온, 그만하거라.”

“제가 틀린 말했습니까?”

“이런 날에 소란 피워서 뭐 하겠니.”

아틀레아가 조곤조곤하게 타일렀다. 그러자 에테르온이 잠잠해지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너도 괜히 아바마마 눈에 띌 생각 하지 말고 조용히 식사하고 돌아가. 알겠어?”

진짜 성격 한번 더럽네.

나는 울컥했지만 생긋 웃어 보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오라버니.”

그런데 어디 앉아야 하지?

오른편에는 아틀레아가, 왼편에는 에테르온이 앉아 있어 어느 쪽을 선택하든 고역일 것 같았다.

에테르온 옆에 앉자니 그가 학을 뗄 것 같고, 아틀레아 옆에 앉자니 그를 마주 보고 앉아야 하지 않나.

‘그래도 아틀레아 옆이 낫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식당 입구에 멀뚱멀뚱 서 있을 때였다.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 서 있는 거지?”

“……아바마마?”

놀라 뒤를 돌아보자 카로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린 벽안과 마주치자마자 온몸이 경직되는 느낌이었다.

당황스럽게 뒤로 물러나려는데 카로스가 휘청이는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에테르온.”

“네, 아바마마.”

“황후 옆에 앉거라. 그 자리는 리즈벳의 자리니.”

“……네?”

“한 번으로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냐.”

급히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지운 에테르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아틀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옆으로 오거라, 에테르온.”

“네, 어머니.”

에테르온은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으나 카로스의 앞이었기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의자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이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하얗게 변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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