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61)
  • 번쩍.

    눈이 떠졌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나는 흐릿하게 보이는 흰색의 고풍스런 천장을 보며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개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나다니.

    오래 잠들어 있어 목소리가 갈라진 탓에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툭.

    ‘뭐야?’

    나는 침대에 누운 상태로 몸 위에 떨어진 물수건을 내려다보고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시녀인 리사가 허공에 손을 올린 채 놀란 얼굴로 굳어 있었다.

    저 손에서 물수건이 떨어진 모양이다.

    리사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화, 황녀님……. 이, 일어나셨나요? 아……!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요.”

    “아…….”

    나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미간을 좁혔다.

    “머리가 아파.”

    머리에 손을 올리려 하자 리사가 다급히 막았다.

    “건드리시면 안 돼요. 황태자님께서 휘두른 촛대에 생긴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습니다.”

    아,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그것 때문에 정신을 잃었었다.

    나는 얌전히 팔을 내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왜 하필이면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이게 말이 돼?”

    “……네?”

    “말이 안 되잖아.”

    그러나 그 말이 안 되는 일이 내게 일어났다.

    무려 이성을 잃은 에테르온이 휘두른 촛대에 가격당해 버리는 바람에! 무려 전생의 기억이 돌아온 것이다.

    지난 19년 동안 ‘리즈벳 아니샤 튜니아트’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인생이 모조리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미친, 미친, 미친.”

    리사는 내 입에서 생전 나온 적 없는 욕이 터져 나오자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전생은 또 왜 그렇게 구려?’

    이전 생에서 나는 가족이었던 이복 오빠에게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병원에서 얼마 가지 못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복 오빠는 나를 정말 극진히 간호해 주었다.

    하지만 본래 기대 수명을 넘어 건강이 차차 회복되기 시작하자 돌연 태도가 바뀌었다.

    그가 독차지하던 것들을 나와 하나씩 나눠 가지게 되는 것을 참지 못한 것이다.

    “원래는 내 것이 되어야 하는 것들이었어.”

    나를 향한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았다.

    아,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이 충격적이어서 깨어난 것은 맞지만 가장 큰 문제는…….

    “황녀님께서 깨어나셨으니 제가 어서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주치의?”

    “일주일이나 넘게 쓰러져 계셨어요.”

    “일주일이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의식을 차린 내 상태가 별로라고 느꼈는지 리사가 다급히 방을 나갔다.

    난 그녀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곳이 내가 아는 그 세상이라니.”

    무려 전생에 본 소설 원작과 웹툰 말이다.

    얼굴을 가리던 손가락을 펼쳐 방 안을 둘러보았다.

    무려 19년을 지낸 곳인데도 진실을 자각하고 보니 무척 낯설게 다가왔다.

    신성 제국이라 불리는 국가답게 신전을 연상케 하는 순백의 건축 양식과 곳곳에 보이는 벽면의 조각상.

    그리고 금색으로 새겨진 여신을 상징하는 문양들까지.

    “하아…… 환장하겠네. 전부 다 봤던 것들이야.”

    나는 암담하게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 어떡하지.

    지금까지 리즈벳으로 살아온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가늠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원작에서 등장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상처는 잘 아물고 있습니다. 며칠 지나면 붕대를 풀어도 되겠습니다.”

    “……상처가 그렇게 심각한가요? 그래서 그런지 황녀님께서 조금…….”

    리사가 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 차마 내 앞에서 정신적인 진료가 필요할 것 같다는 말은 못 하겠지.

    그녀의 말끝이 흐려지자 주치의가 물었다.

    “조금…… 어떻다는 건지요?”

    “……평소와 다르신 것 같아요.”

    “다르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치의는 상처를 소독하고 머리에 감긴 붕대를 새로 갈아 주었다.

    리사는 답답한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 만에 깨어나신 거니 잠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가요?”

    리사가 눈에 띄게 안도했다. 주치의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무리하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리즈벳 황녀님.”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치의가 나가자 리사가 한결 밝아진 안색으로 말을 걸었다.

    “황녀님, 식사를 준비해 올까요?”

    “응, 그게 좋겠어.”

    청아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새삼 어색해 입술을 만져 보았다. 어깨 아래로 투명한 은발이 보였다.

    “그럼 누워 계세요!”

    리사가 분주하게 다시 움직였다.

    나는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치형 모양의 창문 너머, 웅장하고 새하얀 고궁들이 보였다. 황성은 걸어 다니는 길마저 새하얬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부터 처음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하다 여긴 게 많았다.

    단순히 내가 사는 곳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의식적으로 웹툰에서 본 광경을 떠올렸나 보다.

    나는 울상을 지었다. 기억이 돌아오기는 했는데.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전생에서 난 꽤 열성적으로 원작과 웹툰을 달렸던 독자였다.

    그랬기에 세세한 내용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등장인물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절망적이었다.

    “리즈벳 아니샤 튜니아트.”

    원작에서 남자 주인공 중 한 명이 가진 성과 같은 이름.

    하지만 나는 어디에서도 리즈벳이라는 이름을 본 적이 없었다.

    이건 굉장히 큰 문제였다.

    장르 소설의 특성상 인물의 중요도는 곧 신분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현재 리즈벳은 분명히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내가 그 증거였다. 태어날 때부터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황녀로 살아왔으니.

    그런데 원작에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다니?

    그 말은…….

    “아니야. 침착하자, 리즈벳. 왜 벌써부터 최악을 생각하고 그래.”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려던 손을 올렸다가 붕대를 감고 있다는 걸 상기하고 주먹을 쥐었다.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어!

    나는 무려 남주인공 중 한 명인 에테르온과 가족인데도 불구하고 언급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게 시사하는 건 하나였다.

    원작이 시작되기 전에 내가 죽는다는 것.

    “……차라리 설정이 부실한 거였으면 좋겠는데.”

    작가가 깜빡했다거나…….

    “지나치게 희망적이긴 하네.”

    오히려 밝혀지지 않은 설정이 있다는 게 더 설득력 있었다.

    그건 현재 내 오라버니인 에테르온의 상태를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여신의 선택을 받아 신성력을 타고난 에테르온 반 튜니아트.

    차기 신성 제국의 황제가 될 남자.

    에테르온은 신성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신성력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발작하는 에테르온을 제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리즈벳, 나였다.

    아무런 이유 없이 리즈벳이라는 인물을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 거라는 의미였다.

    나는 내 최후가 그리 좋지 않을 예정이라는 데에 전 재산도 걸 수 있었다.

    그건 소설 장르를 생각해 보면 쉬웠다.

    격정 로맨스라는 탈을 쓴 성인용 진성 피폐물.

    그게 바로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세부 장르였다.

    * * *

    『새장의 꽃은 시들지 않는다』라는 다소 진부한 제목이지만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이 소설은 여주인공의 몸에서 깨어난 ‘시에타’가 주인공이었다.

    짐작했겠지만 빙의물이다.

    깨어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걸 알게 된 시에타는 흔한 설정답게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개방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으로 남주인공들을 한 명씩 홀리기 시작한다.

    다들 예상했듯이 남주인공들의 신분은 어마어마했다.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해 대륙을 호령하는 아트레시아 제국의 황태자 ‘세이어드 아트레시아.’

    여신의 후손으로 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차기 황제 ‘에테르온 반 튜니아트.’

    마지막으로 둘만큼의 비중은 아니었지만 영생을 살 수 있는 존재로 혼자서 나라 하나는 날려 버릴 힘을 지닌 마탑의 주인 ‘라히트리안 이카르센’까지.

    남주인공들이 지녀야 하는 기본 소양은 하나씩 고루고루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이용해 여주인공을 얻기 위한 모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당연히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않는다.

    그건 피폐물과 절대 분리될 수 없는 저세상 집착을 보여 주기 위해 필요한 장치였다.

    “……볼 때는 재밌었지. 그 꼴을 다 알고 있으려니 미쳐 버리겠어.”

    누구 하나 정상적이지 않았기에 열광했지만 이제 그럴 처지가 못 됐다.

    운 좋게 원작 이후에도 살아남는다 해도…….

    “시에타가 찾아올 거야.”

    자기에게 정신을 못 차리는 남주인공들을 보며 은근히 상황을 즐기던 시에타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지자 도망을 시도했다.

    바로 이곳 튜니아트 신성 제국으로.

    이유는…….

    여신 튜니아와 만나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그녀는 본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여주인공 한정 해피엔딩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남주인공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려는 걸 막으려던 세이어드와, 라히트리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에 에테르온이 반역까지 저지르지.”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미 약혼녀가 내정되어 있던 에테르온은 황실 인원과 자신의 약혼녀까지 전부 처단하고 여주인공을 황후로 맞이할 준비를 한다.

    여신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빌미로 그녀를 묶어 두고.

    하지만 결국 튜니아 여신은 에테르온을 외면하고, 그는 신성력까지 잃게 되어 신성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런 X발.”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마찬가지잖아.

    죽을 위기가 매 순간 끊임없을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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