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61)

하지만 도망에 성공하더라도 내가 살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비록 통증이나 고통은 없었지만, 피를 토하는 몸 상태는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황성에서 나갈 수 있다고 한들 의미가 없었다.

“황녀님, 리사입니다.”

“들어와.”

그런데 리사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다시 식사를 준비해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경황이 없어 깜빡했나?

의문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자, 리사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표정이 왜 죽을상이야?”

“……뭐?”

“아, 아직 이 모습이지.”

리사의 겉가죽이 이리저리 뒤집히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붉은빛 사이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렘무트였다.

“아, 아 진짜…… 깜짝이야.”

나는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도감도 함께였다.

만약 진짜 리사였다면 한동안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런데…….

“레, 렘무트. 당신 어떻게 마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뭐가?”

나는 놀라 입을 벌렸다.

침대 캐노피에 가볍게 기대 팔짱을 끼고 있는 렘무트는 무척 태연자약했다.

튜니아트 황성에서는 신성력이 아닌 다른 기운은 절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만큼 강력한 여신의 가호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겠어. 사용해 보니까 되던데.”

“…….”

“한계는 있지만 아예 못 쓰는 건 아니더라고.”

튜니아트가 진작 여신에게 외면당했다는 건 알았지만 황성의 보호는 건재할 줄 알았다.

이런 심각한 상태로 잘도 주변국을 속이며 제국을 유지해 왔구나.

‘원작에서 왜 그렇게 빨리 튜니아트가 멸망했는지 알겠네.’

이제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 와 됐다며 손을 저었다.

누워 있는 나를 보며 렘무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병자처럼 누워 있어?”

“병자니까요.”

“……왜?”

“피를 토했거든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빠르네.”

뭐? 좀 빨라?

나는 벌떡 일어났다. 렘무트가 주춤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 갑자기.”

“렘무트도 제 몸이 이럴 줄 알고 있었어요?”

“대충은.”

“그런데 왜 말 안 해 줬어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아까 진짜 무서웠단 말이에요.”

아틀레아와 둘이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면 아직도 오싹했다.

렘무트는 나를 빤히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마치 어깨를 토닥여 주듯 손을 허공에 까딱였다.

“그래, 그래. 알겠어. 다음부터 미리 말할게.”

“……다음이 어딨어요. 당장 황성을 나가야지.”

“그럼 방법을 생각해 보…….”

수긍하며 대답하던 렘무트의 대답이 끊겼다.

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적안이 특정한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같이 고개를 돌려보니 오랫동안 열어 보지 않았던 보석함이 있었다.

그는 홀린 듯 걸어가더니 보석함을 열었다.

튜니아트 특유의 맑은 기운을 닮은 빛깔의 보석이 반짝거리며 모습을 보였다.

“튜니아트에서 취급하는 건 처음 봐.”

“……아, 그래요? 보석에 관심 있으면 한 번쯤 전시장에 와 봤을 거 아니에요.”

“한 번도 못 와 봤으니까.”

온 정신이 보석에 팔려있는 렘무트는 반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이거 나 주라.”

“제가 왜요?”

“내가 도와주잖아.”

“아직 아무것도 안 도와줬어요.”

그러자 렘무트가 얌전히 내 앞에 와 착석했다. 이불 위에 보석함 속 보석이 우르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태도에 뭐 하는 짓이냐며 쳐다보자 그가 재촉했다.

“물어보고 싶은 거 얼른 다 물어봐. 그럼 이거 나 주는 거지?”

“……그렇게 갖고 싶어요?”

나는 특히 렘무트가 관심을 보이는 루비를 들어 올렸다.

“자요.”

보석을 그에게 건네는 순간이었다. 그의 손바닥과 내 손이 맞닿았다.

동시에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화들짝 놀란 렘무트가 손을 감싸며 외쳤다.

“앗, 뜨!”

삽시간에 정적이 일었다.

화상이라도 입은 사람처럼 손을 감싼 렘무트는 무척 억울해 보였다. 보석을 노려보는 적안이 일렁였다.

“……렘무트. 당신 정체가 뭐예요?”

“내가 뭐.”

“지금 나랑 닿자마자 화상 입은 거 아니에요?”

“…….”

“혹시…… 인간이 아니에요?”

다시 확인해 보기 위해 손을 뻗자 렘무트가 몸을 뒤로 물렸다. 그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게 중요한가?”

“그럼 안 중요해요?”

“네 목숨이나 챙기는 게 어때.”

……그렇게 말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것도 그렇네.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다른 거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나는 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낯선 조력자의 신분은 되도록 확실히 하고 싶었다.

“어차피 대충 눈치채고 있어요. 역시 인간이 아닌 거죠?”

“어.”

나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저리 순순히 시인하니 살짝 당황스러워졌다.

어찌 됐든 렘무트는 화상을 입었는데도 지금 자리를 지킨 채 보석에 시선이 팔려 있을 정도였다.

그가 보석을 환장할 정도로 좋아한다는 건 알겠다.

사실 그의 정체가 어렴풋이 짐작되는 것도 있었다.

여신의 가호를 받은 나와 닿자마자 화상을 입는, 태초부터 신성력과는 상극인 존재.

아마도, 마족.

‘튜니아트 황성에 마족까지 드나들 수 있게 됐다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렘무트. 그럼 이제부터 물어보고 싶은 거 물어보면 돼요?”

“그러든가.”

그의 태도가 한층 까칠해졌다. 조금이나마 드러난 정체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생긋 웃어 보였다.

“너무 그러지 마요. 나도 몰랐잖아요. 대신, 이거 말고 더 줄까요? 대답만 잘 해 주면 이것보다 더 귀한 보물도 줄 수 있어요.”

“…….”

“정말 약속.”

렘무트가 다시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내 발치에 앉았다는 게 달라진 점이었지만 이게 어디인가.

나는 앞에 있는 보석들로 손을 뻗어 전부 렘무트가 있는 쪽으로 쭉 밀었다.

“좋아, 그럼 이제 대화할 수 있겠네요. 첫 번째 질문이에요. ……지금 이 몸 상태로 전 계속 살 수 있어요?”

“아니. 그게 가능하겠냐.”

대답은 가차 없었다. 나는 갑자기 명치가 아픈 것 같아 윽, 하며 몸을 숙였다.

그래, 괜찮아. 대충 예상했던 거였잖아.

“그, 그럼 렘무트가 저를 살려 준다고 했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죽는 건 네가 아니야. 그 몸이 죽는 거지.”

“네?”

“튜니아트 황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바로 그거거든. 네 몸이 바스라져서 영혼인 상태가 되는 것.”

“…….”

“그래서 네 영혼을 황태자한테 종속시키는 거야. 신성력은 육체가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영혼에 반응하니까.”

나는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언젠가 내 몸이 바스라져서 사라질 거란 뜻이야?

게다가 편하게 눈감지 못하고 평생 에테르온에게 종속되어서 살아가야 한다니.

“……그래서 황후가 항상 에테르온에게 거역하지 말라고 했던 거였구나.”

“맞아. 영혼이 반항하면 그만큼 신성력을 다루기 어려워지니까.”

나는 표정을 굳혔다.

지금까지 내가 황실에서 듣고 칭찬받았던 것들이 전부 에테르온에게 종속시키기 위한 과정이었다니.

“뭐 하냐?”

“뭐 하기는요. 지금 몸을 살펴보고 있잖아요. 바스라진다면서요? 이제라도 내 몸을 아껴 줘야죠.”

나는 급히 팔다리를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살폈다. 이런 약하고 한시적인 몸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거라니.

울상을 지으며 내 몸을 혼자 껴안자 렘무트가 이해 못할 생물체를 보듯 쳐다봤다.

“그런다고 몸이 복구되는 건 아니잖아.”

“……기분상의 문제거든요.”

“완전히 금이 가기 전에 다시 살려내면 돼. 그 시기를 놓치면 방법이 없어.”

“그게 언젠데요?”

“신성력이 각성하는 날.”

나는 눈을 깜빡였다.

신성력은 이미 에테르온이 다 훔쳐 간 거 아니었어? 아직 각성할 게 남아 있는 건가?

“태어날 때 신성력을 갖고 태어나기는 하지만 그 시기의 인간은 몹시 불완전하고 연약해. 온전한 신성력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으로 성장해야 되지. 지금 황태자가 가지고 있는 네 힘은 일부에 불과해.”

“그러니까 내 몸이 연약해서 신성력이 한 번 더 각성한다는 거네요?”

“맞아.”

“……그리고 그건 아마도 제 스무 번째 생일이 될 거고요.”

그래서 역대 황녀들이 성인이 되자마자 죽었던 거였구나.

나도 마찬가지로 신성력을 각성하게 되면 몸이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부서지겠지.

하지만 타고난 신성력을 대체 어떻게 가져갈 수 있는 걸까. 그건 여신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가?

나는 보석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심각하게 하나씩 손가락으로 집어가며 세고 있는데 렘무트가 픽 웃었다.

“황실은 금단술에 손을 댄 거야. 신성력은 생명력이나 마찬가지니까. 인간의 집념이 결국 술법을 완성해 낸 거지.”

그가 보석들을 하나씩 손목에 걸었다.

내가 질문한 것 외에도 그가 개인적으로 대답해 준 것과 오차 범위 없이 보석의 개수가 딱 들어맞았다.

“여신의 선택이 오히려 평화를 깨 버린 거야. 선택받은 한 명만 튜니아트의 주인이 될 수 있다니. 그런 건 너무 불공평한 처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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