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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웨슬리 사무총장이 노아 밸런스 팀장을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
노아 팀장은 잠시 대답을 아끼다가 입을 열었다.
“김준우 대표가 일본 내에서 여론을 조작한 모양입니다. 쇼이치 지부장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 급하게 권한을 떠넘기고 도주했고요. 아마 처음부터 다 계획된 게 아닌가…….”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뭐, 그대로 있으면 우리한테든 아니면 일본에 책임을 물어야 했을 테니 이해는 합니다만. 제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라…….”
그 순간, 웨슬리 사무총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한 남자에게 향했다.
“그렇게 혼자 살려고 멋대로 지부를 넘겨버린 당신이, 대체 무슨 낯짝으로 여길 찾아왔냐는 겁니다. 쇼이치 지부장님.”
“…아, 아닙니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쇼이치 지부장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호, 혼자 살려고 했다뇨!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전 김준우 대표가 저희 지부를 도와준다는 말을 믿고 책임 권한을 위임한 것뿐입니다.”
“그 말을 믿었다고요?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한국 협회를 집어삼키려고 했던 분이?”
“…….”
“그리고 말입니다. 듣자 하니 권한을 넘기는 조건으로 계약금에 리베이트까지 챙겼다던데, 그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날카로운 지적에 쇼이치 지부장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본 웨슬리 사무총장이 알 만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가짜였군요?”
“……!”
“받아 챙긴 돈으로 어디 경치 좋은 데서 편하게 먹고살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손에 들린 게 돈이 아니라 휴짓조각이었다……. 그렇게 속았다는 걸 알고 나서야 나한테 도움을 청하려고 찾아왔다. 이거 아닙니까, 지금?”
“그, 그런 게 아니라…….”
쇼이치 지부장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설마 자신이 모를 줄 알았다고 생각한 건가.
“하,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애초에 이건 불공정 거래였으니, 사무총장님 선에서 권한 위임을 철회할 수 있지 않습니까! 김준우 대표를 끌어내리고 저에게 다시 맡겨주신다면…!”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네?”
너무나 단호한 거절에 쇼이치 지부장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이미 당신 덕분에 일본 지부는 국제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지부를 계속 유지한다고 하면, 주변 국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설령 당신이 복귀한다고 해도 한국과 중국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을 게 뻔한데, 제가 왜 당신을 복귀시켜야 하는 거죠?”
“그, 그렇다고 멀쩡한 지부를 김준우, 그놈한테 빼앗기는 건 본부로서도 큰 손해 아닙니까…!”
“뭐, 그건 맞습니다. 두 눈 시퍼렇게 뜬 채로 지부를 빼앗긴 건 너무나 큰 손해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쇼이치 지부장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이젠 일본 지부를 계속 가지고 있는 게 더 손해인 것 같군요.”
“…….”
“이미 탈퇴 절차는 진행 중입니다. 일본 지부는 이제 카르마 코퍼레이션 산하가 되겠죠. 물론 김 대표가 당신을 다시 부를 일도 없을 거고요.”
쇼이치 지부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뿐이라면 다행이었다.
그에겐 더욱 가혹한 마지막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뭐, 그건 그렇고……. 쇼이치 지부장님은 멋대로 우리 지부를 팔아버린 책임을 지셔야겠죠.”
웨슬리 사무총장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렴, 지부를 홀랑 넘겨버리고 제 발로 기어들어 온 파렴치한 놈을 가만히 둘 순 없었다.
“우리가 향후 10년 동안 일본 지부로부터 벌어들일 수 있었던 추정 수익을 배상하셔야겠습니다. 물론 조금 감면해 드릴 생각이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어, 얼마나…….”
“통 크게 50% 감면해서…… 2조만 배상하시면 됩니다.”
“예, 예…?!”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에 쇼이치 지부장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2조라뇨?!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물론 쇼이치 지부장님 개인이 부담할 수 있는 액수는 아니죠. 그런데 뭐, 듣자 하니 아드님이 꽤 큰 중소기업의 대표라면서요?”
웨슬리 사무총장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드님 회사에서 벌어들이는 수익 전부를 저희에게 보내시면 됩니다. 그래도 모자랄 것 같긴 한데. 당신 손주… 안 되면 증손주까지 열심히 벌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
“어쨌든 앞으로 당신 아래 3대가 버는 모든 재산은 전부 저한테 바친다고 생각하세요. 이건 그 계약서니까, 서명하고 가시고요.”
“아, 안 됩니다…!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사형선고, 아니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욱 끔찍한 계약서 내용에, 쇼이치 지부장은 최후의 발악을 했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살려주십쇼. 제가 어떻게든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
“제가 언제 죽인다고 했습니까? 살려드린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 이건 죽으라는 것밖엔…….”
“그래서, 서명을 못 하시겠다는 겁니까?”
“제발 한 번만 자비를…….”
쇼이치 지부장은 기어이 두 손을 모으고 삭삭 빌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어쭙잖은 짓이 먹힐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 뭐, 지부장님에게 맞춰서 저도 동양식으로 갈 수밖에 없겠군요.”
“…예, 예?”
“노아 팀장님, 쇼이치 씨 엄지 하나 잘라서 지장으로 찍어주십쇼.”
“……알겠습니다.”
이윽고 쇼이치 지부장 앞에 노아 팀장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자, 잠깐…!”
그가 단말마를 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총장실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하네다 공항.
출국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 시각.
이아영과 하성일 본부장이 일본 지부에 남아 아직 해결해야 할 내부적인 문제를 맡아주기로 했기에,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나와 한유빈뿐이었다.
“참 나…….”
그런 우리를 배웅하러 온 이아영 본부장은 여전히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한 명은 찌라시 확인하러 간다더니 일본 지부를 인수하질 않나, 한 명은 일본 전역 야쿠자 세력을 통일하질 않나…….”
“결과적으로 다 잘되지 않았습니까. 국제 협회에서도 별말 없이 탈퇴 요청을 받아들여 줬고요.”
“흥, 일은 당신이 다 벌이고 마무리는 제가 해야 하는 거, 좀 웃기지 않아요?”
“……마무리는 본인이 하겠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 아닙니까?”
어이가 없네.
누가 보면 내가 떠넘긴 줄 알겠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이아영 본부장은 할 말이 없다는 듯 대충 얼버무렸다.
“뭐, 아무튼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주시고요.”
“여긴 걱정하지 말고 본사 일에만 신경 써요. 대표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데요. 귀국하자마자 출근해야 할걸요?”
“……듣던 중 개 같은 소리군요.”
시벌, 난 대체 언제 쉬어보냐.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대표님. 도착하시면 연락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 다 조금만 더 수고해 주세요.”
하성일 본부장 또한 악수를 건네며 우리를 배웅했다.
수속을 모두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 이륙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였다.
“한유빈 씨,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하던 생각을 정리하고 내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뭔데요?”
“다른 게 아니라, 미국 지부에 있었을 때 그쪽 친구분 일 말입니다.”
“…….”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화가 난 건 아닌 듯했고, 그저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건 왜요…?”
“혹시 미국 지부에서 그런 비슷한 일이 또 있었습니까?”
“……?”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반응.
때문에 내 쪽에서 먼저 본론을 꺼내 들었다.
“3년 전쯤인가, 미국 지부 소속의 청소부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론 당시 청소부가 투입된 던전은 저위험도 등급이라 목숨을 잃을 만한 요소가 없었다고 하던데… 혹시 그 사고에 대해서 아는 게 있습니까?”
“아… 그거라면 들어본 적은 있는데, 그건 갑자기 왜요?”
“누구랑 거래를 좀 하기로 해서.”
현 PB 코퍼레이션 밸런스 팀장이자 세계 랭킹 1위의 헌터랑 말이지.
물론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대충 얼버무리자 한유빈은 뭔가 떨떠름한 듯했지만, 그럼에도 대답을 해주었다.
“저도 들어본 적이 있는 거지, 자세하겐 몰라요. 이름이…… 소피아 웨스턴 우드였나, 아마 그럴 거예요. 그 왜 세계 랭킹 1위 있잖아요. 그 인간이랑 성이 같아서 기억하고 있죠.”
보아하니 그 인간의 친여동생이라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진짜 작업 중 사고를 당한 게 맞습니까?”
“그게… 확실하진 않아요.”
“확실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설명하기 좀 어려운데…….”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다시금 설명을 이어갔다.
“이건 저도 들은 건데, 통제팀 직원 말에 의하면 당시 별다른 사항 없이 청소 완료 보고가 올라왔었대요. 그러니까 작업이 끝날 때까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죠.”
“……?”
뭔 소리야 그게.
작업에 문제가 없었는데, 작업 중 사고를 당했다?
“청소 작업은 문제없이 끝났는데, 그 이후에 갑자기 사고가 발생해서 목숨을 잃었다는 겁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거기까진 저도 모르죠. 다만 청소 완료 보고가 올라온 직후에 국제 협회 본부 직원들이 해당 던전으로 찾아갔고, 그들 말로는 소피아는 던전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해요.”
“아니, 그게 무슨…….”
본부가 직접 던전에 행차했다고?
대체 왜?
“같이 있던 청소팀 동료들은요? 그 사람들은 뭔가 알고 있을 거 아닙니까.”
“물론 지부에서 그 사람들 대상으로 조사는 했죠. 그런데 다들 겁에 잔뜩 질려서 조사할 상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고요. 뭔진 몰라도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안타까운 일이라는 듯 혀를 차곤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동료들도 머지않아서 다 그만뒀어요. 그 뒤로 뭐 하고 지내는지는 알 턱이 없고요.”
“……그렇군요.”
“대답이 좀 됐어요?”
“아뇨.”
“……?”
“결국,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본인도 모른다는 거 아닙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듣지 말 걸 그랬습니다. 괜히 머리만 더 아프네.”
“…….”
반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한유빈의 눈에 살기가 드리웠다.
불끈 쥔 주먹이 떨려오는 걸 보고는, 나는 곧바로 애써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머릿속에선 대강 그림이 그려졌다.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된 청소 작업.
그 직후 직접 던전을 찾은 본부 직원.
의문의 실종. 입을 닫은 동료들.
이것들로 유추해봤을 때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청소 작업 중에 던전에서 뭔가가 나왔다?’
뱅크 아이템?
아니, 지부가 획득한 뱅크 아이템을 굳이 직접 찾으러 갈 리가 없다.
직접 찾으러 갈 만큼 중요한 거라면…….
모르겠군.
저 정도 단서로 거기까지 알아내면 그게 귀신이지.
뭐, 시간이 나면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체 던전에서 뭐가 나온 건지.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좌석 등받이에 몸을 쭉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