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61)
  • “후우. 큰일 날 뻔했네.”

    무사히 결계 안쪽의 전시관으로 들어온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렘무트는 벌써 제집인 양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시관에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깨닫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을 배척한다면서 이런 건 잘만 가져와서 쓰네.”

    “얼른 구경이나 해요. 시간 없으니까.”

    렘무트는 마법이 깃든 물건들에 빠르게 관심을 끄고 눈길을 돌렸다.

    반짝거리는 적안이 탐욕으로 가득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게 잔뜩 있잖아? 이런 비좁은 곳에 있기 아까워.”

    “조금만 조용히 구경할 수 없어요? 그러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키겠어요.”

    “리즈벳, 이거 하나 없어진다고 티도 안 날 텐데 우리 두 개만 가져갈까?”

    하나에서 손가락이 둘로 늘어났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나는 절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는 건 황실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국가 보물이에요. 구경 다 하고 얌전히 돌아가는 거예요. 알겠어요?”

    이거 무슨 어린애를 달래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수천 년 전의 그림들은 관심이 없는 사람의 눈길까지 길게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웠다.

    또 시대별로 두드러지게 달라지는 화풍은 신비롭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황실에서 특별히 관리하고 있는 만큼 가치도 어마어마할 테지.

    눈앞에 전시된 그림을 보며 렘무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걸음을 돌렸다.

    “신성력을 가진 인간들만 아니더라도 전부 가져갈 수 있는데”

    “누가 들으면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있는 줄 알겠어요.”

    구경을 끝내고 헬라리움 전시관을 나오던 렘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더 있지.”

    예고 없이 원작과 다른 설정이 튀어나왔다. 물론 나는 놀라지 않고 최대한 심드렁한 척 표정을 유지했다.

    렘무트가 손을 들어 맞은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튜니아 여신의 상징이 하늘 높이 솟아있는 신전이 있었다.

    “저기에.”

    이번에는 내가 말 할 차례였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넌 대체 알고 있는 게 뭐야?”

    “당신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거거든요.”

    “여기는 네 집이거든?”

    렘무트는 신전의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새하얀 신관복을 입은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럼 저 신관들은 쓸모도 없는데 여기에서 뭐 하는 거야?”

    “당연히 병자를 치료하는데 힘쓰죠.”

    “어떻게?”

    “의술을 배워서요.”

    “의술?”

    렘무트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 어느덧 눈에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너 진심이야? 그럼 튜니아트가 어떻게 클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당연히 튜니아 여신 덕분이겠죠.”

    여신의 가호를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튜니아트 제국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로 인해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지금의 튜니아트 신성 제국이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렘무트가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겨우 그런 이유로 인간들이 모여 산다니. 살기 좋은 땅은 얼마든지 있어.”

    “아니면 마물이 없어서 그런 거겠죠.”

    “마물은 군대만 있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튜니아의 권능은 황족에게만 허락된 게 아니라고. 그럼 저 인간들 몸에 여신의 문양이 왜 있겠어?”

    태어날 적부터 튜니아 여신의 문양이 신체 어딘가에 새겨진 사람들이 있었다.

    매해 튜니아트 황성은 여신의 문양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의 인원을 파악한 후, 걸음마를 떼는 순간 황성으로 입궁시켜 신관으로서의 교육을 실시했다.

    그럼 본래 황성에 있는 모든 신관과 성기사들은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가?

    “고작 황족 몇 명이 받은 여신의 가호로 제국을 지킬 수 있던 거라고 생각한 거야? 턱도 없는 소리하지 마. 신관이나 성기사들도 문양의 힘을 빌려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어.”

    렘무트가 키득거렸다.

    “아, 지금은 ‘그랬었다’고 해야 하나?”

    과거엔 그랬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그 말은 튜니아트 제국은 예전부터 무너지고 있었다는 거겠지.

    그럼 원작에서 튜니아트 제국이 몰락하는 것도 전부 튜니아 여신의 뜻이라고 봐야 하나?

    에테르온이 황족을 모두 멸족시키는 것도?

    나는 부디 그게 아니길 빌었다.

    만약 그 모든 것이 여신의 뜻이라면, 튜니아트의 황족으로 태어난 나도 무사할 수 없을 테니까.

    * * *

    이카르센 마도 제도.

    “라히트리안 님! 대체 어디에 계시다가 이제 돌아오신 겁니까.”

    회색 머리 남자가 소란스럽게 들어왔다.

    이카르센 제도 성의 남쪽 집무실 창가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길게 내려오는 흑발과 섬뜩한 자안을 지닌 남자는 자신을 찾은 부하의 걸음이 반갑지 않은지 미간을 좁혔다.

    “이안.”

    “네!”

    “별거 아니면 목부터 간수해야 할 거다.”

    “……하, 하하.”

    남자의 자안이 무심하게 이안에게 향했다. 흑발 사이로 붉은색 마력 제어구가 반짝거렸다.

    이안은 안색을 흐렸다.

    ‘망했다.’

    하필 심기를 건드려도 이럴 때 라히트리안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라히트리안 이카르센.

    그는 마도 제도의 정점에 서 있는 자로 대륙의 모든 마법사를 이끄는 존재였다.

    마탑의 유일한 주인이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마력을 지닌 존재.

    위험한 만큼 숨 막힐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남자가 생긋 웃었다.

    “이안, 이 생에는 미련이 없는 건가?”

    “아, 아니요. 있습니다. 있어요.”

    멍하게 라히트리안을 보던 이안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저 얼굴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저 발아래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알 만한 자는 모두가 알았다.

    “아무래도 직접 나서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최근 마력이 크게 요동쳤던 적 없으십니까?”

    “있지.”

    그래서 라히트리안은 현재 제어구를 착용 중이었다.

    “제가 그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지?”

    “최근 그 마룡이 깨어났답니다.”

    “마룡이라……. 확실히 예전에 그런 게 있었지.”

    스스로를 마계의 주인이라며 대륙을 휘저어대더니 진귀한 보물을 닥치는 대로 훔쳐갔었다.

    그리고 마침내 탐내서는 안 될 것까지 손을 대려고 했었다.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의 심장.

    마탑에 보관되어 있는 그의 마력이 응집되어 있는 순도 높은 마력석을 탐냈었다.

    라히트리안은 영생의 몸이 되며 전무후무한 마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육체는 인간의 것이었기에 마력이 쌓이는 심장을 외부에 분리해 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마룡은 매우 흥미로워했다. 자신처럼 드래곤하트와 비슷한 게 인간에게도 있다 하니, 관심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라히트리안의 심장을 본 마룡은 그대로 미쳐 날뛰었다.

    그 어떤 보석보다 정신을 놓을 정도로 아름다웠기에.

    “라히트리안 님이 직접 봉인하셨었잖아요.”

    “그런데?”

    “……봉인이 깨졌습니다.”

    그때 당시 라히트리안은 마룡이 아끼던 보물 창고까지 찾아가 전부 소멸시켰었다.

    나중에 깨나 열 받겠다고 여겼었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그리고 그 마룡이 사라진 지점이 튜니아트 국경입니다.”

    “……그럴 수 없을 텐데.”

    라히트리안의 자안이 섬뜩하게 일렁였다.

    마계의 생명체는 절대 튜니아트의 국경선도 밟을 수 없었다.

    여신의 가호 덕분에 닿는 순간 필연적으로 사그라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튜니아트 제국에는 마물조차 나타난 적이 없었다.

    “……하긴. 튜니아트도 그 상태로 오래 버텼지.”

    “왜 튜니아트로 향한 걸까요?”

    “글쎄.”

    “마룡이 굳이 그런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있을까요?”

    라히트리안의 입매가 올라갔다.

    한 가지 있었다. 마룡 수준에서 떠올릴 법한 계략이.

    참 기묘한 우연이었다. 튜니아트의 황녀가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될 때쯤, 마룡이 그곳으로 향하다니.

    “튜니아가 또 장난을 치려는 거로군.”

    그렇다면 이번에도 기꺼이 응해 주어야지.

    라히트리안의 눈동자에 잔인한 이채가 스쳤다.

    * * *

    튜니아트 국경 지대.

    황제의 명령으로 직접 윈저 공작가의 군대를 이끌고 온 로이드는 달려드는 마물을 향해 검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가 빼냈다.

    초록색의 끈적끈적한 액체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벌써 이게 몇 마리째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끝인가 싶으면 어김없이 마물이 튀어나왔다.

    “제길. 대체 이게 몇 마리 쨉니까!”

    “다른 기사들은?”

    “거의 전멸했습니다. 마물을 처음 보니 다들 패닉 상태예요.”

    이번 토벌 작전에서 부 통솔자로 임명된 테드가 검을 사선으로 그러 내리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커다란 날개가 달린 곤충 형태의 마물이 힘없이 쓰러졌다.

    테드는 후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산처럼 쌓인 마물이 벌써 한가득이었다.

    기사 몇 명을 추려 마물의 흔적을 전부 없애라 지시했으나 이래서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고약한 냄새가 더해져 속이 메스껍다.

    테드는 구역질을 참으며 혀를 찼다.

    튜니아트 제국에 마물이 출몰했다니.

    그는 직접 토벌에 참여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잔챙이들만 정리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도망친 기사들은…… 전부 처리했겠지?”

    “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테드가 확신에 차 대답하자, 로이드는 검을 꽉 쥐었다.

    토벌로 끝이 아니었다. 황제는 그에게 ‘살아 숨 쉬는 것 모두’ 처리하고 돌아오라 명령했다.

    그러니 마물 뿐만이 아니라 인근 주민들과 마물을 목격한 모든 이들을 처단해야만 했다.

    그는 처음 카로스의 명령을 들었을 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국경의 참상을 보고 깨달았다.

    튜니아트의 신성한 가호가 깨진 것이다.

    개국 이래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마물이 들끓으며 제국이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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