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아아아악!!”
“화, 황태자님!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살ㄹ……!”
강대한 신성력이 매섭게 몰아치며 주변을 베어나갔다.
괴롭게 심장을 움켜쥐고 발작하는 에테르온을 처음으로 목격한 시녀가 하얗게 질려 바닥을 엉금엉금 기었다.
시녀의 얼굴은 공포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곧 앞을 막아서는 누군가의 발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에테르온의 호위기사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감히. 주인의 곁을 지키지 않고.”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공자님!”
“어서 전하를 보필하거라.”
“그, 그게 무슨 말씀……!”
시녀의 눈동자가 겁에 질려 흔들렸다.
저건 세간에 자애롭다 칭송받는 황태자가 아니었다.
신성력을 다룰 줄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신성한 존재라 할 수 있을까.
저건 괴물이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괴물.
그녀의 눈에는 에테르온이 그렇게 보였다.
시녀의 앞을 막고 있던 호위기사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동안 수고했다.”
“네……?”
그녀가 의아함을 가지기도 잠시, 경악으로 물든 얼굴이 바닥으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쯧.”
황태자에게서 뿜어져 나온 제어되지 않은 힘을 막은 호위기사가 혀를 찼다.
그는 문을 살짝 열고 앞을 지키고 있던 시녀장에게 일렀다.
“리즈벳 황녀는 아직 멀었습니까?”
“모시러 갔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시는군요. 당신은 그 이유를 압니까?”
에테르온의 호위기사, 벨리언이 물었다. 그는 카드리아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시녀장은 말을 아꼈다. 그가 픽 웃었다.
“나한테까지 모른 척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여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겠으니.”
노을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내려 묶은 벨리언이 서재에서 유명을 달리한 시녀를 끌고 나오며 말했다.
“어차피 당신이나, 나나, 황실이나. 다 한편 아닙니까.”
* * *
나는 여신의 궁에 도착했다.
양 갈래 머리 시녀는 조용히 인사를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로비로 들어서니 시녀장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리즈벳 황녀님을 뵙습니다.”
“오라버니는?”
아마도 2층 서재에 있겠지.
그곳에서 불안정한 신성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2층 서재에 계십니다.”
역시나 그랬다.
나는 묵묵히 계단을 오른 뒤 복도를 걸었다.
여신의 궁은 내가 머무는 궁전보다 못해도 세 배는 더 컸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두 궁전은 격이 달랐다.
“리즈벳, 황족도 격이 있는 법이란다. 너는 에테르온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사명을 갖고 태어난 거야. 그러니 말 잘 들어야 한다.”
어릴 적부터 아틀레아가 당부하던 말이었다.
그때는 내가 황실의 일원으로서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에테르온의 변덕도 늘 감내해야만 했다. 그는 나보다 훨씬 귀한 존재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에테르온에게 양보해야 했고, 그의 말에 거역해서는 안 됐다.
그렇지 않으면 여신께서 벌을 내릴 줄만 알았다.
여신 튜니아가 제일 사랑하는 존재에게 감히 불만을 품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야 했다.
하지만 무릇 특정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도 그 기운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세간의 통설이다.
아니면 그것과 비슷한 다른 기운을 운용할 수 있다거나.
예를 들면 마력과 같은 것 말이다.
“원래 저 힘이 내 것이었다면 말이 되지.”
주인이 아닌 자에게 타인의 신성력을 옮겨 놨으니 에테르온이 발작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진정시킬 수 있는 것도.
‘하지만 요즘 발작 빈도가 높은데.’
고작 일주일 전에도 나를 불렀는데 또 부르다니.
게다가 발작의 상태도 점점 심해졌다.
서재에서 느껴지는 신성력만 가늠해 봐도 평소 폭주했을 때보다 두 배 가량 많았다.
그만큼 불안정해졌다는 뜻이다.
“아, 렘무트한테 이걸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렘무트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연락을 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나는 서재 앞에 도착해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고통에 찬 비명이 고막을 찢을 듯이 들려왔다.
여신의 궁은 방마다 방음술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크흑, 커헉! 아아아악! 허억……!”
나는 에테르온의 모습을 보고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눈을 뒤집고 숨이 넘어갈 듯 바닥을 구르고 있는 모습은 어디가 자애로운 황태자라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신성이 깃든 은발은 엉망으로 엉켜 있었고 벽안은 초점이 흐려져 거의 정신을 놓은 수준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말 그의 몸에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컥.
옆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노을빛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남성이 지루한 낯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누구시죠?”
“황태자 전하의 호위기사입니다. 벨리언 카드리아입니다.”
……카드리아라면 공작 가문이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지금 이 상황을 들켜도 되는 건가?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벨리언이 다가왔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저를 부르십시오.”
“…….”
“저번에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턱을 넘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뒤에 있던 벨리언이 닫은 것이다.
바닥에 날카롭게 깨져 있는 조각들이 밟혔다.
콰득.
별로 유쾌하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위험해 보이는 것들은 대충 발로 치워내며 에테르온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직도 내가 온 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간신히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흐으, 쿨럭. 하아…… 큭.”
“에테르온 오라버니, 제 목소리 들리세요?”
“허억……, 어찌, 어찌 이렇게 늦게 온 것이냐……!”
나와 가까워질수록 에테르온의 상태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는 내게 손을 뻗어 왔다. 그러나 연한 벽안은 자존심이 상한 듯 일그러진 채였다.
“어서 네 손을 이리 내거라……, 당장!”
“네, 알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끝이 드러나지 않는 소매를 걷고 내밀었다.
그 잠깐의 시간도 기다리지 못한 에테르온은 내 손을 강하게 낚아챘다.
“아!”
꽉 잡힌 손가락이 악력으로 하얗게 변했다.
피가 통하지 않아 빼내려 하자 에테르온이 사납게 노려보았다.
“감히, 네 본분을 잊은 것이냐?”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파서요.”
“아프다고?”
그러자 에테르온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가 일어나 나를 세게 밀쳤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몸을 휘청이며 뒤로 넘어지자 바닥에 깨진 유리 조각들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악……!”
“주제도 모르고 내 앞에서 감히 아프다는 말을 꺼내? 나보다 네가 더 아픈 것이냐?”
“왜 이러시는 거예요?”
에테르온의 미간이 불쾌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설마 하며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가 비웃음을 흘리며 얼마 전 날 내려쳤던 촛대를 다시 집어 들었다.
나는 그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급히 문을 열고 도망치려 했다.
“오라버니, 이러지 마세요!”
“이게……!”
탁.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뜨자 내 뒤에서 나온 팔이 에테르온이 휘두르던 촛대를 막고 있었다.
“자중하십시오, 황태자 전하.”
“……너. 지금 무슨 짓이야.”
“황녀님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너는 내 호위기사일 텐데?”
벨리언이 촛대를 빼앗아 들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정말 가격당할 뻔했다.
나는 얼른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에테르온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이제 괜찮아지신 거면 저는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멍청한 게 어디까지지?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말을 걸지 말라 하지 않았나?”
“…….”
“주제도 모르고 감히 누구에게 괜찮아?”
나는 이제 할 말이 없어져 입을 다물었다.
벨리언도 이번 억지에는 황당했는지 나직한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내게만 들린 것인지 에테르온은 문제 삼지 않고 나를 노려보았다.
“당장 꺼져.”
“……네, 알겠어요.”
“이런 일에라도 쓸모가 있지 않았더라면 너 같은 건 당장 황성에서 내쳐졌을 거다.”
잔뜩 성이 난 그는 사달이라도 낼 사람처럼 무섭게 노려보았다.
“대답해!”
내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에테르온의 표정에 불안감이 스쳤다.
그의 벽안에는 불안감, 초조함, 경계심 같은 복잡한 감정이 한데 섞여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알고 있었다.
적대감이었다. 전생의 꿈에서 한 차례 본 적이 있는 눈빛이었다.
“네, 앞으로 주의할게요. 오라버니.”
“그럼 살펴 가십시오, 황녀님.”
“네.”
벨리언은 잠시 나를 보는 듯하더니 그대로 지나쳐 서재로 들어갔다.
복도가 고요해졌다. 혼자 남은 나는 서재 문을 바라보았다.
“똑같아.”
자신의 것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며 내게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아 하던 이복 오빠의 눈빛과 너무나 똑같았다.
“나도 어쩔 수 없어! 내 걸 너에게 주겠다는데 어떡하겠어! 이 집안의 돈은 전부 내 거야. 권리도, 권한도 전부 내 거라고!”
“이, 이러지 마! 정말로 떨어질 것 같단 말이야! 오빠가 다 가져. 그러면 되잖아.”
“아니. 전부 너 때문에 어긋나기 시작한 거니까 너만 사라지면 돼.”
어떻게 전생도 모자라 현생에서도 이런 일이 생기지? 조금 황당할 지경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당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나는 얌전히 당해 줄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겼다. 그걸로도 모자라 에테르온 때문에 죽기까지 해야 한다니.
“원하는 대로는 절대 안 되지.”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그 얼굴이 구겨지는 걸 보고야 말겠다는 강한 다짐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쿨럭!”
운명을 거스르려는 걸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나는 울컥 피를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