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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어느 일식집.
하성태 본부장은 정훈 의원의 호출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오늘이 의원 총회 날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법안 통과 여부도 이미 결정이 났겠지.
하성태 본부장에겐 당연히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사업이고 나발이고, 결국 통과되지 못하면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었다.
“야당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는 통에 발의는 보류됐네.”
정훈 의원의 첫 마디는 충격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이번에도 기각된 겁니까?!”
하성태 본부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정훈 의원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또 아닐세. 한 달간 시범 운영하기로 했으니.”
“시범 운영이요?”
“그래. 뭐, 운영 중에 큰 사고만 없으면 통과될 걸세. 결과적으론 발의된 거랑 다를 바 없지.”
“……그렇군요.”
하성태 본부장은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물론 정훈 의원의 말에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지금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래서, 준비는 잘돼 가나? 듣자 하니 이참에 한별 상사에서 나와서 아예 새 계열사를 만들 거라면서? 이름이…….”
“한별 던전입니다.”
하성태 본부장이 즉답했다.
“구색은 갖췄습니다. 작전팀도 프리랜서랑 길드 쪽에서 괜찮은 놈들로 세 팀 정도 꾸려놨고요.”
“세 개 팀으로 되겠나. 노다지가 될 사업인데.”
“뭐, 앞으로 차차 늘려갈 예정입니다.”
“그렇구만. 그나저나, 자네는 가만히 있어도 한별 상사를 먹을 수 있을 텐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사업을 시작한 이유가 있나?”
정훈 의원은 언젠가 생각했었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가 보기엔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한별 상사는 아버지가 키운 회사잖습니까. 젊은 놈이 벌써부터 얻어먹을 생각만 해선 안 되겠죠.”
“하하하! 맞는 말이네. 무릇 사내가 돼서 본인 손으로 업적 하나는 일궈야지. 좋은 생각일세.”
정훈 의원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하성태 본부장은 말을 아꼈다.
사실 미래가 보장된 한별 상사에서 나와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 것은, 꼭 도전정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단 그의 할아버지, 하덕수 회장에게 인정을 받기 위함이 더 컸다.
총수의 인정을 받고, 한별 그룹의 꼭대기에 서기 위해서.
동생들이 작지만 본인의 독자적인 사업을 키워나가고 있는 마당에, 언제까지 아버지 밑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 기회에 자신만의 사업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뭐, 굳이 여기서 꺼낼 필요는 없겠지.’
그때 사케를 홀짝이던 정훈 의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민영화가 시행되면 기업이고 지자체고 죄다 던전 사업에 뛰어들 걸세. GT그룹이랑 오각그룹도 낌새를 눈치챈 건지 부랴부랴 사업에 착수하는 모양이더군.”
“지금부터 준비한다고 해서 저희를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겁니다.”
“알지, 아는데……. 내가 볼 땐 이 던전 사업의 경쟁력은 작전팀이 아니고 청소팀에 있다고 보네. 작전팀이야 널리고 널린 게 헌터들이니 쉽게 꾸릴 수 있겠지만…….”
“네. 청소팀은 아니죠.”
작전에 꼭 필요하지만, 누구도 쉽게 하려고 하지 않는 일.
던전 민영화가 시행되면 품귀현상이 일어날 게 불 보듯 뻔했다.
모르긴 몰라도 거의 유일에 가까운 청소부 파견 업체인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손에 넣는 기업이 주도권을 잡게 될 것이다.
‘그런데 뭐, 이미 우리 쪽으로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으니…….’
원하는 패가 전부 모였다.
이건 질 수 없는 판이다.
하성태 본부장은 애써 미소를 숨겨야 했다.
“아무튼, 잘해 보라는 소리일세. 카르마 코퍼레이션만 잘 잡으면 국내 최고 민간 던전 업체가 될 테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하태식 본부장은 겉으론 감사를 표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알아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정치인이면 정치나 할 것이지, 어디서 주제넘게 사업을 조언하는가. 그것도 사업가한테.
“그래서…… 시행일은 언제입니까?”
“다음 주 월요일부터.”
드디어 시작이군.
하성태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따로 마련된 오재엽 실장의 개인 사무실.
한참 업무를 보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어떻게, 일은 좀 할 만한가?」
볼 것도 없이 하성태 영업 본부장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더할 나위 없습니다. 초장부터 기를 팍 잡아놔서 딱히 어려울 것도 없고요.”
「내부 상황은 어떤가.」
“꽤 좋습니다. 대부분 업무에 제가 관여하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대표가 생각보다 이쪽 방면에 상당히 무지합니다. 역시 청소부 출신답다고 해야 할까요.”
「출신 가지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건 안 좋은 버릇이야. 그래 보여도 협회에서 짧게나마 전성기를 이끌었던 사람이니까.」
“뭐… 그쪽으로는 전문가일지 몰라도 확실히 사업가 체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핸드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락한 건 다른 게 아니라, 던전 민영화 말이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범 시행이 된다고 하더군.」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그래. 뭐, 밑 작업도 충분히 된 것 같으니 슬슬 우리 쪽으로 잡아놔야지. 그때까지 착실하게 준비에 신경을 써.」
“여부가 있겠습니까.”
「뭐, 김준우 대표가 순순히 우리 쪽으로 붙어주면 상관없겠지만, 조금이라도 거슬리게 나오면…….」
“잘라내야죠.”
오 실장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미 서로 사전에 충분히 상의한 탓에 긴말은 필요 없었다.
「우리 쪽 지분, 과반은 넘었나?」
“아직입니다만…… 본부장님 16%, 한별 손해보험 앞으로 12%, 한별 장학 재단 앞으로 12%, 그리고 회장님 앞으로 8% 해서 저희 쪽이 총 48%를 쥐고 있습니다.”
「금방이군. 아무튼, 조금만 더 수고해줘. 아시다시피 한별 던전이 성공하려면 오 실장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니. 아… 이젠 이사라고 불러야 하나.」
“하하하! 그럼 저도 이제 사장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벌써부터 설레발을 치는 대화가 오가며 둘은 성공을 확신했다.
똑똑―.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
“저… 실장님.”
1팀의 문소연 팀장이 대뜸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예……. 지금 직원 한 명이 찾아와서… 예예,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오재엽 실장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제가 들어와도 좋다고 했던가요?”
“아… 죄,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
“급한 건 급한 거고, 예의는 지켜주십시오.”
“네, 네…….”
오 실장은 혹시 통화 내용이 들렸을까 하는 불안함에 날카롭게 쏘아붙여 무마하려 했다.
다행히 먹힌 듯, 문소연 팀장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뭡니까?”
기세를 잡은 오 실장이 본론을 물었다.
“저 내일 병가 좀 쓸 수 있을까요?”
“병가? 갑자기요?”
“네…… 요즘 너무 무리했는지 몸이 안 좋아서…….”
“하아.”
오 실장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소연 씨만 무리했어요?”
“네, 네?”
“소연 씨만 야근했냐고요. 직원들 모두 힘든데 병가를 쓰면 소연 씨 일은 누가 대신 합니까. 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그녀의 고개가 푹 떨어진다.
하지만 오 실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쓸 거면 최소한 3일 전엔 말해주셔야 일정을 조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병가를 전날 와서 신청하나요.”
“죄, 죄송합니다.”
“암튼 내일은 안 되니까 일단 돌아가시고…….”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나 했다.
쾅―!
“개염병 지랄을 떨고 있네, 시발놈이.”
문이 부서질 듯한 소리와 함께 귀를 의심하게 하는 거친 언성이 들렸다.
입에 걸레라도 문 건지, 격한 발언과 함께 등장한 사람은 3팀의 한유빈 팀장이었다.
“……지금 뭐라 그러셨습니까?”
“시발놈이라고 했습니다. 시발놈아, 아파서 병가 쓰겠다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그럼 뭐, 아플 걸 예상하고 쓸까?”
“그쪽과는 아무 상관 없을 텐데요. 왜 유빈 씨가 나서는 겁니까?”
“듣던 사람 복장 터지게 생겼는데, 그럼 시발 참고 있을까요? 지금 당신 이러는 거, 대표도 알고 있습니까?”
“그건 그쪽이 걱정할 사항이 아닌…….”
쾅―!!
오 실장의 눈앞에서 책상이 두 동강 났다.
“내가 요즘 화낼 일이 별로 없었는데, 굴러들어온 버러지 새끼가 간만에 야마 제대로 돌게 하네.”
“당신……실수하시는 겁니다.”
“실수고 나발이고 당장 대표 불러와.”
한유빈은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기세였다.
물론 이 정도 협박에 말릴 오재엽이 아니었다.
“본사의 경영 및 회계를 비롯한 사내 권한 대부분을 저에게 위임해주셨습니다. 그 말은 인사권도 제게 있다는 말이죠.”
“……뭐?”
“한유빈 씨는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유는…… 뭐 본인이 가장 잘 알겠죠?”
“하, 하하하!”
한유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날 자르면 밖에서 나 어떻게 보려 그래?”
그녀가 바짝 앞으로 다가갔다. 기세로 억누를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모욕에 협박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시는군요. 이렇게 되면 누가 더 고생할 거라 생각합니까?”
“……!”
그가 보여준 핸드폰엔 음성 녹음 기능이 켜져 있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대표님만 곤란하실 겁니다.”
“지금 협박하냐?”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겠죠. 어떻게, 협박해볼까요, 아니면 그냥 곱게 나가실래요?”
“…….”
한유빈은 이내 작게 미소를 지으며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리곤 문을 쿵 차며 나갔다.
그 뒤를 문소연이 걱정스레 헐레벌떡 따라갔다.
다시금 조용해진 사무실.
오재엽 실장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됐다.
안 그래도 제일 눈엣가시였던 녀석이었는데…… 스스로 목을 들이밀다니.
한유빈만 내보낸다면 더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이는 없다.
무능한 대표.
멍청한 직원들.
이젠 정말 때가 됐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한별 던전으로 흡수할 때가.
***
“이건 말도 안 돼요!!”
이아영 실장이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멋대로 남의 회사 직원을 자르는 게 어디 있어요?! 주객전도도 정도가 있지!!”
“…….”
나는 말을 아꼈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대놓고 활개를 칠 줄은 몰랐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이건 정말 아니에요. 수당도 제대로 안 주면서 죽어라 굴리는 것도 참았는데…… 이건 선을 넘었어요! 투자금 다 토해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식 당장 돌려보내야…….”
“일단 진정하시죠. 말처럼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하게 생겼어요?!”
진정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회사 망하라고 제사라도 지낼 심산인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나라고 좋아서 내버려두는 게 아니다.
이미 회사도 위기를 넘겼겠다, 더는 데리고 있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지금 우리 회사 주식 지분이 어떻게 됩니까?”
“……당신이 34%, 제가 9%, 나머진 외부 기업들이에요. 그건 왜요?”
“그중에 한별 그룹 지분은요.”
“오늘 기준으로 48%를 넘겼어요.”
“내일이면 과반을 넘기겠군요.”
“…….”
이아영 실장은 그제야 내가 뭘 말하려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 실장…… 아니, 한별 그룹에 반기를 들었다간 내 모가지만 날아갈 겁니다.”
이아영 실장은 아까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듣자 하니 내일부터 민영화가 시범 운영된다더군요. 그에 맞춰 저번에 만났던 하성태 본부장이 한별 던전이라는 새로운 계열사를 만들었고요.”
“……그런데요?”
“아마 본격적으로 저희를 본인들 회사와 전속으로 계약하려고 들 겁니다. 뭐, 말이 전속 계약이지 실질적으로는 한별 던전에 흡수되는 거나 다름이 없겠죠.”
“설마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은 아니죠?”
“그럼 어쩌겠습니까. 말했듯이 반기를 들면 제가 잘릴 텐데.”
현재로선 둘 중의 하나다.
대표 자리를 유지한 채 개가 되느냐, 아니면 대표직에서 내려오느냐.
물론,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표직을 내려놓는 건 생각할 가치도 없다.
물론 저쪽이 원하는 대로 개가 되는 순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겠지.
당연히 해외 지부 사업도 수포로 돌아간다.
“그럼 어떡해요……. 방법이 없는 거예요?”
“뭐, 없겠습니까?”
어느 상황이든 방법은 있긴 마련이다.
“우리도 백기사를 구해야죠.”
핸드폰을 꺼내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렸다.
“김준웁니다. 예, 다른 게 아니라…….”
한동안 통화를 이어나갔다.
이미 생각해놓은 거긴 해도 실제로 전화할 곳이 많다 보니 시간이 좀 걸렸다.
겨우 모든 연락을 마친 후, 나는 멍하니 기다리는 이아영 실장에게 입을 열었다.
“우리도 슬슬 준비해봅시다.”
단물은 다 빼먹은 것 같으니, 이젠 때가 됐다.
꼬리를 자를 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