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원작 주인공들과 어떻게 해서든 엮여서는 안 됐다. 특히, 여주인공 시에타와는 더더욱.
그녀 주변은 비정상인 남주들로 득시글거릴 예정이니까!
신경질적으로 쿠션을 던지는데 문이 열렸다.
“아…….”
음식이 든 카트를 끌고 안으로 들어오던 리사가 주춤거리며 멈췄다.
“……노, 노크를 여러 번 했는데 말씀이 없으셔서 주무시는 줄 알고…….”
“…….”
“그런데…… 너무 오래 식사를 하지 못하셔서 꼭 챙겨 드려야 된다고 해서…….”
리사는 울 듯한 얼굴로 열심히 해명했다.
그러니까 내가 잠든 줄 알고 일단 들어와서 나를 깨운 다음 음식을 차려 주려고 했다는 거였다.
바닥에 나뒹구는 쿠션을 본 리사가 어쩔 줄 몰라 했다.
“황녀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기분이 상하신 일이라도…….”
“아니. 아무 일 없었어.”
나는 생긋 웃으며 슬그머니 쿠션을 주웠다. 그리고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아마 지금 엄청 엉망일 것이다.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리사가 빠른 동작으로 접시를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오랫동안 내 곁에서 심부름을 했지만 이름 말고 아는 바가 없었다.
이전에는 시녀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족을 모시는 자들은 전부 귀족 출신이었고 어떻게든 눈에 들으려 안달이었기에 엮이면 귀찮다는 생각이 강했다.
또 황족은 자신보다 아래인 사람과 쉽게 어울려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듣고 자란 탓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소한 정보라도 필요한 상황.
주변 조사를 하는 게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리사.”
“네, 황녀님?”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황녀님께서 열 살이 되시던 해에 들어왔으니…… 이제 9년 정도 되었습니다.”
“꽤 오래 있었네.”
나는 관심을 보이는 척 운을 뗐다.
리사는 착실히 대답하면서도 생전 하지 않던 질문을 하는 내가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네가 소속된 가문은 어디니?”
“트리아 가문입니다.”
트리아!
나는 아는 가문의 이름이 나오자 몸을 들썩였다. 처음부터 비중 있는 가문이 등장하다니.
……이 가문의 역할은 에테르온의 반역을 돕는 것이었지만.
“아……, 트리아 공작 가문의 여식이었구나.”
“네?”
그런데 리사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아닙니다, 황녀님. 저희 가문은 백작가예요.”
“……뭐?”
나는 빵에 잼을 바르던 것을 멈추었다.
“공작가가 아니고?”
“네,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분명 내 기억속의 트리아 가문은 공작가였다.
“……내가 잠깐 착각을 한 모양이야. 일주일 동안 잠들어 있었잖아.”
“……정말 괜찮으세요?”
“주치의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한 거 들었잖아. 너무 신경 쓰지 마.”
나는 고개를 저으며 별것 아니라는 듯이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나 리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를 테니까 가서 할 일 해도 좋아.”
“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내 축객령에 리사가 방을 나갔다. 그녀는 방문을 닫고 나가는 내내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완전히 문이 닫히자 나는 접시에 빵을 내려놓았다.
“좀 더 나중에 공작이 되는 건가?”
무슨 공을 세웠길래 백작에서 공작이 될 수 있던 거지?
웬만한 걸로는 한평생 바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원작에서 공작가로 등장한다는 건…….
“원작 전에 무슨 일이 생기기는 한다는 거네.”
그것도 튜니아트를 뒤흔들 만큼 엄청나게 큰일이.
그거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 * *
결국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새벽 내내 추론해 본 결과, 나는 튜니아트를 뒤흔들 만한 큰일이 내 죽음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까지 이르렀다.
사실 그 외엔 튜니아트에 큰일이라 불릴 만한 사건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튜니아트 황성은 겉보기에 무척 평화로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황태자인 에테르온이 신성력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말이지.
“일단 나랑 에테르온의 관계성부터 알아야 할 것 같은데.”
단서가 없으니 어디부터 파헤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몇 가지 단서가 있기는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원작과 현실의 대치되는 지점들이 바로 그 단서였다.
문제는 단서를 하나로 꿰어 줄 실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흐릿하게 미간을 좁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죽음으로써 에테르온이 자유롭게 신성력을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간의 행적을 보면 그게 리즈벳의 역할이라는 추측이 들었다.
“에테르온이 신성력을 계속 다루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원작에 얼마나 영향을 주게 될까.
에테르온과 만나지 못한 시에타가 튜니아트로 도망을 성공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고, 그렇게 되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 세이어드와 라히트리안의 대립이 계속 되는 걸까? 내가 살아 있는 내내?
“……아이 씨, 잠깐. 그것도 별론데.”
어쨌든 시에타가 온전히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튜니아트 제국과 접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신 튜니아와 연락이 닿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전에 들러야 했으니까.
그리고 여신 튜니아의 신전이야말로 황실이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는 곳이었다.
“……항상 기울이고 있는 거 맞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현 황제인 카로스가 재위 기간 동안 신탁을 공표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 얼굴을 본 것도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일단 내가 살고 보자.”
다른 것까지 신경 쓰다가는 그 전에 죽을 것 같았다.
우선은 가장 코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고 다음을 도모하는 게 좋겠어.
이틀 내내 방에 틀어박혀 있던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막막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해결해 줄 수 있는 장소가 떠올랐다.
마침 리사도 없으니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움직일 수 있었다.
내가 향하는 곳은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비밀이 기록되어 있는 장소.
바로 황실의 금서 구역이었다.
* * *
“리즈벳이 깨어났다지?”
우아한 예법을 구사하는 여성이 손가락으로 찻잔을 쓸었다.
작고 투명한 보석으로 장식된 손톱과 손가락마다 햇빛에 반사되는 사파이어 반지들이 돋보였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하늘빛 머리카락과 짙은 눈동자가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시녀 리사가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네, 황후마마. 정신을 차리신 후 조금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시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평소와 같으십니다.”
“그렇구나. 리즈벳의 몸이 상하지 않도록 잘 돌보아 주렴.”
그늘이 드리워진 티 테이블에 앉아 향긋한 차를 마시던 황후 아틀레아가 나긋하게 말했다.
“그 외에 달리 알릴 건 없느냐?”
“네, 황후마마.”
“다행이구나.”
아틀레아의 눈동자가 접혀 내려가며 입매가 올라갔다.
그러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표정이 무심하게 바뀌었다.
리사는 기쁘게 뺨을 붉히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황후의 눈에 든 것은 천운이었다. 트리아 백작가가 어쩌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설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거라.”
“네.”
“리즈벳의 생일이 다가오니 부족함 없이 챙겨 주도록 하고. ……그 아이가 어디를 가든 일거수일투족 내게 알려야 한다. 한시도 떨어지지 말거라.”
“명령 받들겠습니다.”
“리즈벳이 성인이 되는 날에 너를 여신의 궁으로 옮겨 주도록 하마.”
“저, 정말이십니까?”
리사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무려 황태자가 머무는 성의 시녀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황족과 접촉할 기회가 적었던 트리아 백작가는 호시탐탐 그들과 연줄이 닿을 날만을 고대했었다.
황실에서 어떤 권위도 없는 황녀가 아닌, 직접적으로 가문에 권력을 쥐여 줄 수 있는 존재를.
황녀도 마찬가지로 황실의 혈통을 이어받기는 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신성력을 타고나지 못했으니까.
신성력을 타고난 존재만이 차기 튜니아트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여신의 뜻이었다.
리사가 급히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감사합니다, 황후마마.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믿음직스럽구나.”
아틀레아의 눈동자는 대답과 달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사는 미처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 * *
나는 황실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무려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튜니아트 제국은 대륙에서도 방대한 기록을 소유하고 있기로 유명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은 튜니아트의 황실 도서관에 있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만큼 관리가 철저했기에 황실 도서관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황실의 허가를 받은 신분이 명확한 자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리즈벳 황녀님을 뵙습니다.”
물론 나는 생김새 자체가 신분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딱히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여신의 증표라 널리 알려진 은발과 벽안은 대륙에 오직 튜니아트 황족뿐이었다.
사서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섰다.
황실 도서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곳곳에서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황족의 등장은 언제 어디에서나 관심의 대상이 되는 법이었다.
이곳은 도서관이었기에 귀족들은 내게 간단히 묵례하는 것으로 예의를 갖췄지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연신 힐끔대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래서는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하겠는데.’
금서 구역에 가기 위해서는 도서관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이 정도 관심이면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소문이 날 것 같았다.
리즈벳 황녀가 금서 구역에 들어갔다더라!
‘그럼 안 되지.’
현재 내 안위가 어떻게 될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건 곤란했다.
“어떡하지?”
나는 아무 책장 사이로 들어가 아무 책이나 꺼내 펼쳐 얼굴을 가리고 눈만 빼꼼 내밀었다.
바깥을 기웃거리며 재빨리 안으로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옆에서 장난기 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어떡해?”
“깜짝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 책을 고쳐 잡았다. 바로 코앞에 남성의 우람한 가슴팍이 보였다.
급히 몸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들자 타오를 듯한 적발과 적안에 반반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