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어떤 이름으로 존재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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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어떤 이름으로 존재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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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어떤 이름으로 존재하든
2022.12.18.
아무리 에트르의 기후가 온화하다고 해도 겨울은 겨울이었고 밤바다는 밤바다였다.
“아. 춥다.”
“뭐? 추워? 이제 와서 추워?”
“……헤헤.”
홀딱 젖은 몸에 뒤늦게 한기가 들이닥쳤다.
리엘라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헤르한의 품 안으로 파고들자,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가 얄밉다는 듯이 눈을 흘겨 뜨면서도 더 강하게 안아 주었다.
리엘라는 그 상태로 헤르한에게 안겨서 저택까지 이동했다.
발바닥의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아서 충분히 걸을 수 있다고 하는데도 헤르한이 고집을 부리는 탓이었다.
흥. 정 그렇다면 계속 고집부리라지, 그러면 자기 팔만 아프지, 나는 좋은걸.
리엘라는 내친김에 더 대놓고 헤르한에게 매달렸다.
하인은 이미 퇴근하고 없었으나 다행히 그가 저녁에 준비해 놓은 온수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리엘라는 곧장 그 따뜻한 물에 목욕할 생각이었다.
물론 헤르한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자신이 리엘라를 직접 씻겨주겠다는 생각만 달랐다.
“폐하.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응. 혼자 할 수 있는 거 알아.”
헤르한은 리엘라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면서 리엘라를 커다란 나무 욕조 안에 앉혔다.
꼭 리엘라를 혼내듯이 한 말투와는 달리, 일일이 따뜻한 물을 퍼서 리엘라의 몸에 끼얹어 주는 손길은 마냥 자상하기만 했다.
“힘들지 않으세요? 이미 해안가에서 여기까지 절 안고 오셨는데.”
“이 정도는 가뿐하지.”
“대단하다. 혹시 아까 그 술 때문인가?”
“뭐? 무슨 술?”
“뭐 불태워 준다던 술 있잖아요. 그거 마신 덕택에 그렇게 힘이 솟는 거 아닐…….”
귀여운 얼굴로 엉뚱한 소리를 잘도 하는 리엘라의 정수리로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헤르한의 장난이었다.
“어푸, 폐하! 갑자기!”
“그 술이 정말 효과가 있었으면 다른 쪽이 불타야 하지 않겠어?”
헤르한에게 덤비려고 뒤를 돌아보았던 리엘라는 그쯤에서 입을 다물고 정자세로 돌아왔다.
헤르한의 목소리가, 또 헤르한의 표정이, 물을 끼얹은 장난과는 비교도 안 되게 짓궂고 농염해서.
‘본전도 못 찾을 거면서 덤비기는.’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물끄러미 보다가 직접 소매를 걷어 올렸다.
젖은 리엘라를 안고 오느라 마찬가지로 물기에 젖은 팔뚝이 달빛에 번들거렸다.
힘줄이 툭 불거진 굵은 팔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스펀지를 쥐고 리엘라의 몸 구석구석을 문질러 주었다.
“…….”
욕탕 안에서는 한동안 첨벙첨벙 물소리만 났다.
몸을 씻는 것뿐인데.
머리를 감겨주는 것이나 등과 목덜미를 씻겨 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이상 은밀한 곳에 헤르한의 손이 닿을 때면 리엘라는 흠칫흠칫 놀라서 괜히 몸을 웅크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긴장이 되지…….’
리엘라의 가슴이 갑자기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진작 본색을 드러내며 달려들었을 헤르한이 묵묵히 자신을 씻겨 주기만 해서?
아니면 새삼스럽게 이게 그냥 여행도 아니고 ‘신혼여행’이라는 사실이 자각되기 시작해서?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부끄럽다고 낯을 가리기에는 영 늦은 시점이다 싶어서, 그게 또 부끄러워지는데.
“리엘라. 물 온도는 어…….”
“좋아요!”
“…….”
“…….”
헤르한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기합이 잔뜩 든 목소리로 쩌렁쩌렁 외쳐 버리고 말았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것을 대놓고 드러내 버린 것이었다.
리엘라는 귀가 터질 듯이 빨개져서 고개를 푸욱 숙였다.
반면 몸을 일으킨 헤르한은 죄 없는 스펀지만 손아귀 안에서 꽉 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리엘라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끓는 힘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나는 정말 순수하게 널 씻겨 주기만 하려고 했는데, 네가 원한다니 어쩔 수 없지. 이제 그만 침실로 갈까?”
“아니…….”
“방금, 그러자는 신호였잖아.”
“…….”
아. 그냥 욕조 안에 머리를 넣고 들어가 버릴까.
리엘라는 야살스럽게 번뜩이는 헤르한의 눈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나 다를까, 몸을 낮춘 헤르한의 숨결이 목덜미 바로 뒤에서 느껴졌다.
“사실은 네 말이 맞아. 리엘라.”
“무슨 말…….”
“내가 마셨던 그 술. 아까부터 술기운이 도는 걸 참고 있었거든.”
*
신혼여행을 가면 최소한 이틀 동안은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않겠노라.
당찼던 리엘라의 그 다짐은 어쩌다 보니 진짜 실현되고 말았다.
그냥 이틀이기만 할까.
첫날 호기롭게 밤바다를 뛰놀았던 것을 마지막으로 리엘라는 사흘을 내리 침대 위에서 지냈다.
낮과 밤이 상관없이 헤르한에게 안기고 잠들기를 반복하다가, 배가 고플 때쯤 헤르한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그의 손으로 받아먹었다.
나흘째부터는 헤르한과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가 저택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한 나날들.
황궁의 일이나 신전의 일은 완전히 잊은 평화의 나날들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헤르한이 자다가 깨서 보니 리엘라가 제 팔베개에 누운 채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목덜미에 쪽, 입을 맞추었다가 물었다.
“리엘라. 무슨 생각해?”
리엘라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기 때문에 무언가 깊은 고민이라도 있나 싶었다.
확실히, 리엘라는 미간을 이리저리 찌푸려가며 고민을 이어 가다가 한참 뒤에야 헤르한에게 대답했다.
“오늘 점심으로 무얼 먹어야 할까요?”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헤르한은 살짝 몸을 일으켰다.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는데, 더 어처구니없게도 리엘라는 아주 심각한 표정이었다.
“제 기억에 빵이 딱 두 쪽 남아 있었던 것 같거든요. 샌드위치를 하면 될 것 같은데, 훈제 햄을 끼워야 할지 닭고기를 넣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폐하 생각은 어때요?”
빵 두 쪽. 훈제 햄과 닭고기.
리엘라가 한 말을 따라 그 단어들을 읊조리던 헤르한은 결국 한숨을 내쉬듯 웃음을 뱉어 버리고 말았다.
서로를 간절히 붙잡고서, 죽고 사는 것을 논하던 날들이 꼭 한여름 밤의 꿈만 같이 느껴졌다.
그때만 해도 헤르한은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았다.
모두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하루하루를 필사적으로 버텨 내면서.
그런데 이 여자 곁에선 이런 삶도 가능한 거였다.
이렇게 샌드위치 속에 무엇을 넣어 먹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사는 삶.
썩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아니, 오히려 분에 넘치도록 행복한 삶이 아닐까.
*
결국, 답은 닭고기로 결정되었다.
“누워 있어. 내가 내려가서 만들어 올게.”
헤르한은 헝클어진 리엘라의 머리칼을 한번 쓸어준 뒤에 침실을 나왔다.
쿵쿵쿵.
헤르한은 품위를 유지할 필요도 없이 편안하게 나무 계단 소리를 내며 식당으로 내려왔다.
그곳에는 때마침 창고에 음식을 채워 넣으려고 하인이 들른 참이었다.
“아니, 네놈……. 네놈 꼴이 왜 그런……?”
바지를 대충 걸쳐 입긴 하였으나, 보란 듯이 벗어젖힌 상체엔 연인과 뜨거운 사랑을 나눈 흔적이 가득한.
그런 ‘종놈’의 차림새를 보고 놀란 하인은 그 자리에 물병을 든 채로 굳어 버렸다.
“아, 이건…….”
헤르한은 늙은 하인을 빤히 보면서 고민했다.
이쯤에서 황제인 제 정체를 드러내야 할까.
하필 그때, 헤르한이 계단을 내려올 때 보다 좀 더 가벼운 소리가 탕탕탕 울려 퍼졌다.
리엘라가 계단을 내려온 것이었다.
“혹시 우유도 있으려나요? 아니면 과일 주스나…….”
“브레니케 공작님?”
“헉!?”
헤르한이 벗어 둔 커다란 셔츠만 가운처럼 걸치고 편하게 내려왔던 리엘라는 하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다시 후다닥 위로 올라갔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사실은 그렇고 그런…….”
“그렇다.”
결국 들켰군. 뭐. 어쩔 수 없지.
이 하인 하나에게 사실을 알린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으니 그냥 얘기하려는데.
“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브레니케 공작 나리는 독신이라 하시고, 뭐, 공작 나리와 하인 사이에 사랑이 꽃필 수도 있는 거고.”
“……아니.”
“이놈! 그래도 공작 나리께서 사랑으로 품어 주신다고 방자하게 굴지 말고, 바깥에선 항상 처신을 바르게 공작 나리를 잘 모시거라!”
늙은 하인은 의외로 편견이 없이 사상이 열린 편이었다.
“하인에게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뭐하러 굳이?”
하인이 돌아간 후, 리엘라와 헤르한은 닭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으며 머리를 맞댔다.
“우리가 아무 해명도 없이 떠나면 브레니케 공작의 명성을 해치게 된다고요.”
“그런가.”
그럼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때 해명하지 뭐, 하면서 헤르한은 다시 늘어지듯 리엘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리엘라는 또 언제 하인을 만나려나 생각하면서 그제야 날짜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하나둘 접어 가며 수를 세던 리엘라의 표정은 점점 사색이 되었다.
“헉! 폐하. 우리 이미 돌아가기로 한 날짜가 지난 것 같아요.”
“…….”
놀라는 기색은커녕 말없이 외면하는 헤르한을 보며 리엘라는 뒤늦게 깨달았다.
헤르한은 날짜가 지난 걸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도 여태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리엘라. 그냥 우리 여기 이대로 계속 숨어 있으면 안 되나? 아니면 배 타고 다른 섬이나 산골 마을로 도망가서 지내는 건 어때?”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헤르한의 말에 대한 대답은 열린 문 뒤쪽에서 들려왔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폐하! 폐하의 백성들을 그렇게 쉽게 버리시겠다고요?”
번쩍번쩍한 갑옷에 검집과 망토까지, 완전히 군장을 갖추고 나타난 아시온이었다.
아시온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등 뒤로 아시온과 마찬가지로 무장한 기사단 한 무리가 들이닥쳤다.
리엘라가 놀라서 창밖을 보니, 저택 뜰에는 황후 근위대 병사들까지 늘어서 있었다.
“아시온. 대체 왜 그러고 들이닥친 거야?”
“그러는 폐하야말로 왜 안 오신 겁니까? 부둣가에서 밤새 두 분 폐하를 기다리면서 제가 얼마나 두 분을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헤르한과 리엘라가 에트르 섬에서 나오기로 한 날은 그저께였다.
부둣가까지 두 사람을 마중 나갔던 아시온은 그들의 감감무소식에 놀라서 당장 병사들을 끌고 섬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폐하.’
‘응. 리엘라.’
‘우리의 천국도 이젠…….’
‘그래. 여기까지인 것 같군.’
아쉬운 눈길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빠르게 옷매무새를 갖추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을 기다렸던 기사들은 전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아무리 오랜만에 보는 거라서 더 그렇다지만, 낙원에 콕 틀어박혀 안 나오는 주군을 잡으러 온 사람들치고는 모두 지나치게 기합이 들어간 모양새였다.
“폐하. 황궁으로 다시 모시러 왔습니다.”
헤르한은 쓴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엘라도 막 헤르한을 따라나서는 그 참에, 두 사람은 문득 기사들 틈에서 이제야 ‘마님과 종놈’의 진짜 정체를 알고 벌벌 떨면서 어쩔 줄 모르는 하인을 발견했다.
그 하인에게 먼저 다가간 건 헤르한이었다.
터억.
하인의 어깨에 헤르한의 다부진 손이 얹히었다.
“그대가 선물한 굴욕은 절대 잊지 않겠다. 우리 다음엔 황궁에서 보도록 하지. 처신 바르게 마님을 잘 모시는 모습,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꼭 사형 선고라도 받은 듯이 노인이 바들바들 떨기에, 그런 그를 리엘라가 와서 부축하며 웃어 주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다고, 고맙다는 뜻이에요. 다음에 황궁에 정식으로 초대할 테니 꼭 놀러 오세요.”
*
헤르한과 리엘라는 그렇게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다.
손을 꼭 맞잡고 함께 돌아온, ‘집’이었다.
“리엘라 님! 아, 아니, 황후 폐하! 보고 싶었어요! 푹 쉬고 오셨나요?”
오랜만에 리엘라를 만나 반가운 나머지 예전의 호칭으로 불러 버리고 민망하게 웃는 루나.
“좋은 시간 보내신 모양이지요? 됐습니다. 두 분 다 안색이 환하신 것을 보니 검진은 필요도 없겠군요. 내일부터는 다시 강행군이니 마음 단단히 잡으셔야 할 겁니다.”
정다운 인사는 할 줄도 몰라서 툴툴거리다가 헤르한의 눈총을 받는 제스나.
“황후 폐하. 돌아오시는 것을 뵙고 떠나려고 기다렸습니다. 다시 황궁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늦은 말씀이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리엘라를 보는 아멜리아 사제.
또 득달같이 황제를 향해 달려드는 대신들이나, 신혼여행 얘기를 들려달라며 눈을 반짝이는 시녀들까지.
모두가 늘 한결같아서 리엘라는 그들 모두가 정다웠다.
‘집’이란 건 사실 장소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또 위험이 닥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와의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이곳이 이다지 애틋한 이유도 역시 그래서가 아닐까.
“황후 폐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때 루가 훌쩍 다가와 속닥속닥 귓속말했다.
가만히 그 말을 듣던 리엘라의 안색은 더욱 환해졌다.
“그게 정말이에요?”
리엘라는 바로 헤르한에게 가서 루가 자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귓속말을 전했다.
그러고는 헤르한의 팔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폐하. 지금 바로 확인하러 가요. 네?”
“리엘라. 그래도 짐이라도 풀고…….”
“어서요!”
그렇게 두 사람이 간 곳은 초상화의 방이었다.
“황후 폐하! 두 분 폐하의 초상화가 다 완성되었어요! 지금 초상화의 방에 가시면 보실 수 있어요!”
과연 그 말대로였다.
리엘라와 헤르한은 한쪽 벽면을 다 메울 만큼 커다란 그 초상화 앞에 서서 한참을 침묵했다.
바로 이 자리에 그림이 걸릴 줄도 알았고, 오래도록 공들여 준비해 오기도 했으면서, 막상 완성된 그림 앞에 선 기분은 참 이상했다.
“폐하나 제 단독 초상화도 좋지만, 전 역시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너무 멋져요.”
“뭐. 워낙 모델들이 뛰어나니까.”
리엘라는 풉 웃다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헤르한.”
헤르한. 헤르한.
지난 며칠간 질리도록 부른 이름이지만, 아직도 그를 이름만으로 부르는 일은 꽤 낯설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냥 헤르한 당신이기만 할 때도 멋졌지만, 당신은 역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제일 멋지네요.”
그렇게 말하는 리엘라의 시선은, 커다란 초상화 속, 위엄 있는 황제의 모습으로 제 옆을 지키고 있는 헤르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리엘라.”
“…….”
“내가 황제인 이상, 너도 그 자리에서 영원한 나의 황후여야 한다는 뜻이야.”
알지. 그럼.
왜 모를까.
그건 이미 아주 오래전에 했던 결심이었다.
어쩌면 당신과 내가 하나로 맞물릴 수밖에 없는 운명의 짝이라는 걸 깨닫기도 전부터, 나는 당신의 사람이 되겠노라, 리엘라는 결심했었다.
“약속했잖아요. 폐하가 어디에 있든지 나는 폐하의 곁에 있을 거라고.”
“그러면 난 널 위해서 열심히 싸우고.”
“나는 그런 당신을 지키고요.”
“그래. 여기서도 매일 밤은 길 테고.”
잘 나가다가 밤 얘기는 왜 나오나.
리엘라는 따지려다 말고 그냥 피식 웃었다.
밤만 길까.
화창한 낮도, 어슴푸레한 새벽도.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은 모든 시간이 다 길 테고 다 값질 것이었다.
그건 당신과 내가 어떤 이름으로 존재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엔릴과 안투든.
황제와 황후든.
혹은 그냥 헤르한과 리엘라일지라도.
“그럼 이만 나갈까요?”
“그래.”
함께 손을 맞잡고 있으면 됐다.
그거면, 두 사람은 세상의 어떤 이름보다 더 강하고 단단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완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