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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61)
  • 프롤로그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나는 자정이 넘은 새벽에 탑을 오르는 중이었다.

    “허억, 허억……. 절대 가만 안 둬. 탑을 올라야 하는 거면 미리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격앙된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대체 얼마나 올라가야 끝나는 거야?

    나는 까마득하게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올려다봤다.

    하늘 높이 솟은 천장이 자그마한 점으로 보이는 수준이었다. 가늠되지 않는 높이에 더 힘이 빠졌다.

    내게 이렇게 야심한 시간 탑을 오르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내 생존과 관련이 있다고 해 두겠다.

    “후우……. 그래도 이건 사전 정보가 너무 미흡했어.”

    낯선 탑에 던져진 것도 황당한 마당에 다짜고짜 꼭대기까지 올라가라는 말을 하지 않나.

    거기에 묘하게 찝찝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꼭대기에 도착하면 보석처럼 생긴 걸 삼켜. 망설이지 말고. 그게 네가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명심해.”

    망설이면 꼭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잖아.

    나는 턱 끝까지 숨이 찼지만 다시 계단을 올랐다.

    보석을 삼키면 생명이 고갈된 몸을 살릴 수 있다는 게 솔직히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믿고 가는 수밖에.

    그게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몇 번이고 오를 수 있었다.

    ‘보석이면 보석이지. 보석처럼 생긴 건 또 뭐야.’

    이제 와 말해 봤자 소용없지만, 조력자는 수상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정체도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신뢰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내 상황은 절박했다.

    얼마나 올랐을까.

    동이 막 트고 있는 무렵, 나는 드디어 고대하던 마지막 층에 도착했다.

    “와아아아!”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힘든 것도 잊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력자가 말한 보석을 찾기 위해서.

    그러나 반가움은 잠깐이었다. 내부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볼품없었기 때문이다.

    “뭐야, 이게 끝이야?”

    벽돌 사이사이마다 이끼가 피어 있었고 천장은 거미줄로 가득했다.

    한눈에 봐도 오랜 기간 관리가 되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 정말 보석이 있기는 한 건가?

    “에이, 설마. 아니겠지.”

    헛걸음 한 게 아닌가 슬슬 걱정이 됐다.

    나는 불안감을 애써 떨치고 주변을 둘러봤다. 조력자에게 막대한 보상을 해 주기로 약속했으니 속였을 리는 없었다.

    그 증거로 나는 금방 보석함을 발견했다. 발끝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툭-.

    “응?”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어둠 속에서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이거구나!

    나는 바로 보석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함을 열기 전 잠시 멈칫했다.

    “……뭐가 이렇게 허술해?”

    정말 죽기 직전의 사람도 살려낼 수 있는 보석이라면 좀 더 안전한 장소에 보관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누구나 손에 넣고 싶어 할 물건일 텐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석함을 노려보았다.

    “그게 네가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명심해.”

    “……내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는 아니지.”

    달칵.

    나는 덥석 보석함의 입구를 열었다.

    틈 사이로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무척 신비로운 푸른 빛깔이었다.

    갑작스러운 작열감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나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보석은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웠다.

    이런 외진 탑에 보물이라 불릴 법한 보석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진짜 엄청 찝찝하네.”

    조력자는 어떻게 보석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걸 삼키라니?

    기분 탓일지도 모르나 보석을 삼키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보석의 표면을 만져 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찌르르 울리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럴 리 없는데도.

    “좋아. 삼킨다.”

    나는 단숨에 끝내기로 결심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꿀꺽.

    통증이 있을 거라 예상한 것과 다르게 목 넘김은 아주 부드러웠다.

    나는 보기와는 다른 느낌에 놀라 목을 쓸어내려 보았다.

    그때였다.

    쿵-!

    “어……?”

    심장이 요동치고 강하게 추락하는 듯한 충격이 온몸을 덮쳐 왔다.

    시야가 여러 개로 겹쳐져 흐릿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왜, 왜 이러지……?”

    휘청이는 몸을 가누기 위해 급히 벽을 짚고 몸을 지탱했다.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건지 짐작되지 않았다.

    이런 증상이 나타날 거라는 설명은 듣지 못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가만히 있어도 피부 위로 느껴질 정도였는데, 그 위로 손을 올려 보니 손바닥 아래에 강한 맥동이 전달됐다.

    나는 우선 진정하기 위해 숨을 여러 번 반복해서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렇게 여러 차례 하다 보니 조금씩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 행위에 집중하다 보니 알아차리지 못했다.

    탑 안에 나를 제외하고 다른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쥐새끼가 숨어들었기에 와 봤더니.”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낯선 사람의 등장에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잘도 내 탑에 숨어들었군. 무슨 수로 이곳을 찾았는지 몰라도 재주는 인정해 주지.”

    남자의 기척이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탑을 오르는 내내 느껴지던 묘한 불안감이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남자가 턱을 잡아 올렸다.

    검은 후드가 훌렁 벗겨지고 감춰 두었던 풍성한 은발이 폭포처럼 흘러 내렸다.

    내 얼굴을 확인한 남자의 입매가 뒤틀려 올라갔다.

    동시에 남자와 눈이 마주친 나도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이, 이 남자가 왜 여기에서 나타나?!’

    “쥐새끼가 튜니아트의 황녀였다니. 이건 또 무슨 황당한 경우지?”

    “라, 라히트리안…….”

    “날 아나 보군.”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살기 위해 도망쳐 왔더니 두 번째 위기가 닥친 것이다.

    라히트리안 이카르센.

    이게 눈앞에 있는 남자의 이름이었다.

    원작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 중 하나.

    그를 알아본 내 표정에 라히트리안의 얼굴에도 흥미로운 기색이 스쳤다.

    말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데 그가 빈 보석함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미 삼켰나 보군.”

    “……그, 그게 당신 거였어요?”

    그럼 여기가 마탑이었다는 건가?!

    사색이 된 날 보던 라히트리안이 여전히 세게 뛰고 있는 내 가슴 부근의 심장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황녀가 삼킨 게 뭔지 알고 있나?”

    “모, 모르는데요.”

    “하긴, 알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았겠지.”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 보석이 대체 뭐길래?

    그러고 보니, 조력자는 보석이라고 하지 않았다. 보석‘처럼’ 생긴 거라고 했었어.

    “지금 내가 매우 곤란해, 황녀. 그대가 내 심장을 삼켜 버리는 바람에.”

    “……네?”

    내가 뭘 삼켰다고?

    라히트리안이 인간의 몸으로 영생을 산다는 건 작중의 여러 가지 언급으로 알고 있었지만…….

    ‘심장을 외부에 보관하고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어쩐지 다들 죽을 것이라 예상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도 그는 죽지 않곤 했다.

    라히트리안이 냉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길게 내려온 그의 흑발 사이로 마력을 제어하는 핏빛 제어구가 얼핏 보였다.

    나는 최대한 입매를 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러실 것 같아요. 제가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어서…….”

    “…….”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가 뭘 해야 그의 기분이 풀릴지 모르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응시했다.

    당사자는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선만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기절하고 싶을 만큼.

    조마조마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라히트리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황녀.”

    “네, 네!”

    나는 빳빳하게 굳은 상태로 잔뜩 기합이 들어갔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갑자기 라히트리안이 몸을 숙여 왔다.

    나는 헉 숨을 들이켰다. 보랏빛이 스쳐 보이는 걸 느끼며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군.”

    “……무, 뭐가요?”

    “오히려 잘됐다고 해야 하나.”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코앞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슬그머니 상체를 뒤로 뺐다.

    그러면서도 라히트리안이 언제 몸을 관통해 심장을 회수해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감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방금 삼킨 게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는 들었으니 잘 알겠지?”

    “그……, 네에.”

    역시 밑밥을 까는 걸 보니 살려 줄 생각이 없나 보다.

    라히트리안의 심사가 뒤틀릴 만한 일이기도 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현행범으로 적발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도 억울했다.

    난 그저 살고 싶어서 그랬던 것뿐인데.

    ‘자기가 토끼도 아니고……. 그렇게 중요한 거였으면 직접 몸 안에 보관하란 말이야.’

    눈가가 촉촉해지는 게 느껴졌다.

    당연히 속마음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는 순간 라히트리안이 어떻게 나올지 보나마나 뻔했다.

    그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귓가에 들리는 의미심장한 웃음소리에 소름이 돋아 어깨가 움츠려 들고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사, 살려 주세요…….”

    “내가 어떻게 튜니아의 후손을 건드릴 수 있겠어.”

    “그, 그럼?”

    살려 주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그’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이? 그런 아량을 베푼다고?

    믿기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라히트리안이 내 손을 낚아채고 귓가에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황녀는 이제부터 나랑 같이 가 줘야겠어.”

    바닥에 그려져 있는지도 몰랐던 마법진이 떠오르며 빛이 터져 나왔다.

    ……내가 어째서 이런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됐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주 살짝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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