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 아틀레아가 우아한 동작으로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것을 잠자코 보고 있던 황제 카로스가 찻잔을 받아 들었다.
“예정보다 너무 이르군. 황후가 많이 놀랐겠어.”
“이르긴 하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닙니다.”
“조만간 리즈벳과 식사 자리를 마련하도록 해. 맞이하지 못할 생일, 미리 축하해 주어야지.”
“네, 폐하. 실수 없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를 보는 카로스의 벽안에는 어떤 애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찻잔을 비스듬하게 들고 돌리며 픽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눈치를 보는 게 훤히 들여다보였다.
“할 말이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해. 황후와 같은 장소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으니까.”
아틀레아는 티 나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가 입매를 끌어 올렸다.
“로이드를 국경에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대의 동생은 너무 강직해. 그러니 짐이 도와주어야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신의 가호가 약해지고 있다는 건 그대도 알고 있겠지.”
아틀레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카로스는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이제 완전히 옅어져 그 색조차 제대로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백발에 가까운 은발을 하고 있었다.
“국경에…… 무엇이 나타났습니까.”
“황후가 생각하기에는 무엇 같나.”
“……마물입니까?”
찻잔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아무리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들, 황후의 동생이자 공자인 로이드를 마물이 출몰하는 국경으로 내몰다니.
평화로운 튜니아트 제국의 기사들은 마물을 본 일이 거의 드물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자들이 대다수였다.
충격을 받은 듯한 아틀레아의 모습에 카로스가 비웃었다.
황후의 자리에 앉은 그녀는 매번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던 척 저리 순진하게 굴었다.
여신의 가호가 몰락하게 된 원인의, 원수와도 같은 가문의 아가씨였던 주제에.
“아틀레아.”
“네, 폐하.”
“튜니아트 제국의 공작가들이 어떻게 천 년이 넘도록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지 아나?”
“……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머리가 있으면 사용을 해. 천 년이 넘도록 그 세 가문에서만 황후가 배출되었다는 것만 봐도 짐작이 갈 텐데.”
아틀레아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과거 튜니아트의 황실에서는 여신의 뜻을 거역하는 황태자가 나타났다.
오직 여신이 선택한 존재만 튜니아트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그럼 다른 튜니아트 혈통은 절대 주인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인가. 어떤 노력을 해도?
그래서 그 황태자는 황녀의 신성력을 훔쳤다. 평화를 바라는 여신을 배반하고 금단술을 완성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황녀가 명을 달리하고, 황태자가 신성력을 다룰 수 있게 되자 주변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황태자는 자신의 정당성을 강력히 주장하면서도 두려움에 휩싸였다.
자신의 그릇된 행위로 인해 혹여 튜니아트의 축복이 사라진 게 아닐까?
그러나 놀랍게도 황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해에 신성력을 지닌 황녀가 태어났다.
카로스는 픽 실소했다.
“멍청한 선조 때문에 후대가 고생이로군.”
“……송구합니다, 폐하. 성심성의껏 튜니아트를 위해 이 한 몸 바쳐 일할 것입니다. 평생을 그리 살 것입니다.”
“그대가 송구할 게 있나.”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무거워진 선대 황제는 결국 자신의 친우들에게 금단술의 존재를 발설하게 됐다.
그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친우의 가면을 쓰고 있던 그들은 황실을 상대로 협박했고, 결국 3대 공작가에서만 황후를 배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다.
“일이 끝나면 리즈벳과 관련된 모든 사람은 처리하도록 해. 그대 혈족이라고 망설이면 곤란해.”
“네, 물론입니다. 트리아 백작가도 반드시 처리하겠습니다.”
트리아 백작가는 윈저 가문의 방계였다. 본디 직계였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공작위를 물려받게 되면서 새롭게 직위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틀레아가 리즈벳을 감시하면서 이용한 가문이기도 했다.
“아니면 차라리 트리아 백작이 공작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카로스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아틀레아는 무표정으로 땅을 보고 있었다. 더 이상 억지로 입술이 올라가지도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은 창백하게 굳었고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찻잔을 세게 쥐고 있었다.
그것을 본 카로스는 실소하며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아틀레아가 멀어져가는 그를 보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카로스가 떠나고 한참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멀찍이 떨어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녀에게 말했다.
“에테르온을 보러 가야겠구나.”
“네, 황후마마.”
오직 그녀의 아들 에테르온만이 아틀레아를 버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황성에서 유일한 그녀의 편이었으니까.
* * *
“렘무트.”
“왜.”
이른 아침,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두 손을 마주 모았다.
평소와 다른 사근사근한 태도에 렘무트가 실눈을 떴다.
“나 도와주기로 한 거, 시일을 좀 앞당길 생각은 없어요?”
내가 이런 부탁을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오늘 아침 리사가 전한 소식 때문이었다.
“리즈벳 황녀님, 내일 점심은 함께하자는 황후 마마의 전언입니다.”
“뭐라고?”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도 모두 참석하시니 반드시 참여하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세상에, 맙소사였다.
갑작스러운 식사 초대도 당혹스러운데 거기에 황제까지 참석한다고 하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설마 최후의 만찬 같은 건 아니겠지?
눈 뜨면 어디 이상한 곳에 갇혀 있고 그런 건 아니겠지?
오만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
렘무트는 고민이 되는 듯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 초조함은 배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네?”
“아직은 좀 빠르다니까.”
“뭐가 빠르다는 거예요. 전 한시가 급하거든요!”
“…….”
“보물 더 줄게요. 저 많아요.”
튜니아트 황녀에게는 대대로 상속되는 보물이 한가득이었다. 따로 관리하는 창고가 있을 정도로 양이 어마어마했다.
왜 이런 게 황녀에게만 상속되나 했더니, 이런 때 사용하라는 여신의 뜻인가 보다.
내 설득에 렘무트가 흔들리는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며 본심을 꺼냈다.
“튜니아트는 처음 와 봐서 아직 구경을 다 못 했어.”
“네? 잘 못 들었어요. 뭘 못 했다구요?”
“……구경.”
“…….”
“뭘 봐.”
짜게 식은 표정이 펴질 줄 몰랐다. 그가 헛기침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마족이면 튜니아트 제국에 한 번도 못 와 봤을 만했다.
이왕 온 거 언제 또 기회가 될지 모르니 질릴 때까지 구경하겠다는 거구나.
그건 인간이나 마족이나 똑같네.
하지만 내게는 그의 나들이를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로이드도 자리를 비운 지금이 황성을 탈출하기에 적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렘무트가 망설이는 이유를 빨리 제거해야만 했다.
“렘무트.”
나는 그를 살살 달래듯 부르며 생긋 웃었다.
“이해해요. 튜니아트가 처음이라서 그런 거.”
“…….”
“그거 알아요? 나랑 다니면 렘무트가 못 가 본 곳도 전부 출입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입구가 결계로 막힌 곳이라든가.”
“……같이 다녀 준다고?”
렘무트가 솔깃했는지 반응을 보였다.
결계는 튜니아트의 황족만 출입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제아무리 노련하게 남들 눈을 속이고 열심히 구경하고 다녔다 한들, 겉핥기 수준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미끼를 던졌다.
“튜니아트 황실 대대로 황녀에게만 상속되는 막대한 보물도 있어요. 창고까지 따로 있는 걸요.”
나는 그의 팔목에 걸린 보석을 보며 상큼하게 비웃어 보였다.
“그거? 별거 아니에요.”
“……보물 창고?”
렘무트의 시선이 무섭게 꽂혀 왔다.
낚였구나. 나는 얼른 낚싯대를 당기기로 했다.
“네! 튜니아트가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건 알죠? 엄청나다구요.”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그럴 것이다.
“난생 처음 보는 게 잔뜩 있을걸요?!”
아마도.
어느새 완전히 넘어온 렘무트가 눈을 반짝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황성에서 나가자 할 기세였다.
그런데 보물 창고를 열 수 있는 열쇠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는데. 위치는 대략적으로 알았지만…….
떠올려 보니, 창고는 여신의 궁 지하에 있다고 들었던 것 같다. 이런 건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손뼉을 짝 치며 웃었다.
“이제 나를 도와줄 마음이 생겼어요?”
* * *
그리하여 나는 이른 아침부터 렘무트를 끌고 황성 곳곳을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종아리가 아팠지만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어쩌겠어.
“여기가 헬라리움 전시관이에요. 들어 봤어요? 튜니아트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작품만 전시된 곳이에요.”
“알아. 저 안에 있는 인간들 이름은 나도 들어 봤어.”
뭐 그런 걸 설명하냐며 다소 시니컬하게 대답한 렘무트가 빠르게 앞장섰다.
잠시 한 대 쥐어박을 수 없을까 그의 뒤통수를 보며 손을 쥐었다 펴 본 나는 슬그머니 뒤로 팔을 숨겼다.
그래, 아직은 참자. 참아야 한다.
“왜 그리 느려? 안내해 주겠다고 한 건 너잖아.”
“그거 참 미안하네요, 아주.”
나는 헬라리움 전시관 입구 앞에 섰다.
튜니아트 제국에서 특별히 선정하고 관리 중인 작품들만 전시된 곳인 만큼, 입구는 엄중한 분위기였다.
금색 갑옷을 입은 성기사가 절도 있게 검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리즈벳 황녀님을 뵙습니다.”
성기사가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문을 열었다.
“헬라리움 전시관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는 렘무트에게 손짓했다.
내가 먼저 황성을 구경시켜 준다고 하긴 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들킬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결계가 있는 쪽으로 손을 뻗자 손가락 끝으로 막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재빨리 성기사들의 시선을 따돌린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렘무트를 안으로 퍽 밀쳤다.
둔탁한 소리를 들었는지 성기사가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급히 허공에 뻗어 있던 손을 내리고 생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