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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퇴근한 늦은 저녁.
카르마 코퍼레이션 사무실.
불이 모두 꺼져 있는 가운데 한 자리의 모니터 불빛만이 은은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시발…….’
홀로 모니터 화면에 집중하던 임동빈이 혀를 찼다.
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무실에 보안 시스템은 아직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덕분에 몰래 들어오는 것까지야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무것도 없잖아…….’
이아영 실장의 컴퓨터로 외부 지원금 내역서를 찾아보는 중이었지만, 이렇다 할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해봤자 청소 장비 업체에서 장비 몇 개 지원받은 것과 몇몇 중견 기업에서 스타트업 지원을 받은 게 전부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임동빈이 답답한 마음에 손톱을 깨물었다.
설마 최호성 그놈, 심증만으로 캐보라고 한 건가?
아무것도 없는데, 확인차 부탁한 거야?
아니…… 최소한 최호성은 도박할 양반은 아니다. 분명 뭔가를 찾았으니까 부탁을 한 거겠지.
임동빈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복귀는 물 건너간다. 또다시 밑바닥을 전전해야 한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찾아야 한다.
‘다른 놈한테 맡겨 봐야겠군.’
혹시 몰라 챙겨온 USB를 본체에 꽂았다.
몇 분 후, 백업이 완료된 USB를 챙겨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나와 이아영 실장이 출근하자 건물 경비원이 급하게 우리를 찾았다.
밤늦게 어떤 직원이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근데 행동거지가 수상했다.
그러한 보고와 함께 CCTV 화면을 보여 주었다.
임동빈이 어젯밤 한 일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이아영 실장은 곧바로 자신의 컴퓨터를 확인했다.
“어떻습니까?”
“아주 깔끔하게 털어갔네요.”
뭐,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애초에 털어가라고 보안 시스템도 설치하지 않은 거니까.
“이 정도면 확실히 증거를 찾을 수 있겠죠?”
“뭐, 외부 지원금 내역은 조작해놔서 아무것도 없겠지만, 계좌 내역은 조작이 안 되니까요. 거기까지 털 수 있으면 증거는 빼박이죠.”
“계좌 내역을 어떻게 텁니까? 영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뭔지 알아요?”
이아영 실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공용 컴퓨터로 은행 업무를 보는 거예요. 뭐, 제 경우엔 일부러 그랬지만.”
“……일부러 기록을 남겼다는 겁니까?”
“당연하죠. 전문가한테 가져다주면 아이디, 비밀번호, 공인인증서까지 싹 다 털어줄 거예요. 그러면 뭐…….”
“계좌 내역 털리는 건 시간 문제겠군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일이 임동빈 팀장 손에 넘어간 이상 이젠 정말 우리 손을 떠났어요.”
“압니다. 뭐, 그놈들이 예상대로 움직여주길 바라야죠. 우리 직원들한테도 말해놓으셨습니까?”
“네. 다음 달부터 공사가 있으니 며칠 휴가 좀 갔다 오라고 했어요. 다들 좋아하죠, 뭐.”
“잘했습니다.”
옅은 한숨과 함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사실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물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악물고 키워놓은 본부를 내 손으로 끌어내리는 게 아닌가.
아마 이번 게이트가 터지면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던 반 협회장 세력이 이때다 싶어 들고 일어설 것이다.
서민철을 비롯한 각 지부의 인사들이 움직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협회장을 포함해 나와 유착 관계가 있었던 모두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물론 김민주도.
아마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지부로 날려 보내겠지.
그렇게 되면 협회는 한동안 텅 빈 상자가 될 것이다.
그때라면 리젠 던전이 출현해도 협회 전체의 피해는 줄일 수 있다.
“……저.”
이아영 실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뭡니까?”
굉장히 묘한 분위기 속, 묘한 목소리가 들이닥쳤다.
“그… 당신 말이에요.”
말 꺼내기가 유독 조심스러워 보였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예?”
“한 달 뒤에 던전이 출현할 거라는 거 말이에요. 솔직히 혜안이나 짐작 수준을 넘어서…… 이 정도면 그냥 예지잖아요.”
“…….”
갑자기 훅 들어오네.
“여태까지 말은 안 했지만, 본부에 있을 때도 그랬어요. 종종 이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니까요?”
꼭 예전에 한 번 겪었던 사람처럼.
그녀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생에 살해당하고 10년 전으로 회귀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업보라는 스킬을 해제해야 한다.
솔직히 나조차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그녀라면 어떨까.
믿을지 아닐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 진지하게 듣긴 할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간 같이 해온 것도 있고, 실력만큼이나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굳이 몰라도 될 걸 알 필요가 있을까.
그 때문에 위험에 빠지면 오히려 도움받기가 더 힘들어질지 모른다.
“뭐…….”
나는 잠시 망설이던 끝에.
“제 업보입니다.”
그냥 그런 대답만을 내놓았다.
그녀는 농담이라고 생각한 건지 피식 웃음을 뱉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무슨 업보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확실히 이전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도 않은데…….
과연 이게 업보이긴 한 걸까.
“그런데 뭐… 요즘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
서울 삼성동 인근 그린 던전.
작전 1팀과 함께 첫 파견을 나온 임동빈은, 던전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젯밤 백업한 데이터는 실력 있는 놈한테 맡겨 놨다.
몇 년 전까지 통제팀에서 일하던 놈이었지만 내부 시스템을 해킹해서 민간 길드에 팔아먹으려다 적발돼 현재 백수인 녀석이다.
‘실력은 확실한 놈이니 뭐라도 건져주겠지. 건덕지라도 나오면 바로 최호성한테…….’
아니, 아니지.
그 인간을 뭘 믿고 바로 건네줘.
일단은 쥐고 있다가 확실하게 복귀시켜주면 그때 가서 주는 게 맞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그때.
“동빈 씨! 집중해주세요!”
1팀장 문소연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새 보스 방에 들어선 뒤였다.
“희영 씨, 약품 농도 맞춰주세요.”
“네!”
“상호 씨는 외벽 관리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해체는 동빈 씨가 해주세요. 할 수 있으시겠죠?”
“네, 뭐…….”
“그럼 해체해서 부산물 잘 담아주세요. 나중에 잊지 말고 꼭 가지고 나가시고요.”
임동빈은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지시를 내린 그녀를 몇 번 흘겼다.
문소연.
자신이 작전팀장이던 당시 청소팀의 막내.
공동 프로젝트 당시엔 자신이 현장 책임자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정반대가 됐다.
무력감과 굴욕감.
이 기분은 느껴보지 못한 놈이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임동빈은 이를 갈며 어기적어기적 몬스터 사체로 향했다.
슬라임 계열 몬스터.
크지는 않았지만, 토벌 당시 대미지를 많이 입어서인지 부산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슬라임이면… 단일 해체는 어렵겠고. 그러면 분할 해체해서 포장한다고 했나…?’
그간 교육받았던 내용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올랐고, 동시에 자연스레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슬라임 계열이면 독성이 강하니까… 아 씨, 독성이 강한 몬스터는 어떻게 처리한다고 했더라. ……아, 맞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임동빈의 머릿속엔 조금 전 느꼈던 기분이나 증거 자료 같은 잡생각이 점점 사라져갔다.
그 대신 오로지 눈앞에 놓인 몬스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집중했다.
“후……. 대충 마무리된 것 같네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작업이 끝나 있었다.
“이제 다들 장비 챙겨서 나갈까요?”
문소연이 소매로 땀을 훔치며 말했다.
고된 작업이었음에도 여전히 미소 띤 얼굴.
임동빈에게 그 웃음은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놀리는 비웃음으로 보였다.
그래, 한때 작전팀장이었던 자신을 손가락 하나로 부려먹고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아니면 뭐, 그때 당한 거 복수라도 하는 심정일 수도 있고.’
이 바닥은 철저한 약육강식이다.
그거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밑바닥을 굴러보니 더욱 피부에 와 닿았다.
지금 약자는 본인, 그리고 강자는 저 여자다.
저 여자 또한 그걸 알고 있겠지.
임동빈의 불편한 심기는 작업을 마치고 던전을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던전을 나와 마지막 작업 결산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동빈 씨.”
“네?”
문소연이 퍽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산물 어디 있어요……?”
“아, 여기에…….”
고개를 틀어 뒤를 바라봤지만, 텅 빈 바닥만 보였다.
임동빈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그제야 부산물을 포장해 놓은 봉투를 던전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빨리 돌아가서 수거해오죠.”
재빨리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따라 모든 팀원이 다시 던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던전 입구에 다다르자…….
“하아…….”
문소연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
“뭐라고요?”
문소연과 임동빈은 작전 4팀장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부산물 수거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다시 수거하려 했지만 이미 던전이…… 닫혀버렸습니다.”
“아니, 유명한 업체라고 해서 믿고 맡긴 건데 이게 대체 무슨…….”
작전 4팀장, 추지연이 기가 차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당신이 실수한 거예요?”
“…….”
임동빈은 대답을 피했다.
팀장 외에 같이 보고하러 온 인원이 있다면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녀는 임동빈을 잘 알고 있다.
그가 한창 본부에서 날렸을 때 본부 헌터로 일했었으니까.
실적에 눈이 돌아서 양아치 짓을 일삼았던 최악의 팀장.
굉장히 아니꼬운 인간이었지만, 당시 작전 2팀장이라는 직급이었기에 대놓고 무어라 할 순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장난해요? 무슨 작전팀장 출신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합니까?”
“…….”
“대체 무슨 정신으로 일을 하는 거예요? 네? 가만히 있지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보세요!”
날 선 감정에 묘한 통쾌함이 섞여 있었다.
임동빈은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무어라 입을 열 명분이 없었다.
과거야 어쨌든 현재 저쪽이 갑이었고, 그는 을이었다. 게다가 문제를 일으킨 건 이쪽이다.
그저 지금은 참는 수밖에.
“하여간 당신 예전부터 그랬어. 능력도 없이 실적이나 탐내고 말이야.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팀장 달고 떵떵거릴 땐 좋았지?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미청소 던전 나오면 당신이 단독 토벌이라도 할…….”
“제가 실수한 거예요.”
과거까지 들먹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모욕을 한 목소리가 잘라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문소연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선 것이다.
“오늘 첫 파견을 나오신 분이에요. 당연히 실수할 수 있다는 걸 현장 책임자인 제가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팀장인 제게 해주세요.”
격양되었던 추지연은 조금 당황했다.
상대가 임동빈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진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는 걸,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한편 그녀보다 더 당황한 이가 있었으니.
‘……뭐야 저건.’
바로 임동빈이었다.
왜 굳이 부하를 감싸고도는 건지, 그로선 퍽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번 파견 비용은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추후 미청소 던전 출현 시 토벌 또한 지원해드릴게요.”
“……그쪽은 그런 일도 가능하다고요?”
“네! 최근 꽤 실력 있는 길드를 모두 영입했거든요.”
상대가 이리 나오니 추지연 팀장의 기가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감정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그리 화낼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청소는 완료했고, 단순히 모아둔 부산물만 수거하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 포장까지 되어 있는 상태라면 가스가 샐 염려도 없다.
최대한 융통성을 발휘하자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저쪽에서 환불과 토벌 지원까지 약속한 이상, 더 이상 화를 낼 명분은 없었다.
하지만 문소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갔다.
“거듭 죄송합니다. 다신 이런 실수 없을 거예요. 대표님께도 이번 일에 대해선 빠짐없이 보고 드리겠습니다. 혹시 윗선에 보고하셔야 하는 일이라면 제 책임으로 말씀해주세요.”
“…….”
추지연 팀장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쪽에서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도 똑같은 실수가 반복되면 그땐 본부장님께 보고해서 계약을 해지할 거니, 그렇게 알아두세요.”
“물론입니다.”
그 말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작전 4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하아…….”
문소연은 한꺼번에 긴장이 몰려온 건지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아까의 당당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그녀는 되려 임동빈을 먼저 위로했다.
“아까 이야기는 너무 귀담아듣지 마세요. 옛날 일은 옛날 일이고, 일을 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
한참은 어린 녀석이 자신을 위로하는 상황이라니.
크게 자존심 상할 일이었지만, 임동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