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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도 총리의 기자회견이 있은 지도 3일이 지났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전 세계에서는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주목할 점은 그 어떤 논란이 터져도 구렁이처럼 빠져나갔던 웨슬리 사무총장이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는 부분이다.
너무나 명백한 증거에 웨슬리 사무총장은 결국 당국의 경찰 조사를 받게 됐다.
웨슬리가 이번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건지, 나아가 이번 사건과 연루되어 있는 다른 지부들을 색출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권력을 쥐고 있는 그가 수사 대상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리라.
이후 이번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몇몇 국제협회 지부들은 곧바로 국제협회에서 탈퇴하기도 했다.
아직 독립 토벌 조직은 인정되지 않았기에, 그들 모두가 카르마 코퍼레이션으로 들어왔다.
물론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지부들도 있었다.
뭐, 그들 모두가 국제협회 본부 직할 지부들인 걸 보면…….
‘그놈들은 본부랑 한패라는 소리겠지…….’
난 옅은 한숨을 뱉었다.
솔직히 그 어느 때보다 큰 성과였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떨떠름하기도 했다.
국제협회가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게 특히나.
절대 당하고만 있을 놈들이 아니다.
분명 무슨 짓을 해도 할…….
따르릉―.
홀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머릿속으로 가늠하던 차에 핸드폰이 울렸다.
「몸은 좀 어떠냐?」
꽤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박인범 전 협회장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너 말고 직원들 말이야. 듣자 하니 피 터지게 싸웠다면서.」
“…….”
웬일로 내 걱정을 다 하나 했다.
“…다들 괜찮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핸드폰 너머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이탈리아냐?」
“예.”
「한국에는 안 와 봐도 되겠어?」
“이 씨 부녀가 알아서 잘해주고 있잖습니까. 굳이 갈 필요는 없겠죠.”
「그래도 재정비는 필요할 텐데.」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민낯이 드러난 국제협회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그래서, 앞으로 계획은?」
“뭐, 일단 국제협회를 탈퇴하고 저희 쪽으로 들어온 지부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카르텔 수색을 도와주고 있으니 본거지를 찾는 건 시간문제겠죠. 일단 보이드 유통부터 막고…….”
「아니. 그거 말고.」
박인범 협회장이 내 말을 끊으며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다음 말이야.」
“…….”
그 물음에 잠시 대답을 아꼈다.
그가 무엇을 묻고 싶은 건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여태까지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아왔고, 그때마다 내 대답은 똑같았다.
국제협회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국제협회가 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 국제협회를 무너뜨린다 함은 우리도 그만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준비해야겠죠.”
「그럴 만한 각오는 돼 있고?」
“…….”
하여간 노인네.
예전부터 촉 하나는 무시무시하다니까.
「자네를 알게 된 것도 얼마 안 됐는데, 이상하게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 같단 말이지.」
“…그런가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그가 사뭇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겁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
나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가 겁을 먹고 있다니요?”
「자네가 과거에 어떤 놈이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몰라. 별로 관심도 없고. 그런데 말이야… 무언가를 잃어본 적이 있는 놈은 본능적으로 겁을 먹게 돼 있어. 겉으로는 티를 안 내려고 해도 다 보인다 이거야.」
“…….”
「그래서 하는 소린데…….」
이내 박인범 협회장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도 잃어본 적이 있었던 거지?」
나는 대답을 아꼈다.
「뭐, 말하기 싫으면 말어. 이제 와서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다만, 조금은 편하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해서. 수천 명의 직원이 자네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데, 자네 혼자만 짐을 짊어질 필요가 있냐는 말이야.」
“…….”
짧은 순간, 많은 기억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 많은 얼굴들이 떠올랐고.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제 이야기는 아닌데…….”
「음?」
“제 친구 중에 딱 그런 놈이 있었습니다. 랭크니, 타이틀이니 하는 것들에 이상하리만치 목을 매는 놈이었는데… 그래서인지 평판이 아주 쓰레기 같은 놈이었죠. 주변에서 욕도 많이 먹었고요.”
「호오, 그래서?」
“그래서 뭐, 저도 똑같이 말해줬습니다. 조금은 내려놓고 사람들한테 잘 좀 대해주라고. 그랬더니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내가 묻자 박인범 협회장은 대답을 아꼈다.
그냥 내 말에 집중하고 있는 건지, 혹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건지.
“자기는 늘 절대적인 우위에 있어야 한다더군요. 그래야 잃지 않는다고.”
「…….」
그대로 정적이 이어지길 잠시.
「…재미없는 이야기군.」
“동감입니다.”
핸드폰 너머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뭐, 그건 자네 친구 일이고. 어쨌든 이번 일은 순전히 자네의 일이야.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난 자네를 믿네.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겠지.」
“…….”
「그러니 마음대로 해. 대신…….」
이내 그가 평소와 같은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왕 하는 거 끝까지 가. 이렇게 일 벌여놓고 나중에 가서 혼자 내빼면 가만 안 둬.」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정곡이군.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것 봐요.”
한유빈이 기다렸다는 듯 뜬금없는 소리를 뱉었다.
“다른 사람은 그쪽이 사라진다고 하면 절대 가만히 안 있을 거라니까.”
“…….”
이젠 아예 믿기로 한 모양이군.
“협박할 생각입니까?”
“협박…?”
“뭐,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는 대신 그쪽 노예가 되라거나…….”
“……대체 무슨 영화를 본 거예요?”
그녀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참 나, 날 뭘로 보고. 애초에 그럴 거였으면 도와준다고 하지도 않았지. 걱정 마요. 다른 사람한테는 말 안 할 테니까.”
“그럼 다행이군요.”
“그런데 뭐…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던데?”
……뭐라고?
“무, 무슨 소립니까. 누가 알고 있어요?”
“뭐야. 몰랐어요?”
오히려 한유빈이 더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그 여자 촉이 얼마나 좋은데.”
그리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카르마 코퍼레이션 산하 아이템 제작 연구소.
이클립스.
거기서도 가장 깊은 곳인 뱅크 아이템 보관실.
이아영 지원본부장은 보관된 이능석과 반능석, 두 개의 뱅크아이템을 바라보며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사색에 잠겨 있었다.
“왜 그러고 계세요? 평소답지 않게.”
그때, 하성일 해외사업본부장이 그녀에게 다가오며 넌지시 물었다.
그와 동시에 이아영 본부장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하 본부장님은 만약에… 준우 씨가 사라진다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술 드셨어요?”
“…….”
이아영 본부장의 표정이 팍 가라앉았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대표님이 사라진다니.”
“그래서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만약에, 준우 씨가 일 다 벌여놓고 혼자 사라져버리면 어떨 것 같냐고요.”
“……뭐, 섭섭하긴 하겠죠.”
그 말에 이아영 본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역시…….”
“그래도… 대표님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럴 분은 아니잖습니까?”
하성일 본부장이 그녀의 말을 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면, 그것도 존중해드려야겠죠. 뭐, 사실 일개 직원이 대표님 결정에 이러쿵저러쿵할 자격도 없고.”
“…….”
이아영 본부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하성일 본부장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 본부장님은 어떻습니까?”
“뭐… 저도 당연히 존중해줘야죠. 존중해줘야 하는데…….”
이내 시선을 회피하며 그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러기엔 이미 선을 너무 많이 넘었나 봐요.”
의미심장한 말에 하성일 본부장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 이아영 본부장이 다시 평소처럼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바꿨다.
“암튼!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지.”
“무슨 준비 말입니까?”
“궁지에 몰린 국제협회가 칼을 빼 들 걸 대비해서 우리도 그만한 칼을 쥐어야죠.”
“나머지 뱅크 아이템도 가져오시려는 겁니까?”
“가져오려는 게 아니라 파괴할 거예요.”
“예…?!”
담담히 꺼낸 이야기에 하성일 본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통제권이 그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죠.”
“하, 하지만 제가 알기론 뱅크 아이템을 파괴하려면…….”
“맞아요. 에덴이 필요하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모두가 잠시 잊었던 거였다.
“어디 숨어있는지 몰라도… 다시 시작해보자고요.”
***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터지고, 긴급 소집된 정상 회담.
각국의 정상들을 비롯해 국제기구의 수장들, 그리고 이번 사건의 중심에 선 웨슬리 사무총장까지 참석한 자리였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입니다.”
대한민국 조현민 대통령이 처음으로 발언했다.
그러자 모두가 그의 말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맞습니다.”
“전 세계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움직여야 할 국제 헌터 협회가 뒤에서 마약 유통을 지원하고 있었다니요.”
“그간 국제협회가 희생해온 건 알지만, 그렇다고 이번 일이 묵과되어선 안 됩니다.”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아니, 두 번 안 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국제기구로서 자격을 박탈해야 합니다!”
의장을 맡은 UN 사무총장은 각자의 의견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사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모두가 같은 의견이었다.
UN 사무총장은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을 살폈다.
그는 날이 선 비난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데.’
무슨 생각인가 싶었다.
바로 경찰에 끌려가도 모자랄 판국에 정상 회담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요청 때문이었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만든 자리인데 어째 한마디를 하지 않고 있으니…….
사실 그에게도 충격적인 일이긴 했다.
설마하니 가장 신뢰받아야 할 국제기구가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이야.
그렇다면 이전의 구설수 또한 마냥 의혹이라고만 할 수도 없게 된다.
“혹시 하실 말씀 있습니까, 웨슬리 사무총장님?”
그에게 발언권을 주자, 웨슬리 사무총장이 한 차례 호흡하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권력은 한 명이 통제하면 안 된다, 혹시 그런 생각들 하고 계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당연한 거 아닙니까!”
“건강한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경쟁과 공생이…….”
그 순간, 웨슬리 사무총장이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왜 당신들은 그러고 있습니까?”
“……!”
“……!”
명백한 도발에 정상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당신들은 그렇게 청렴결백해서 저한테 돌을 던지고 있나요? 지금 이 자리엔 과거 해가 지지 않았던 나라도 있고, 세계 유가 폭등의 원인인 나라도 있습니다. 솔직히 입 밖으로 말만 안 꺼낼 뿐이지, 다들 무기 하나씩은 가지고 있잖습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토벌은 시민들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독점을 피하고 경쟁 구도를 통해 성장한다는 건 기업에나 먹힐 얘기지, 시민들의 목숨을 가지고 경쟁한다는 게 애초에 말이 되는 걸까요?”
궤변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음에도, 누구 하나 반박하지 못했다.
“솔직히 저도 관리라는 명목으로 통제권을 휘두르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이렇게 관리가 안 되니, ‘유일한’ 국제 토벌 기구로써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모두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진짜 통제가 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검은색 유니폼을 착용한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국제 헌터 협회 산하 비공식 조직, PB 코퍼레이션이 기어이 양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시작해!”
그 한마디에 회의실에 들어선 괴한들은 곧바로 정상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거 안 놔?!”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야!”
“겨, 경호원! 경호원 어디 있어!!”
각국 정상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그들을 지켜줄 인원들은 모두 목이 달아난 후였으니까.
“다, 당신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우리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세계랑 전쟁이야!”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전 세계 군대를 상대로…!”
정상들은 눈에 불을 켜고 웨슬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
[고유 스킬 : 천지창조]
웨슬리 사무총장의 서슬 퍼런 눈빛이 그들을 향했다.
“바라던 바입니다.”
결국, 국제협회가 전 세계를 상대로 본색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