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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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우 씨? 준우 씨!”
“예, 예?”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옛 기억에 잠시 멍하니 있던 그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아영이 코앞에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으면 말을 하던가.”
“아뇨. 옛날 생각이 좀 나서.”
“뭔 일이 있었길래 표정이…….”
살짝 고개를 돌리니 모니터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꽤나 살벌한 얼굴에 나 또한 흠칫했다.
누가 보면 벌써 큰일 난 줄 알겠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 시선은 연신 달력으로 향했다.
회귀 전, 갑작스럽게 닥쳤던 재앙이 불과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리젠 던전.
정식 명칭은 불안정 차원 생성 던전.
하나의 갇힌 공간에 정해진 몬스터가 상주하고 있는 일반 던전과 다르게 차원이 갈라져 계속해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특수 던전.
전 세계 던전 역사상 단 두 번밖에 출현하지 않은 던전으로, 40년 전 처음 남미에서 출현했을 당시 토벌 시스템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기에 정보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특수 던전이니, 나발이니 다른 건 다 제쳐 두고라도 이 던전은 나에게 있어 매우 특별한 곳이다.
현역 시절, 내가 유일하게 토벌에 실패했던 던전이었으니까.
‘던전 진입은커녕 탈출하는 몬스터를 막기에도 급급했지…….’
나중에야 분석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리젠 던전에는 애초에 보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보스만 처리하면 던전이 닫히는 일반적인 구조가 아니다. 그저 끊임없이 쏟아지는 몬스터를 막아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애초에 토벌이 불가능한 던전이었고, 전 세계 최초로 실질적 토벌 불가 판정인 ‘오메가’ 등급을 받았다.
사실 차원 자체가 불안정한 던전이었기에 딱 5일이면 자연히 소멸했지만…… 그 5일 동안 해당 던전이 일으킨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일반 시민들은 물론이고 본부에서만 전체 작전팀원 중 40%가 사망하는, 그야말로 사상 초유의 재앙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회귀 전 나는 그때 일을 기점으로 크게 상승세를 탔다.
최전선이니, 최종 병기니 하는 별명이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S랭크로 승급한 것도 그 직후였다.
그때부턴 거의 승승장구했다고 봐야겠지.
다만, 내 상승세와는 다르게 협회는 그 일을 기점으로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뭐, 그런 사건을 겪고도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없긴 했지만.
겨우 숨통이 붙어 있는 정도로 정상적인 운영은 힘들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국제 협회가 내사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엔 많은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타 협회 헌터는 절대 스카우트하지 않는 그들이 나를 스카우트 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공식적으로 인수하지 않았을 뿐, 거의 국제 협회의 꼭두각시였으니까.
‘뭐, 그땐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현재 내가 청소팀 파견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해도 결국 진짜 목적은 따로 있지 않은가.
국제 협회의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지금, 그들에게 덜미를 잡힐 만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
‘어떻게든 고비를 넘겨야 할 텐데…….’
문제는… 지금으로선 앞으로의 사태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리젠 던전을 막으려면 최소한 30개 이상의 작전팀을 소집해야 한다.
하지만 법적으로 그만한 작전팀을 소집하기 위해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긴급 재난 사태를 발표했을 때만 가능하다.
결국, 리젠 던전이 출현한 이후에야 소집령을 내릴 수 있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이미 늦은 후다.
하루 이틀 만에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하겠지.
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고 있던 그때.
똑똑―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오늘 면접 잡혀 있었습니까?”
“아뇨.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이아영이 의아한 목소리를 내던 찰나, 사무실 문이 덜컥 열렸다.
“저…….”
조심스레 들어온 남자를 보자마자 누구랄 것 없이 눈이 동그래졌다.
“아직 청소부 지원할 수 있습니까…?”
“…….”
“…….”
말문이 막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그 지원자는 다름 아닌, 전 서울 본부 작전 2팀장.
임동빈이었다.
***
서울 작전 본부장실.
‘X 됐다. 시발.’
최호성 본부장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결국, 순천 지부에 연수원이 들어섰다.
심현수 그놈이 힘도 못 써보고 떨어져 나간 덕분에 며칠간 쳐놓은 공사가 도루묵이 되어버린 것이다.
연수원 건설 건이 언론을 타자 성남 지부장과 가계약을 맺었던 건설사 그리고 미리 언질을 놓았던 온갖 업체들에서 전화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받은 건 뱉어내겠다고 그들을 진정시켰지만…… 사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최호성 말만 믿고 각 업체에서 이미 사업을 벌여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업이 드랍 되자마자 각 업체는 그 모든 위약금을 최호성에게 청구했다.
사실 그것들이 모두 최호성의 책임이라곤 할 수 없지만, 물어주지 않으면 리베이트를 챙긴 걸 폭로하겠다고 나오는 이상 최호성으로서도 도리가 없었다.
문제는 그 금액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거다.
‘시발…….’
최호성 본부장의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심현수 그 새끼 한 명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도움이 되진 못할망정 최소한 본인 일에 재는 뿌리지 말아야 할 거 아닌가.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쓸었다.
‘이제 어떡하냐…….’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사비로 물어주든 입 다물고 버티다가 비리를 폭로 당하든, 어느 쪽이든 길바닥에 나앉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예산에 손을 대는 수밖에.
‘이것까지 걸리면 진짜 끝이긴 한데…….’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러나저러나 X될 바에야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대놓고 예산을 빼돌릴 순 없고, 적당히 확인하기 힘들고 내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업을 찾아봐야겠는데…….
최호성은 컴퓨터를 켜 내부 전산망에서 이런저런 문서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근 예산 편성 내역에서 흥미로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외부 사업 지원?’
이전에 얼핏 들은 적은 있다.
최근 협회장이 직접 추진한 안건으로, 협회와 관련된 외부 업체를 지원해서 다양한 분야의 발전을 도모하자는 취지의 지원 사업.
뭐, 당시엔 사실 별로 관심도 없었고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닌 내용이라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책정된 예산이 왜 이렇게 많아…?’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뭔가 이상하다.
뭐 대체 얼마나 지원을 해주려고 수십억가량 예산이 책정된 건가.
최호성은 해당 예산으로 지원 중인 업체 목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주에 부산물 처리 시설.
인천에 장비 및 재료 가공 하청 업체.
수원에 아이템 수출입 담당 운송 회사.
그리고 서울에 청소팀 파견 업체.
‘카르마 코퍼레이션…….’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대한 지원금이 타 사의 거의 3배가 넘게 책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순천 지부에서 해당 업체와 심현수 사이에 마찰이 생기자 갑작스럽게 연수원 건설이 추진되지 않았던가.
마치 어떤 거물이 직통으로 윗선에 지시를 내린 것처럼.
그에 맞물려 갑자기 위에서 작전 1팀 파견 지시가 내려왔고……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나름 순천 바닥을 꽉 잡고 있던 길드가 통째로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흡수되었다.
이걸 과연 우연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그 업체와 협회 윗선이 유착 관계가 있는 건…….’
최호성 지부장은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검색했다.
기사도 확인해 보고 공식 홈페이지도 검색해봤지만, 어찌 된 건지 업체 대표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친분이 있는 지부장들에게도 연락을 돌려봤지만, 계약은 실장이라는 사람이 진행해 그들 역시 대표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마치 작정하고 정체를 숨기려는 건가 싶을 정도.
그렇게 한참 동안 조사를 이어가던 그때.
“허…….”
드디어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대표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 봐라…?”
최호성 본부장이 헛웃음을 뱉었다.
김준우.
익숙한 이름 석 자가 눈에 들어오자 최호성의 머릿속에서 아귀가 맞춰졌다.
분명하다.
지금 협회장은 지위를 이용해 비밀리에 김준우를 푸시해 주고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의도치 않게 대물이 걸렸다.
‘이거 잘하면…….’
언론에서 신격화 되고 있는 김준우 전 본부장과 현 협회장의 비리.
이게 단순히 협회장 목이 날아가는 것만으론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본부 전체가 풍비박산이 나겠지.
그러니 이걸 가지고 협회장과 딜을 한다면…….
수습할 수 있다.
수습하는 걸 넘어서 잘만 하면 본부를 손에 쥘 수도 있다.
최호성 본부장의 입가로 희미하게 미소가 번져갔다.
하지만 딜을 하기 위해선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지급되는 지원금이 타 사보다 많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푸시를 해주고 있는 게 맞는다면 절대 이것만 있진 않겠지. 분명 알게 모르게 더 새어 나가는 게 있을 것이다.
보다 확실하고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협회 내부에서 알아보는 건 한계가 있고…… 한다면 그쪽 업체 쪽에서 알아봐야 하겠지.
“내부자가 필요한데…….”
그쪽 직원 놈들을 꼬드겨볼까?
아니. 그건 의미가 없다.
최근 구조조정 당한 청소부들이 죄다 그 업체로 가지 않았던가.
한때 김준우 덕을 톡톡히 본 놈들이 돈 몇 푼 쥐여 준다고 움직이려 들진 않겠지.
무엇보다 이쪽 꼬리가 잡힐지도 모른다.
준비 단계에서 들통나면 시작도 못 해보고 죽을 쑤게 될 테니.
‘그렇다면…….’
최호성은 핸드폰을 들었다.
“어, 오랜만이다. 잘 지내냐?”
「…선배님께서 웬일입니까?」
전 작전 2팀장, 임동빈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일 하나만 도와줄 수 있나 싶어서.”
「……저 협회 나간 이후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고 있습니다. 제가 뭔 힘이 있다고 선배님을 도와드리겠습니까.」
“그렇겠지.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땐 내 코가 석 자여서…… 미안하다. 그래도 인마, 잘만 해주면 너 복귀할 수도 있어.”
「…….」
침묵이 이어지길 잠시.
「어떤 일입니까?」
“어려운 거 아니야. 그 요즘에 청소팀 파견 업체 유행하고 있는 거 알지?”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너 거기 좀 들어가서 자료만 몇 개만 빼 와라.”
최호성의 눈빛이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