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는 누구야?’
나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튜니아트에서 보기 드문 외양이었다.
한마디로 제국의 귀족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 정도로 독특한 특징이라면 아무리 귀족들에 관심이 없는 나라도 누군지 알아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초대된 손님인가?
하지만 원작의 기억까지 더듬어 봐도 이런 인물은 없었다.
‘아니지. 아직 원작 전이잖아. 얼마든지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어.’
그래도 남자를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내가 황녀라는 걸 빤히 알 텐데도 자연스러운 반말을 하는 게 영 꺼림칙했다.
“누구세요? 황실의 초대를 받은 손님이신가요?”
어쩌면 타국의 고위급 관료일지도 몰랐다.
황실 도서관은 아까도 말했듯이 아무나 출입을 허가받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남자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 두지.”
“……네?”
“렘무트라고 해.”
……뭐 이런.
나는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표정 관리에 실패해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그가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 대화에 뭐가 문제점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달랑 이름만 말하다니. 보통은 자기 신분을 밝히기 마련인데.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아 남자를 피해 옆으로 지나가려 했을 때였다.
그가 내가 가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길을 막았다. 반대편으로 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직 대화 안 끝났는데 가 버리려고 하니까.”
“…….”
나는 끝났는데.
남자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당당함에 어쩐지 화낼 의욕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에게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는 제스처로 살짝 노려보듯 바라봤다.
“황녀님이 올해 몇 살이지?”
“열아홉이요.”
“그럼 스무 살은 언제 돼?”
뭐 이런 걸 물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두 달 뒤에 성인이 되죠.”
튜니아트의 신년은 3월부터 시작이었다.
내 생일이 그다음 달이었고.
법적으로는 새해가 시작되는 날부터 바로 성인으로 인정받았지만 별 차이는 없었다.
“아, 그럼 맞네.”
“그런 건 왜 물어봐요?”
황족의 나이 정도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알아낼 수 있는 정보였다.
“황녀님 지금 금서 구역에 가는 길이지?”
“아니요? 그리고 그걸 그쪽한테 제가 왜 말해야 하는데요.”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왔다. 나는 얼른 가고 싶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렘무트가 진정하라며 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렘무트는 이미 내가 금서 구역으로 향하고 있다고 확신에 차 있었다.
하긴, 책장 사이에 숨어서 주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니 모르면 그게 바보였다.
“금서 구역은 무슨 일로 가는 건데? 튜니아트 황녀는 고대어를 배우지 않을 텐데.”
“저기요. 자꾸 귀찮게 굴지 말고 그만 비켜요.”
“아니면, 읽을 수 있나?”
“……기초적인 건 알아요. 왜요?”
고대어는 황족이 지녀야 할 필수 기본 소양이었다.
다만 튜니아트 제국의 황족이 배우는 고대어는 특권층에게도 무척 특별했기에, 나는 기초적인 부분만 안다며 얼버무렸다.
튜니아트 황족이 사용하는 고대어는 신탁을 해석할 수 있었고, 여신의 부름을 받을 수도, 신성력이 충분하다면 기도를 통해 부를 수도 있었으니까.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고대어를 시기, 질투하는 자들이 많기에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받아왔다.
어쩌면 렘무트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런데 되레 떠보듯 물어보던 렘무트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정말 고대어를 할 줄 안다고?”
“아까부터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나는 발꿈치를 들고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렘무트는 계속 자기가 물어보고 싶은 말만 하고 있었다.
이런 일방적인 대화를 지금까지 받아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친절을 보였으니, 이제 그만 끝냈으면 했다.
특히 고대어를 언급하는 걸 보니 순수한 의도로 접근한 것 같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거리가 좁혀지자 그가 급하게 몸을 물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벽에 찰싹 달라붙어 시선을 아래로 깐 렘무트는 숨까지 참고 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야.”
“……무, 뭐?”
내 반말에 그가 멍한 표정으로 대답하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적안이 흔들리고 있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아까부터 반말이야. 황족 모독죄로 잡혀 가고 싶어?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
“나는 갈 길이 바쁘니까 이제 따라오지 마.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고.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그는 입을 다물고 내 말을 듣기만 할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나는 할 말을 끝내고 발꿈치를 내린 뒤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의 적안이 내 움직임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흥.”
나는 그대로 렘무트를 휙 지나쳤다.
* * *
“……아.”
벽에 바짝 붙어 있던 렘무트가 참았던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갑자기 거리를 좁히며 치고 들어오는 리즈벳의 행동에 하마터면 서로 닿을 뻔했다.
그는 방금 전 그녀의 숨결이 닿았던 턱 끝을 매만져 보았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아, 잊을 뻔했네.”
렘무트는 급히 멀어져가는 리즈벳의 뒷모습을 향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기이한 오망성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일렁이다 사라졌다.
순간, 마력의 파동이 일었으나 도서관 내에 있는 인간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녀가 저런 성격일 줄은 몰랐는데.”
알아본 바에 의하면 매사 소심하고 조용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행동은 소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저를 향한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도 매우 노골적이었다.
렘무트는 픽 웃으며 턱 끝을 살짝 쓸어내렸다. 붉게 올라와 있던 피부가 다시 매끄럽게 변했다.
“튜니아트 황실에 배신자가 있을 줄이야.”
그들은 절대 황녀에게 고대어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건 이미 거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관행이었다.
황녀가 황실의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접근할 수단 자체를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평화’는 그렇게 유지되어 왔다.
“고대어를 알려 준 인간이 누구지.”
리즈벳이 고대어를 알고 있는 건 그에게도 희소식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날 계기가 되어 줄 테니.
하지만 그녀에게 지식을 불어넣어 준 존재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걸음을 돌렸다.
할 일이 끝났으니 더는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가 책장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 수많은 인파 사이를 걷고 있는데도 시선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튜니아트에서는 살면서 보기 힘든 적발에 적안을 지닌 준수한 남자가 지나가고 있는데도.
마치 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어.”
리즈벳 튜니아트가 고대어를 알고 있다는 건 정말로 기대하지 않은, 계획조차 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하긴. 내가 여기 머물 수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건가.”
그것도 여신의 신성력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황성에.
렘무트의 입매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의 적안이 번뜩이며 홀쭉한 동공이 비치다 사라졌다.
* * *
신성이 가득 깃든 황제의 알현실.
순금으로 만들어진 높은 황좌에 앉은 은발의 남성이 시린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흰 대리석 위에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그보다 더 멀리 하늘빛 머리카락을 지닌 이목구비가 화려한 남자가 부복하고 있었다.
“로이드 윈저.”
은발의 남자가 상대의 이름을 부르자 부복하고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
“네, 폐하.”
“내가 그대를 왜 불렀는지 아는가?”
황제 카로스가 황좌에 기댄 채 턱을 기울였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알현실에 맴돌았다.
처음으로 황제를 독대한 로이드는 긴장으로 입을 쉽사리 열지 못했다.
정식 임명받은 공작도 아닌 공작가의 후계자를 황제가 따로 찾는 경우는 제국 내를 다 뒤져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 배움이 부족하여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나이다.”
“그러하겠지.”
“…….”
“그대가 알고 있다면 윈저 가문은 이 시간 이후로 멸문당했을 테니.”
로이드의 표정이 경직됐다.
아무리 황제라 한들, 제국의 공작가를 상대로 ‘멸문’이라는 단어는 쉽게 꺼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려 천 년을 넘게 튜니아트를 수호해 온 윈저 공작가였다.
게다가 현재 황후인 아틀레아의 출신도 윈저 가문이었다.
로이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게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그대가 국경에 잠시 다녀와야겠다.”
“……국경에 말입니까?”
국경의 도적떼는 이미 지난달에 모두 소탕했다. 그건 윈저가에서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문제였다.
이미 국경을 수호하는 경비대들이 있는데 굳이 로이드가 직접 나서야 할 이유가 있었던가.
그는 제국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검사였다.
성인이 되기도 전에 검기를 다룰 수 있었으며 튜니아트 제국의 검술 대회에서도 매해 우승을 놓친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그를 국경에 보내는 건 과한 처사라는 뜻이었다.
“최근 제국이 소란스러워 짐의 마음이 놓이지를 않아.”
그러나 카로스는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튜니아트 주인의 명령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응당 따라야 했다. 그는 여신의 대리인이었으니.
그의 명령을 거역하는 건 곧 여신인 튜니아의 뜻을 거역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제가 국경에 가서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가서 모조리 쓸어버려라.”
“모조리…… 말씀이십니까.”
“그곳에 살아 있는 것들은 전부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살아 있는 것 전부.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로이드는 황제의 말을 되새기다가 몸을 굳혔다.
황제의 말은 즉, 국경 인근에 있는 민가의 백성들까지도 전부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그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군대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숨 쉬고 있는 모든 것을 처리하고 오라는 갑작스러운 명령에 로이드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짐의 말이 들리지 않는가?”
“폐하, 한 가지만 아뢰어도 되겠습니까.”
“허하노라.”
“……그것은 튜니아트를 위한 것입니까?”
황제 카로스의 입매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의 벽안이 가늘어지며 신성한 대답이 떨어졌다.
“물론.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