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61)
  • “황녀님을 뵙습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로이드.”

    “일주일 동안 일어나지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이제는 괜찮으신 겁니까?”

    로이드가 나를 살피며 물었다. 붕대는 주치의가 다녀가고 하루 지나 바로 풀었기에 괜찮았다.

    “네, 괜찮아졌어요. 살짝 다친 거였거든요.”

    “살짝…… 말입니까?”

    로이드의 눈가가 좁혀졌다.

    어떻게 살짝 다치면 일주일이나 일어나지 못했냐고 묻는 듯했다. 나는 그를 떠보듯이 살피며 말했다.

    “제가 발을 헛디뎌서 계단에서 굴렀거든요.”

    “…….”

    “정말로요.”

    로이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윈저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이자 황후 아틀레아의 남동생.

    내가 로이드를 바로 찾아가지 않고 렘무트의 손을 잡은 이유는 한 가지였다.

    로이드는 아틀레아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틀레아는 현재 황실과 한 패였다. 그런데 로이드가 과연 나를 도와줄까?

    내게 고대어를 알려 준 걸 보면 황실과 완전히 한패라는 게 반신반의하긴 했다.

    내 성인식까지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아무런 귀띔도 해 주지 않은 걸 보면, 로이드도 정확히 황실에서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모르고 있을 확률도 높았다.

    그러나 괜히 불확실한 사람에게 희망을 걸기보다는 차라리 외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그가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리즈벳을 돕다가 화를 피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건 아니니까.

    “정말 계단에서 구르신 건지요.”

    “……저도 가끔 실수를 해요.”

    로이드가 몇 번이나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기억을 찾기 전이었다면, 엄격하게 예법을 지켜 왔으니 계단에서 구르는 실수는 하지 않을 테니까.

    튜니아트 황족은 언제 어디에서나 기품을 잃지 말아야 했고, 황실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은 터부시되었다.

    황족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튜니아 여신과 직결되므로 언제나 주의해야 한다고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막히도록 들었다.

    그것만 확실하게 지킨다면 황실은 내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단 하나, 내가 황성 밖에 나가는 것만 제외하고.

    그 덕에 나는 정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황녀님으로 자라 온 것이다.

    아무 고민도 없고, 걱정거리도 없고, 원하는 것은 다 손에 주어지고, 여신의 가호를 받은 남 부러울 게 없는 온실 속 황녀님.

    오직 황실에서 주는 제한된 정보만 믿으며 아무런 의심 없이 튜니아트 황실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황녀 말이다.

    내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로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십시오.”

    “……어머니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비밀로 하고 싶으시다면 앞으로는 다치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으음. 알겠어요.”

    나는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가 황후의 편인지 이것만으로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보면 모르는 것 같기는 한데.

    내가 왜 일주일이나 일어나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았다면 저런 질문 자체를 안 하지 않을까.

    하긴, 아무리 황후와 남매 사이라고 해도 황실의 추악한 진실까지 모두 공유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럼 로이드는 나한테 고대어를 왜 가르쳐 준 거지?

    황실에서 고대어를 배우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을 텐데도 그걸 거부한 이유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페이지가 잘못 펼쳐져 있습니다.”

    “네.”

    나는 냉큼 로이드의 책을 힐끗거리며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오늘 수업은 대륙의 정세 흐름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내가 제일 지루하게 여기는 분야이기도 했다.

    “집중하십시오.”

    “……네, 하고 있어요.”

    나는 입을 비죽이며 글씨를 눈에 담기 위해 애썼다.

    일단 로이드에 대한 판단은 보류해야겠어.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수업을 방해받은 로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진행이 더디니 그런 것 같았다. 그는 문이 열리는 쪽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여신의 궁 문양이 새겨진 시녀복을 입은 시녀였다.

    “일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어 주의를 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신의 궁은 시녀 교육이 못 봐줄 정도로 엉터리군.”

    상대의 소속을 확인한 로이드가 다소 불쾌함을 담아 추궁했다. 시녀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로이드의 말대로 황족의 수업 시간은 절대적으로 존중받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의문이 풀렸다.

    ‘로이드는 에테르온이 발작한다는 걸 몰라. 황실에 대한 비밀을 모르고 있는 거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이드. 저 시녀는 어머니가 보낸 거예요.”

    “저 시녀는 여신의 궁 소속입니다. 황후 마마의 시녀가 아닙니다.”

    “물론 오라버니를 따르는 시녀는 맞지만…… 로이드도 알잖아요. 오라버니가 절 직접 부를 리 없다는 거.”

    “…….”

    에테르온은 누구보다 나를 싫어했다.

    여신의 궁 근처는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엄포를 해서 나는 황성에서 지내는 내내 어디를 가든 외곽으로 빙 둘러 다녀야 했다.

    하필이면 에테르온의 궁이 황족이 머무는 영역의 가장 중앙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그건 유명한 일화였기에 로이드도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내 개인 선생으로 온다고 했을 때, 에테르온이 한바탕 난리를 치고 간 적도 있었기에 내 말에 수긍하는 눈빛을 했다.

    “여신의 궁 시녀를 시켜 저를 부를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요. 어머니일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수업 시간입니다.”

    “이럴 때 아니면 어머니를 또 언제 보겠어요. 다시 불러 주실지 아닐지도 모르는걸요.”

    “하아.”

    로이드가 책을 덮었다.

    그는 내가 황후 아틀레아의 애정에 얼마나 목말라 있는지도 잘 알았다.

    그녀의 사랑은 오직 에테르온에게만 기울어져 있었기에 어릴 적에는 그에게 아틀레아의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른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다 지난 이야기였다.

    “오늘만입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당분간 수업은 없을 예정입니다.”

    “……네?”

    나는 시녀를 따라가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수업이 없을 예정이라는 게 무슨 의미지?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 말은…… 잠깐 어디 떠난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어디로요?”

    “말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내게 고대어를 알려 주고 어쩌면 내 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여부를 떠나, 어릴 적부터 내 개인 선생으로 붙었던 그에게 나는 남다른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오히려 황후 아틀레아보다 오랜 시간 함께 보내고 내게 필요한 것들을 알려 준 사람이 바로 그였다.

    이번에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겠어.

    로이드가 맡은 일이 뭔지 모르겠지만 말해 줄 수 없다는 걸 보면 나보다 더 윗선에서 명령이 내려온 것이거나, 아니면 윈저 가문의 일일 것이다.

    “몸 조심히, 잘 다녀와요. 로이드.”

    “그러겠습니다.”

    “다치지 말고 위험한 일은 하지 말고요. 또…….”

    위험하면 나서지 말라고 말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이드의 검술 실력은 이미 유명했다.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실례였다.

    나는 생긋 웃었다.

    “다음에 또 봐요.”

    “제 볼일이 마무리되면 다시 와서 수업을 재개할 겁니다.”

    “네. 제 말이 그 뜻이었어요. 수업 계속 들어야 하잖아요.”

    로이드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수업은 이대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으니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먼저 길을 나서며 양 갈래 머리를 한 시녀에게 눈짓했다.

    “그럼 황녀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시녀는 황후 아틀레아가 보낸 사람이 아니었다.

    황후는 귀족 출신이 아닌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깐 지켜봐도 나를 부르러 온 시녀는 예법에 어색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한 가지밖에 없었다. 에테르온이 또 발작한 것이다.

    여신의 궁은 시녀 중 일부를 거리를 떠도는 갈 곳 없는 평민들을 거두어 채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보잘것없는 평민도 굽어살핀다며 제국민들은 에테르온을 칭송했다.

    물론 처리하기도 그만큼 수월했겠지.

    그게 지금까지 에테르온의 비밀이 지켜질 수 있던 이유일 테니까.

    나는 길을 안내하는 시녀를 오늘 이후 황성에서 볼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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