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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외전 After 9화
“오늘 출근 안 하냐?”
작은 집.
한상혁은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는 그의 누이를 향해 쏘아댔다.
하지만 그녀는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통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간 남아돌면 저번에 말한 청소팀 연수 건이나 좀 검토해줘.”
“보고.”
“보고는 시발, 그것도 안 하면 대체 네가 하는 일이 뭔데?!”
“목소리 낮춰라. 나 니 상사다.”
“별 X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한상혁은 대놓고 혀를 차며 말했다.
사실 그녀의 말이 썩 틀린 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청소팀은 기획 본부 소속이고, 한유빈은 엄연히 자신의 책임자인 셈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내 직책을 집에서까지 들이미는 건 가당치도 않은 짓이었지만.
“상사고 나발이고, 나 오늘 저녁 먹고 올 거니까 밥은 알아서 해 먹어라.”
“먹고 와서 저녁 차려.”
“…….”
한상혁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런 인간이 본부장이라니, 회사 꼬라지 참…….”
이내 단념한 것인지, 고개를 내저으며 집을 나섰다.
한상혁이 출근한 이후로도 한유빈은 소파 위에서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간만의 휴일인 만큼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전 국제 협회 소속 헌터이자 미국 지부 최연소 작전팀장.
현 WDSO의 기획본부장인 동시에 비공식 임무 후속 처리 조직, 클린업의 팀장.
협회 내 최고 핵심 인력 중 한 명.
한유빈.
대외적으로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물이지만, 이상하게 집에만 들어오면 사람이 바뀌어버리곤 했다.
뭐, 누군들 안 그러겠냐마는…… 한유빈은 조금 사정이 달랐다.
사실 미국 지부에서 활동할 때만 해도 그녀에게 게으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오전에는 작전 기획, 오후에는 토벌 참가, 퇴근 후에는 잠들기 직전까지 훈련.
살인적인 루틴을 몇 년 동안 유지해오자 동료들이 그녀에게 붙인 별명은, 사무라이였다.
왜 한국인에게 사무라이라는 별명이 붙었나 생각해본다면… 사실 뻔한 이유였다. 그저 멍청한 놈들의 스테레오타입일 뿐이니.
뭐, 그쪽 입장에선 나름의 칭찬이었겠지.
그랬던 한유빈이 집에만 오면 병든 닭처럼 늘어지게 된 건, 모두 그 사건 때문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친구였던 니콜이 제이슨 통제팀장에 의해 희생되었던 그 날.
그 이후로 한유빈의 마음 어딘가엔 깊은 허무주의가 자리 잡았다.
물론 한국에 와서 만난 누구 덕분에 조금은 나아지긴 했다만…….
따르릉―.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뜬금없이 전화가 울렸다.
다름 아닌 WDSO의 총수, 김준우였다.
“하아…….”
아무리 개인적으로 고마운 사람이라고 해도, 휴일에 연락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벌써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런저런 직책이 달려있다고 한들, 결국 까라면 까는 직장인인 것을.
“…무슨 일이에요?”
한유빈은 전화를 받으며 최대한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김준우가 무어라 말을 전달했고.
“제가요?”
한유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꼬리를 올렸다.
“그걸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더 되물었지만, 김준우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왜요?”
결국, 한유빈은 진심에서 우러난 물음은 던졌다.
***
“흐음…….”
WDSO 서울 본부, 사무총장 집무실.
나는 신수지 비서가 건네준 서류를 훑어보며 신음을 내뱉었다.
“보고드린 대로, 국내 토벌 산업 축소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별그룹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있고요. 사무총장님께서 진행하신 사업들이 대부분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서, 이대로만 유지한다면 1년 안으로 토벌 산업의 80% 이상 축소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요…….”
“…뭐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내가 모호하게 대답하자, 신수지 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뇨. 마음에 안 든다기보단…….”
나는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국내 상황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해외 쪽은 아직 손도 못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 점이 좀 걸리는군요.”
“…….”
WDSO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 세계가 이능차원현상에서 벗어나는 것.
토벌도, 헌터도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토벌 산업을 대체할 게 필요하다.
뭐, 선진국들은 각 협회의 주도 아래 조금씩 준비하곤 있지만.
문제는 개발도상국들이 아직도 국가 경제의 대부분을 토벌 산업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토벌을 중지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이전부터 계속 고민이긴 했는데, 이쪽은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군요. 이사회에서는 뭐 말 나온 건 없습니까?”
“이사회에서는 농업, 관광, 해외 공장 사업 정도의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모두 대체 사업으로는 가능성 있는 것들이긴 하지만…….”
“해당 국가들이 받아들일지는 미지수겠죠.”
“네…….”
신수지 비서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흐음.”
팔짱을 끼며 옅은 한숨을 뱉었다.
그래. 문제는 그것이다.
아무리 우리 쪽에서 토벌을 대신할 사업을 추진하고, 지원해준다고 해도 해당 국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당장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사업을 축소하고, 언제 성장할지 모르는 사업으로 대체하는 것을 찬성해줄 리도 없고.
무엇보다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토벌만으로 먹고 사는 국가에 해당 사업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그들에게 토벌 산업 축소를 설득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니, 신수지 비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 일단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시간을 두고 생각을…….”
“그렇게 넘겨온 게 벌써 1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에도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시간을 더 둔다고 해서 뭔가 나올 거라는 보장은 없죠.”
그녀의 말을 자르며 말하자, 신수지 비서가 입을 꾹 다물었다.
“미뤄봤자 현행 유지입니다. 이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렇게 덧붙이는 순간.
“동감이에요.”
익숙한 목소리가 집무실 안으로 들려왔다.
굳이 확인할 것도 없는 인물.
“…일이 없습니까? 어떻게 매일 찾아오실 수가 있지?”
“없긴요. 내가 유능해서 빨리 끝내는 거지.”
“그럼 다른 일이라도 좀 찾아보시죠. 괜히 심심하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시고.”
“그러려고 온 거잖아요.”
WDSO 소속 대한민국 협회.
이아영 협회장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나와 신수지 비서 앞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젠 정말 시작해야 해요. 그나마 상황이 좋았던 우리나라도 토벌 산업의 기대치를 고작 10% 줄이는 데 1년이 걸렸잖아요. 하물며 국가의 전반적인 경제활동을 토벌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는 나라들은 어떻겠어요.”
“뭐, 동감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습니까, 협회장님.”
“아뇨?”
“…….”
놀러 온 거 맞구만 뭘.
“뭐, 그래도… 대비책 정도는 있어요.”
“대비책?”
“개발도상국 협회들을 다른 협회와 병합시키는 거죠.”
그녀의 말에 내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건…… 나쁘지 않겠군요.”
나는 곧바로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협회를 병합시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론 신수지 비서는 아니었지만.내가 설명을 덧붙였다.
“자체 토벌에서 병합 토벌로 넘어간다면, 국가 내 토벌 산업의 비중이 작아질 수밖에 없겠죠.”
“그, 그럼 안 좋은 거 아닌가요? 아직 대책도 없는 마당에 강제로 토벌 축소부터 해버리면…….”
“모체가 될 협회가 토벌 수수료를 지급하면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될 겁니다. 나머진 저희 쪽에서 토벌 산업을 대체할 사업을 조금씩 추진해가면 되고요.”
그제야 이해가 됐다는 듯, 신수지 비서가 작게 감탄했다.
“물론 이 또한 반강제적이긴 해도… 최소한 아무것도 없이 축소를 강요하는 것보다는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내가 말하자, 신수지 비서가 물었다.
“그럼 역시 모체 협회는 우리나라가…….”
“아뇨. 우리도 이제 겨우 축소를 하고 있는 마당에 다시 늘릴 필요는 없죠.”
“네…?”
“뭐, 이런 걸 부탁할 나라가 한 군데밖에 더 있겠습니까.”
내가 이아영 협회장을 바라보며 말했고, 그녀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협회.”
“…밖에 없죠. 역시.”
그녀가 내 말에 덧붙였다.
“중요한 건 미국 협회가 이 프로젝트를 받아들일 이유가 있냐는 거겠죠. 애초에 그쪽도 토벌 축소를 진행 중인 곳이고.”
“맞아요. 무엇보다 우리가 직접 일 벌이기 싫어서 대타로 떠밀려고 한다는 것쯤은 금방 눈치챌 거고요.”
“흐음…….”
팔짱을 낀 채 또다시 신음을 내뱉길 한 차례.
“일단… 부딪혀는 봐야겠죠.”
되든 안 되든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
그렇다면 망설일 거 없이 진행해봐야겠지.
“신 비서님, 미국 협회랑 미팅 일정 잡아주세요.”
“날짜는 언제로 할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러자, 신수지 비서의 눈썹이 물결쳤다.
“설마… 직접 가실 생각은 아니시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직접 가야죠.”
“사무총장님은 안 돼요.”
“예…?”
“말씀드렸잖아요. 이번 주부터 차원석으로 국내 던전 출현 수 조정 들어갈 건데, 한 달간은 직접 모니터링 해주셔야 한다고요.”
“아…….”
그랬다.
한국 협회는 본격적으로 토벌 축소 과정을 시작했고, 그 첫 단추로 이번 주 서울 내 던전 출현량을 5% 감소시키기로 했다.
물론 던전 수를 줄인다고 문제가 일어날 여지는 없다.
다만, 전 세계에서 처음 시도하는 일일뿐더러 아직은 축소 과정과 토벌 수익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했기에 면밀한 관찰이 필요했다.
당연히 그 판단은 WDSO의 사무총장인 내가 직접 맡아야겠지.
‘귀찮게…….’
솔직히 내가 아니어도 그 정도 판단은 누구나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제 생각에는 이아영 협회장님이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신수지 비서가 이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한마디를 덧붙이는 순간.
“그리고 보좌할 사람은 미국 협회에 대해 잘 알고 계신 분이 좋을 것 같은데…….”
“…….”
“…….”
집무실에 이상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나는 곧바로 신수지 비서가 하려는 말을 눈치챘다.
“아, 안 됩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그 인간을…!”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우리 쪽에 미국 협회랑 관련 있는 사람이라면 두 명밖에 더 있습니까? 클로이 소장은 출국 금지 걸려 있으니 아닐 거고, 그럼 한 명뿐이잖습니까.”
“…….”
이름은 거론되지도 않았지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격렬히 반대했다.
이아영 또한 표정을 보아하니 나와 같은 마음인 듯했다.
그런데 신수지 비서는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었다.
“제가 박인범 협회장님과 이두식 이사님도 몇 년 동안 보좌를 했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나를 슬쩍 흘기길 한 차례.
“그분들이 사무총장님 해외 보낼 때도 같은 심정이셨습니다.”
“…….”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한마디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