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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아시안 놈들.”
전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제이슨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도와주겠다고 하면 덥석 받을 것이지, 왜 이렇게 튕겨.”
협상은 영 껄끄럽게 끝났다.
설마하니 상대가 거절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파일만 아니었으면 주제도 모른다며 욕이라도 박았을 텐데, 그러기엔 지금 본인 상황이 무척이나 절박했다.
‘살다 살다 독립 협회한테 로비를 하게 될 줄이야…….’
제이슨이 고개를 뒤로 팍 젖혔다.
아까운 건 말할 것도 없지만… 그나마 10억으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그 정도면 예산 내에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었다.
“클로이.”
이내 생각을 정리한 제이슨이 그녀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다음 주 작전 1팀 일정 파악해서 시간 되는 놈들로 몇 명 차출해놔.”
“1팀이요? 3팀에서 차출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3팀 놈들은 영 못 미더워서 말이지. 한국에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3팀을 데려가.”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정예팀을…….”
클로이가 말끝을 흐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파일을 회수하겠다고 하자마자, 정예팀을 파견하겠다니.
이건 정말 무력이라도 써서 파일을 뺏어오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버려 둬도 될까, 아니면 말려야 할까.
클로이는 망설이던 끝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팀장님, 전에도 말했듯이 다른 나라에서 일을 벌이는 건 지부 입장에서도 위험부담이…….”
“알아, 안다고. 내가 설마 미쳤다고 도시 한복판에서 일을 벌이겠냐.”
던전 안이라면 모를까, 제이슨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그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백만 달러 지급 조건에 1팀까지 파견하려면 예산을 훌쩍 초과할 겁니다.”
“예산은 걱정 마. 루프 던전 수익금 나름 괜찮잖아? 5대5로 나눈다고 해도 대충 메울 수 있어. 무엇보다 시간석도 있고.”
“…….”
사회에 커다란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에 거래 및 양도 금지 품목으로 지정된 ‘뱅크 아이템’ 중 하나.
2차 가공이 금지되어 오로지 연구 목적으로만 취급할 수 있는 시간석은 가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그런 아이템을 가져온다면 상부에서도 예산 따위야 신경도 쓰지 않겠지.
됐다, 빌어먹을 놈. 마음대로 하던가.
클로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니, 더는 무슨 말을 해도 들어 먹지 않을 게 뻔했다.
“아무튼, 시간석은 네가 알아서 신경 써. 어떻게 하든 상관없으니 말이야. 나는 파일만 회수하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등을 돌린 찰나.
클로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방금 통화하신 분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김? 준우 김. 이번 작전 총 책임자라더군.”
“작전팀장인가요?”
“몰라. 더 높아 보이던데. 본부장 아닐까. 그건 왜 물어봐.”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클로이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남기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
이미 해가 저문 시간.
“어, 오늘은 빨리 끝났네?”
“…….”
한유빈이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겨우 집에 도착하자, 드라마를 보고 있던 한상혁이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꼴을 보니 저놈은 이미 한참 전에 퇴근한 모양이었다.
“밥은?”
“안 먹어.”
“잘됐네. 어차피 안 줄 거였는데.”
“…….”
킬킬거리는 웃음소리.
한유빈은 대꾸도 없이 소파 위에 몸을 던졌다.
“…뭐야. 일이 나름 적성에 맞나 봐? 전에는 못 해 먹겠다고 지랄 지랄을 하더니, 요즘은 좀 조용하네?”
“…….”
모르는 소리였다.
한유빈은 적응이 돼서 조용해진 게 아니라, 그저 입을 열 힘조차 없어서 닥치고 있는 것이었다.
“에휴…….”
그녀는 소파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깊게 한숨을 뱉었다.
일주일 동안 그녀가 작업한 던전은 총 33개.
그중 토벌에 참가한 던전만 7개였다.
이런 건 미국 지부에 있었을 때도 겪어본 적 없는 스케줄이었다. 하물며 공식적으로 헌터가 아니니 토벌 수당도 받을 수 없는 입장.
그러니 회의감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김준우…….’
한유빈이 이를 빠득 갈았다.
따지고 보면 본인이 힘든 건 모두 그 자식 때문이지 않던가.
마음 같아선 당장에 따지러 가고 싶다만 실적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일만 시키는 쓰레기라면 마음 놓고 욕이라도 하겠는데, 자기가 봐도 그건 아니었기에 속으로 불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일에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습니까. 피차 뺑이 치는 입장에.
아직도 그 말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중이었다.
계급, 위계, 출신 그리고 인종.
그 무엇으로도 편을 가르지 않고 오로지 일만 중시하는 놈.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는 미국에서도 그런 놈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 하지 않을 한국에서 저런 말을 들을 줄이야.
한유빈은 또다시 습관적으로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쓸데없이 완벽해서는…….’
게다가 말만 번지르르 한 놈도 아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김준우는 업무적으로 완벽에 가까웠다.
물론 채용되기 전에도 본부에서 꽤 능력 있는 놈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간 일하며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니, 그마저도 과소평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전팀 하나를 거의 통째로 운용하질 않나, 지원팀은 거의 전속이질 않나. 하다 하다 통제팀까지 김준우의 말 한마디에 움직였다.
모든 팀이 김준우의 지휘에 군말 없이 움직였고, 또 결과적으로 최고의 효율을 뽑아냈다.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능력 있는 놈이다.
그것도 미국 지부에서 수도 없이 봤던, 실력도 없이 자리만 꿰차고 있는 머저리들보다 훨씬.
그런 생각을 하며 한유빈은 펜던트를 딸깍 열었다. 그 안에는 비슷한 나이대 여성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그 사진을 말없이 바라보길 잠시.
딱, 소리를 내며 펜던트를 닫았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지금 한유빈에게 있어선 말도 안 되는 업무량을 떠넘기는 빌어먹을 상사임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리 그놈의 추천으로 들어온 거라지만… 부려먹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이대로 있다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쓰러질 판국이다.
한유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이번 주까지만 참는다.
어차피 아쉬울 것 없는 입장이다. 이 살인적인 스케줄이 계속 이어진다면, 자신도 굳이 협회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김 팀장’으로 저장된 번호였다.
번호를 보자마자 한유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젠 하다 하다 퇴근하고서도 전화라니.
“…뭐예요.”
한유빈은 최대한 퉁명스럽게 첫마디를 뗐다.
「불쑥 전화해서 미안합니다. 혹시 바쁘십니까?」
“아뇨. 바쁘진 않은데… 왜요?”
「별건 아니고, 다음 주에 큰 작전이 하나 잡혔습니다. 제가 총 책임을 맡고 작전 2팀을 필두로 해서 토벌팀이 꾸려질 것 같은데… 이게 최대한 문제 없이 진행해야 하는 작전이라 한유빈 씨가 참가했으면 좋겠는데…….」
“아니, 또 우리한테 떠넘기는 거예요?”
「떠넘기다뇨. 저도 참가할 거라 옆에서 지원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래도 나름 전직 작전팀장이잖습니까. 경력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든든하니까요.」
“……하.”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소리는 전화기 너머로도 들린 모양이었다.
「싫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러면 일정대로 미청소 던전이랑 청소 작업 진행해주시고…….」
“아직 안 한다고 안 했는데요.”
아차, 싶었는지 한유빈이 다급하게 말을 끊었다.
「그럼 참가할 겁니까? 빨리 결정하세요. 지금 결재 올려야 되니까.」
이 인간이 진짜……!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한유빈은 애써 화를 눌렀다.
그래.
지원 정도라면 뭐, 다른 작업보다야 나으니까.
“……참가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래서, 무슨 작전인데요?”
「그건 당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유빈은 말문이 턱 막혔다.
대체 뭔가. 이 어처구니없는 인간은.
“원래 사람이 그렇게 제멋대로예요? 작전 참가하라고 전화하면서 무슨 작전인지도 안 알려준다고요?”
에휴,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려오길 한 차례.
「알려주면 안 할 것 같아서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전화가 뚝 끊겼다.
“……뭐야?”
한유빈이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김준우냐?”
한유빈이 인상을 팍 구기고 있자니, 한상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
“뭐래냐?”
“다음 주 작전 있다고 참가하래.”
“이야, 어지간히 그놈 마음에 들었나 보네.”
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동시에 한유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뭔 개소리야.”
“김준우 그놈, 뭔 일을 하든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 안 해. 뭐든지 자기 혼자 처리하려고 하거든.”
“그런데.”
이내 한상혁이 고개를 젖혀 한유빈과 눈을 맞췄다.
“그런데는 무슨 그런데야. 그런 인간이 너한테만 일을 시킨다는 게 뭔 뜻이겠냐. 너 존나 예쁨받고 있는 거라니까?”
“……지랄을 한다.”
한유빈이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
작전 2팀 사무실.
“후우…….”
늦은 시간까지 작전 회의를 이어가던 도중, 짧은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유빈 씨가 뭐래요?”
김민주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 대답 안 듣고 끊었어.”
“선생님도 유빈 씨 눈치는 보이나 봐요?”
김민주가 후후 웃는다.
“보이지, 보이기야. 일주일 동안 일을 얼마나 시켰는데, 이젠 미국 지부랑 붙이려고 하는 거 알면 그 성격에 가만히 있겠냐.”
“그래서 선생님도 참가하는 건가요? 유빈 씨 혼자 참가시키기 미안해서?”
“아니. 불안해서.”
“음. 하긴, 유빈 씨는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걔 말고, 다른 놈들이.”
“……네?”
김민주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말한 다른 놈들은 당연히 시간석을 노리고 있는 미국 지부 놈들이었지만, 그 얘기를 직접적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이번 작전은 너나 나나 엄청 중요해. 솔직히 청소부가 총 책임자를 맡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렇죠.”
“만약 조금이라도 문제 생겨봐. 그동안의 실적 끌어안고 절벽 다이빙하는 거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이번 작전에선 그 어떤 문제도 일어나면 안 돼. 토벌은 물론이고 그 외적으로도.”
최대한 뭉뚱그려서 이야기했지만, 어쨌거나 핵심은 같았다.
토벌이 됐건 수익 분배가 됐건, 아니면 아이템 소유권이 됐건.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그 책임은 오롯이 나한테 돌아올 것이다.
차라리 나한테만 돌아오면 다행이지, 지금 작전팀장들 꼬라지로 봐선 청소팀을 싸잡아 걸고넘어질 게 뻔하다.
쌓는 건 어려워도 무너뜨리는 건 쉽다고 했던가.
내가 쌓아 올린 걸 남이 건드리게 둘 순 없는 일이었다.
‘뭐, 문제없이 잘 마무리하면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때 가선 상부도 청소팀 눈치를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나는 이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오랜 시간 회의를 이어가니 여기저기가 쑤셔왔다.
‘어쨌든 문젯거리 하나는 해결했고, 이제 남은 건…….’
작전 당일에 시간석을 빼돌리지 못하게 예의주시하는 것뿐.
이외에는 아무 문제 될 것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