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61)

“아무 이상이 없다니요? 다시 확인 좀 해 주세요.”

“몇 번을 다시 하더라도 같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호출된 주치의가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을 진찰해도 문제가 없다는 듯이.

결국 주치의가 진료 도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자 리사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히 제가 봤…….”

나는 주치의를 따라 나가며 말을 이으려는 리사를 만류했다.

피를 토했다는 걸 만천하에 알릴 생각인 건가?

내 몸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여신의 가호가 사라졌다는 걸 의미했다.

절대 밖에 알려져서는 안 됐다.

“리사, 그만.”

“황녀님께 지병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튜니아트의 황족이시지 않습니까.”

주치의가 리사를 흘기며 말했다.

그러자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리사가 굳은 상태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녀가 겉으론 멀쩡한 날 위해 주치의를 불러온 행위 자체가 황권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푹 쉬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너무 걱정 마시지요.”

“알겠어.”

“혹시 보신할 약재가 필요하십니까?”

“아니.”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주치의는 내가 이런 대답을 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나는 리사를 붙들고 있던 손을 풀었다.

“내가 언제 주치의를 부르랬어?”

“하, 하지만…… 황녀님께서 피를 토하셨잖아요.”

“그래서. 내 몸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하려는 거야?”

리사가 우물쭈물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저는…… 그저 황녀님이 너무 걱정되어서 그랬어요.”

“네 행동이 나를 더 곤란하게 만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야?”

“하지만 황녀님의 옥체를 잘 살펴봐야 한다고…….”

“누가 그런 말을 해?”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고 있던 리사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쳤다.

이 말을 꺼낸 건 실수가 틀림없었다. 나는 다시 추궁했다.

“누가 너에게 그런 지시를 했냐 물었어.”

“가, 가끔…… 아버지께서 궁금해하세요. 제가 황녀님을 모시고 있으니까 무척 자랑스러워하셔서요.”

퍽이나.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럼 트리아 백작이 내 몸에 문제가 생길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이야?”

“그, 그게 아니에요!”

리사는 화들짝 뛰었다. 내가 가문을 걸고넘어질까 봐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리사에게 내 몸을 잘 살피라고 했다면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주치의도 내가 피를 토했다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

이건 튜니아트 황실의 정당성이 훼손되는 문제였다.

시녀가 찾아와서 황녀가 객혈했다는 말을 하면 당장 무릎을 꿇고 실려 달라는 말부터 꺼냈을 것이다.

시녀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든 여신의 가호가 훼손되었을지 모를 일에 연루되었다는 건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알고 있었으면 주치의부터 단속해야겠지.’

그러니까 방금 다녀간 주치의도 결국 황실과 한패라는 뜻이었다.

정말 누구도 내 편이 한 명 없었다. 하다못해 지나가는 시녀조차도.

“제가…… 스프라도 가져올까요?”

“아니.”

“……그, 그럼.”

아마 주치의는 내가 피를 토했다는 사실을 바로 알리러 갔을 것이다.

리사에게 내 몸을 잘 살피라는 당부까지 할 정도면 아주 관심이 많다는 것일 테니까.

그리고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벌컥!

“리즈벳! 내 아가, 무슨 일이니?”

황후 아틀레아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단숨에 나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한 가지였다.

황실이 원하는 대로 원작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구나.

어느새 원작이라는 그림자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나는 인위적인 플로럴 향이 거북하여 몸을 뒤로 물렸다.

내 어깨를 잡고 안색을 살피던 아틀레아의 물빛 눈동자가 걱정으로 물들었다.

“주치의를 불렀다고 들었단다. 갑자기 객혈을 했다고?”

“……네, 어머니.”

걱정 어린 물음과 달리 그녀의 눈동자는 물건의 상태를 확인하듯 냉철하게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쳐내려 팔을 올렸다.

그러나 아틀레아는 세게 어깨를 잡아왔다. 그녀의 손톱이 아프게 파고들었다.

꽈악.

“어머니, 잠시만-.”

“조금만 더 살펴보자꾸나. 지금 상태는 어떤 것 같니?”

“…….”

“리즈벳. 어미가 묻잖니.”

나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아틀레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지금은 어떻냐니.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

“……괜찮아진 것 같아요. 주치의 말로는 아무 문제가 없댔어요.”

“그러니?”

“네.”

“그게 끝이니?”

“……네?”

아틀레아가 묻는 의도를 몰라 의아하게 반문했다.

그녀의 물빛 눈동자가 지그시 나를 응시했다.

집요한 시선을 도무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어 나는 작게 물었다.

“제게 어떤 게 더 궁금하신 거예요?”

아틀레아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리즈벳. 어미에게 물을 거 없니?”

그 순간 나는 심장이 철렁였다. 그녀는 다정하게 내 뺨을 쓰다듬었다.

“무엇이든 물어도 좋단다. 궁금한 게 있을 거 아니야?”

나는 그녀가 말하는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키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아틀레아는 더 이상 내게 비밀을 감출 생각이 없어진 것이다.

내가 피를 토했으니 당연히 의구심을 가질 거라 여기고 있는 거였다.

아틀레아가 한달음에 달려온 이유는, 여신의 증표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내 처분을 결정하기 위해서.

‘절대 말실수해서는 안 돼.’

어딘가에 묶여 갇히게 될지도 몰랐다.

짧은 순간이나마 황녀 대우를 받을 수 있을지 아닐지는 전부 지금 무슨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다.

내가 망설이며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돌연 아틀레아가 자애롭게 웃었다.

“겁을 먹었구나. 가여운 것.”

“어머니……?”

“걱정하지 말렴. 네가 평소처럼 지낸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아틀레아의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먹잇감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눈동자가 일렁였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도, 아틀레아도 서로 속내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간극에서 오는 기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아틀레아가 나를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너는 튜니아트의 황족이잖니. 누가 널 어찌할 수 있겠어. 오늘 일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잘 막아 주마. 그러니 너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겠지?”

“……네. 명심할게요.”

“착하구나.”

“착하구나.”

그때와 같은 칭찬이었다. 아틀레아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 * *

“착하구나.”

이 말을 대체 얼마 만에 들어 보는 거더라.

나는 침대에 누워 눈가를 가렸다.

어릴 적 내가 에테르온에게 불만을 가져 용기를 내 아틀레아를 찾아갔던 날.

처음으로 황제 카로스에게 생일 선물을 받은 그날, 에테르온이 질투로 인형을 갈기갈기 찢어놨었다.

그러고는 다시는 여신의 궁 근처에는 얼씬도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었지.

“어머니! 오라버니가 제가 아끼는 물건을 전부 못 쓰게 만들었어요! ……이건 아버지가 제 생일에 주신 인형인데.”

솜이 가득 차 있어야 하는 길쭉한 귀가 너덜너덜해진 토끼 인형을 들고 서럽게 달려가자 아틀레아가 물었다.

“그건 사람을 시켜 같은 걸로 사 오라 하면 되잖니?”

“……하지만 아버지가.”

“그래서 에테르온을 혼내 달라고 찾아온 건 아니겠지?”

아틀레아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 손을 내저은 그녀가 품에 안기려는 나를 떼어 놓았다.

“그렇지만 저도 오라버니랑 같은 자식이잖아요. 그런데 왜 항상 오라버니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까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던 거냐며 놀라는 아틀레아의 표정에 나는 생애 처음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에테르온과 너는 귀함이 다르단다. 그 아이는 황제가 될 아이잖아. 하지만 리즈벳 너는 아니잖니.”

아틀레아의 말에 손에 들려 있던 토끼 인형을 놓치고 말았다.

순간 울컥해 왜 저를 낳았냐고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수 없었다.

그 대답이 ‘에테르온이 원해서’일까 봐, 겁이 났다.

바닥에 떨어진 인형을 힐끗 내려다본 아틀레아는 내가 아끼는 물건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는 듯 하던 말을 이었다.

“그러니 에테르온을 잘 따라야 한단다. 여신께서 너에게 분수에 넘치는 역할을 부여했는데 아직도 어리광이구나.”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오라버니 말을 잘 들을게요.”

나는 다른 말로 반박하는 대신 순종하는 길을 택했다.

황실에서 황녀로 남을 방법이 그것뿐이라는 걸 어린 나이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무것도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되고, 오직 황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틀레아는 다시는 나를 봐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 대답을 들은 아틀레아는 누구보다 기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착하구나.”

그리고 그 칭찬은 언제나 에테르온에게 순종할 때에 나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틀레아는 여전히, 에테르온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나를 찾지도 직접 움직이지도 않았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당장, 황성에서 도망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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