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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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등장에 세미나실에 있던 모든 임원이 아연실색했다.
“하여간 목청들은 아직도 그대로네.”
박인범 협회장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주위를 쭉 둘러본 그는 이두식 이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랜만이다, 이두식이. 살 좀 빠졌나?”
“…예. 덕분에요.”
박인범 협회장은 피식, 실소를 뱉었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이두식 이사는 애써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그조차도 협회장이 직접 행차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까닭이었다.
칼을 쥐여준다곤 했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협회장을 불러올 줄이야.
‘김준우, 이놈 자식이… 라인 아니라고 잡아뗄 땐 언제고…….’
이두식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내가 없는 동안 어지간히도 개판이 됐네, 그래.”
이윽고 박인범 협회장이 절뚝거리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빌어먹던 놈들 주워다가 먹여주고 재워주니까, 이젠 안방 비웠다고 바로 주인 행세하려 들고 말이야.”
“…….”
“…….”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때였다.
“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실 일이 아닙니다, 협회장님. 저흰 엄연히 규정에 따라 진행했을 뿐입니다!”
보다 못한 송철식 이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박인범 협회장이 지팡이를 치켜들며 그를 가리켰다.
“규정은 염병. 해임 당사자한테 통보하고 안건을 올리는 게 순서 아니냐?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 봐?”
“억지 부리지 마십쇼! 3년이 넘도록 어디 계시는지 아무도 모르고, 연락도 안 되는데 어떻게 통보를 합니까!”
“아무도 몰랐다…?”
“예!”
송철식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박인범 협회장은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그 청소부 놈은 어떻게 찾아왔는데?”
“……청소부?”
“처, 청소부라뇨?”
박인범이 말하자 모두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
그런 와중에 서민철 홀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최근 4개월 동안 ‘그 청소부 놈’ 소리만 수백 번을 들은 서민철은 그것이 누굴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설마……!’
서민철은 손톱을 깨물었다.
이수용이 김준우의 정보를 캐온 이후로도 혹시나 싶어 몇 번을 더 조사했다.
결과는 여전히 마찬가지로 협회장과의 어떤 접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런 접점도 없는 놈이 어떻게 임원들도 모르는 협회장을 찾아간 건가.
서민철은 극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잠깐만.”
그때, 이두식 이사가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협회장님과 연락 가능한 수단이 있었음에도 해임 통보 없이 안건을 올렸다는 뜻입니까?”
“그……런 것 같군요.”
장대현 의장의 표정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미 투표 결과도 나왔잖습니까! 끝난 안건이니 빨리 결의하고 다음 거로 넘어가시죠!”
송철식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장대현 의장이 박인범 협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당연한 소리지만, 투표 집계가 완료된 직후부터 이미 협회장은 해임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결의를 밀어붙이지 못할 것도 없다.
다만, 연락할 수단이 있었음에도 통보 절차를 무시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투표 결과에 상관없이 안건을 철회할 수 있다.
물론 그 판단을 내리는 건 오롯이 장대현 의장의 몫이었다.
하지만 한 번의 선택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었기에, 장대현 의장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정을 못 내리는 건 비단 장대현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임원들 또한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고민했다.
협회장이 딱 맞게 등장했다는 건, 그와 내통하는 인물이 본부 내에 숨어 있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까지 협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또한 알고 있다는 소리겠지.
어쩌면 그 인물과 손을 잡고 일부러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본 것일 수도 있었다.
자신과 협회의 적을 가려내기 위해서.
‘송철식, 그 새끼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모든 임원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세미나실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선택해야 했다.
밀고 나갈지, 아니면 이제라도 노선을 틀어야 할지.
“하, 하하. 상정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나 봅니다. 우린 그것도 모르고.”
그때, 임원 중 한 명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 거참 일 처리를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떡합니까. 난 당연히 통보 드린 줄 알았는데.”
“이거 이러면 찬성 안 했지!”
“규정 위반 안건이잖습니까. 그냥 없던 거로 하시죠?”
뒤를 따라 몇 명이 황급히 노선을 바꿨다.
“잠깐만요! 통보 절차 생략했다고 정식 안건을 철회하자고요?”
“우리 쪽에서도 어떻게든 연락이 닿도록 노력했습니다! 반년 전엔 전담팀까지 만들어진 거 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습니다!”
“의장님! 일단 계속 진행하세요!”
하지만 반대쪽도 만만치 않았다.
장대현 의장은 머리가 아파 왔다.
의사봉을 만지작거리며 선택을 머뭇거리고 있자니, 송철식 이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협회장님도 양심이 있으시면 이러면 안 됩니다! 3년 넘게 잠적해 계시다가 해임 안건 올라오니까, 이제 와서 복귀하시겠다니요!”
그 말에는 찬성파, 반대파 할 것 없이 모두가 속으로 동조했다.
여기저기서 스파크가 난무하던 세미나실이 침묵에 잠겼다.
박인범 협회장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내가 왜 잠수를 탔는지, 왜 복귀를 한 건지는 니들이 알 거 없고.”
하지만 그는 모두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장대현이,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
협회장이 떠보듯 의장에게 의사를 물었다.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카리스마 앞에 기세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안건을… 철회하겠습니다.”
땅땅땅―
의사봉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인범 협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공식적으로 복귀도 했으니, 이제 내 얘기 좀 해도 되지? 많은 거 필요 없고, 니들은 딱 하나만 알면 돼.”
협회장은 임원들을 주욱 훑었다.
“이제 팀은 안중에도 없이 돈만 축내는 버러지들은 내 협회에 필요 없다는 거.”
그 한 마디에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고로 난 오늘부로 기획본부를 만들어서 내부적으로 대대적인 개편을 추진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 책임자로는…….”
이윽고 박인범 협회장의 시선이 한 명에게 꽂혔다.
“어때, 이두식이. 할 수 있겠냐?”
“꼭 그런 건 저한테 맡기십니다.”
“인마. 내가 복귀한 이상 넌 퇴임 확정이야. 이런 거라도 해야지 협회에 붙어 있지!”
이두식 이사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세미나실에 있는 모든 임원은 직감했다.
자신들의 턱밑까지 칼이 들어왔음을.
***
이사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나를 포함한 청소 3팀은 오전 작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본부 내 구내식당을 찾았다.
그런데 식당 입구 앞에서 한 직원이 우리를 막아섰다. 그리곤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뭐라고요?”
“구내식당 이용 안 되신다고요.”
그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문소연과 한상혁 또한 퍽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갑자기…?”
“위에서 방침이 내려왔어요.”
“어디 위에서요.”
“말하면 아세요?”
직원은 대꾸조차 귀찮다는 투였다.
보아하니 내가 아무 끈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미 싹 퍼진 모양이었다.
뭐, 예상한 바이긴 했는데…….
기분이 참 뭣 같네.
“가요, 준우 씨. 나가서 먹으면 되죠.”
“그래. 솔직히 구내식당 밥 졸라 별로였어.”
가만히 직원을 노려보고 있자 문소연과 한상혁이 나를 잡아끌었다.
어차피 이사회가 끝날 때까진 문제를 일으킬 수도 없었기에 단념하고 등을 돌린 그때.
“에헤이. 다 같이 일하는 입장에 그러면 쓰나.”
식당 안에서 이수용 팀장이 나타났다.
“괜찮아. 들어와, 들어와. 어차피 이 시간엔 밖에서 먹을 데도 없잖아.”
그리곤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예, 뭐.”
저의를 이해할 수 없는 호의였지만… 나는 이내 별다른 대꾸 없이 식당으로 들어섰고, 문소연과 한상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점심 시간대 구내식당은 거의 만석이었다. 물론 그중에 청소팀은 없었다. 미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식판을 가지고 이수용과 마주 앉았다.
“그래서, 대체 위에서 무슨 공지가 내려온 겁니까?”
“아까 들은 그대로지. 이제 청소팀은 구내식당 이용이 안 돼.”
“어째서죠?”
“다른 팀에서 클레임이 좀 들어왔거든. 냄새나고 더럽다고. 뭐… 솔직히 하루 종일 몬스터 사체 만지고 오는데 좀 그렇잖나.”
저건 또 무슨 개소리야.
헌터는 몬스터 안 만지나?
“그리고 앞으로 작전 2팀의 작전은 우리가 맡을 거야.”
“…왜죠?”
“왜긴 왜야. 대리 기획 적발됐잖나. 아마 팀장도 바뀌겠지.”
“제가 알기론 기획 자체는 김민주가 쓴 게 맞을 텐데요. 조언 정도야 받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걸 왜 나한테 따지나? 감사팀 가서 따져.”
이수용이 젓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자네… 김민주만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나머지도 마찬가지거든. 청소팀도 인원 감축 예정됐고. 뭐,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자네가 협회에 남아 있는 동안에 별로 좋은 꼴 못 볼 거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나가지?”
이내 이수용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을 이었다.
“끈도 없는 새끼가 지금까지 원하는 대로 설쳤으면 충분한 거 아니야?”
“저기요! 지금 그게 무슨…!”
“야.”
문소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이수용이 정색하며 눈을 번뜩였다.
“지금 누구 앞에서 눈을 부라려? 요 며칠 오냐오냐해주니까 내가 병신으로 보이냐?”
동시에 구내식당에 있던 모든 헌터의 시선이 쏠렸다.
“어디 한 마디만 더 끼어들어 봐. 평생, 이 바닥에서 일 못 하게 해줄 테니까.”
“…….”
문소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결국,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한 채 눈을 피하자 이수용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청소부면 청소나 할 것이지.”
이수용은 자신의 식판을 툭 밀쳤고, 음식물이 바닥에 쏟아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그런 의미로 여기 청소하고…….”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짓거리지?”
그때,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이수용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이수용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한 노인네가 서 있었다.
“혀, 협…….”
이수용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한편 박인범 협회장은 관심도 없는 듯, 그를 지나쳐 내게 다가왔다.
며칠 전 봤던 후줄근한 옷가지 대신,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늦지 않게 도착하셨나 보군요.”
“뭐, 덕분에. 방금 막 총회 끝나고 시간 남아서 잠깐 들렸다.”
“서울까지 올라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그냥 들어가서 쉬시지 뭘 여기까지 오십니까. 몸도 편치 않으신 분이.”
“여기까지 온 김에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그랬지. 그런데 뭐… 오길 잘한 것 같군. 덕분에 이런 같잖은 꼴도 보고.”
협회장의 시선이 이수용에게 날아들었다.
그러자 이수용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 오늘 해임 안건이 통과됐을 텐데요? 이제 협회장도 뭣도 아니면서 괜한 간섭 마십시오!”
“소식이 늦구먼. 하긴, 그러니 이딴 애새끼들도 안 할 짓을 하고 있지.”
“협회와 상관도 없는 사람이 어디서……!”
짝―.
협회장의 손등이 이수용의 뺨을 스쳤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에 나 또한 너무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어이, 이수용이.”
협회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지금 누구 앞에서 눈을 부라려?”
“…….”
이수용은 황급히 눈을 피했다.
박인범 협회장은 그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가만히 싸 물고 찌그러져 있어라. 협회에 엉덩이라도 붙이고 싶으면.”
“…….”
꼬리 내린 이수용을 뒤로하고 협회장은 내게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우긴 했군. 아무리 봐도 자네가 이런 대우를 받을 인물은 아닌데.”
“과찬이십니다.”
“또 이런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널리고 널린 게 헌터니, 몇 명 자른다고 문제 될 것도 없고.”
그의 시선이 주변을 향하자 모두가 눈을 내리깔았다.
협회장과 당당하게 눈을 맞출 수 있는 놈은 최소한 이 자리엔 없었다.
“그럼 얼굴도 봤겠다, 이만 간다. 나중에 시간 되면 점심이나 같이 먹지.”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이상하네… 묘하게 친근하단 말이야.”
박인범 협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 넌 바닥에 흘린 거 닦고 가라.”
그렇게 박인범 협회장이 돌아가자 구내식당은 정적에 휩싸였다.
이수용을 포함한 그곳에 있던 모든 헌터는 사고가 정지한 듯 보였지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했다.
협회의 주축이 바뀌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