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 그냥 당신이랑 나 (153/154)


  • #153 그냥 당신이랑 나
    2022.12.15.


    리엘라는 배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내다보았다.

    제국 남부의 바다는 꼭 호수처럼 해수면이 맑고 고요했다.

    배는 아주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 덕에 잔잔한 파도로 일렁이는 수면은 꼭 거울처럼 리엘라의 모습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바닷바람을 대비해 두른 망토가 휘날리는 것.

    챙이 넓은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꽉 붙든 것.

    그 모자 아래, 해풍의 방향을 따라서 불꽃처럼 나부끼는 머리카락.

    또, 아까부터 그런 리엘라를 뒤에서 꼭 끌어안고 있는 헤르한의 모습까지.

    리엘라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바닷바람은 차니까 안에서 쉬라는 것을 무시해가며 갑판으로 나왔더니, 헤르한이 그런 리엘라의 뒤를 곧장 따라왔다.

    억지로라도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것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망토를 덮어 주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하나도 안 추워요.”

    “여긴 남부니까. 요즘 같은 한겨울에도 초봄 정도로 온화하다는군. 그래도 계속 바람을 맞으면 감기 걸리니까…….”

    “싫어요. 안 들어갈 거예요.”

    역시나.

    또 헤르한이 슬쩍 끌어당기는 것을 리엘라는 아주 단호한 대답으로 버텼다.


    “어떻게 온 신혼여행인데. 하나도 빠짐없이 다 눈에 담고 기억할 거예요!”

    엄청난 의지가 깃든 리엘라의 말에 헤르한도 결국 웃음을 뱉어 버렸다.


    “그래. 그렇긴 하지. 어떻게 온 신혼여행인데.”

    헤르한의 말에는 한탄이 조금 깃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게 그들의 원래 계획은 아니었으니까.


     

    *

    아름다웠던 결혼식이 끝난 직후, 황궁에서는 피로연이 연일 이어졌다.

    무려 일주일간이나, 밤낮으로.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각국에서 방문한 축하 사절을 전부 대접하기에는 턱없이 빠듯한 시간이기도 했다.

    덕분에 헤르한과 리엘라는 제대로 초야를 치를 틈도 없이 연회장과 알현실을 숨 가쁘게 종횡무진 움직여야 했다.


    “초야? 아니, 초야는 이미 백 번도 넘게 치르신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무슨 초야를 찾으십…….”

    아시온은 또 눈치 없이 말실수를 하고 근신 처분을 받았다.

    평소라면 나서서 아시온을 구제해주었을 리엘라도 이번만은 나설 겨를이 없었다.

    아시온이 조금 얄밉기도 했고, 정말 그를 신경 쓸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럼에도 리엘라가 숨을 꾹 참아 가며 일주일간의 강행군을 견뎌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페오나에 가면 무얼 할까? 페오나는 설산도 장관이고, 미식의 도시로도 유명하지.”

    바로 곧 있을 신혼여행 때문이었다.


    “음. 일단은 폐하 끌어안고 질리도록 잘 거예요. 이틀 동안은 안 일어날래.”

    “이틀씩이나? 난 좋은데, 리엘라 네가 견딜 수 있겠어?”

    “무슨……. 푹 잘 거라니까, 뭐, 뭘 견뎌요!”

    헤르한도 신혼여행을 떠날 생각에 들뜬 건 마찬가지였다.

    온종일 손님들을 접객하느라 퉁퉁 부르튼 발을 잠깐 맞대고 쉬는 동안에도, 둘은 오로지 새하얀 설상의 도시로 떠날 생각만으로 눈을 반짝이며 고생을 참았다.

    그런데.


    “폐하. 아무래도 페오나 여행은 취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 어째서?”

    “페오나가 벌써 두 분 폐하를 뵙고자 하는 인사들로 붐빈다고 합니다. 페오나까지 가는 모든 교통편이 마비되었을 정도라고…….”

    “어째서 그 지경이 된 거지? 여행지에 대해선 비밀 엄수하라고 했잖아.”

    “비밀 엄수를 해서 이 정도입니다. 여행지를 공표하셨더라면 아마 거기에서 세계 회의까지 열렸을 것입니다.”

    리엘라는 비보에 절망하며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 황궁 안에 있어야 하는 건가요?”

    물론 황궁은 안락하고 좋은 ‘내 집’이었으나, 지금만은 사정이 달랐다.

    국혼을 축하하러 온 손님을 하나 접객해서 보내고 나면 그사이에 셋이 더 방문하는 실정이었다.

    손님이 줄긴커녕 나날이 일감만 늘어 가는데, 대신들은 앞으로 최소 한두 달은 이런 상황이 계속되리라고 보았다.


    “페오나가 아니어도 좋으니 어디든 떠날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황후 폐하, 그러시면 혹시 남부의 에트르 섬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제안을 꺼낸 건 브레니케 공작이었다.

    그간 제국 황궁에 머물며 리엘라의 결혼식 준비를 도와주었던 그녀는 다시 리오타 왕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남부의 섬에 들러 잠시 휴양할 예정이었다.


    “두 분 폐하만 좋으시다면, 제 몫으로 예약했던 숙소와 교통편을 내 드리겠습니다.”

     

    *

    그렇게 예정이 없이 갑작스럽게 도망치듯 떠나 온 신혼여행.


    “바로 저기입니다.”

    뱃사공의 말에 리엘라의 가슴이 미칠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에트르 섬은 천혜의 경관을 갖춘 아름다운 섬이었다.

    바다는 맑은 에메랄드빛이었고, 규칙적으로 들이치는 파도 소리는 복잡한 머릿속을 씻어 주는 듯이 청량했다.

    겨울답지 않게 햇살이 온화했고, 피부에 닿는 해풍에 촉감까지도 따스했다.


    “저, 안녕하십니까?”

    그때, 나루터에 선 노인 하나가 배 위의 리엘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리엘라는 그에게 미소로 화답하면서, 브레니케 공작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나루터에 도착하실 때쯤 저택의 하인이 미리 마중 나와 있을 것입니다. 주의하실 점은, 황후 폐하임을 드러내지 마시고 제 행세를 잘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섬 안에서 머무시는 동안은 제 이름을 쓰십시오.”


    “저더러 브레니케 공작인 척을 하라고요? 그게 먹힐까요?”


    “예. 에트르 섬은 외지인이 드문 외딴 섬이라 육지의 소식이 전혀 닿지 않는 곳입니다. 그쪽에선 예약자명만 알고 다른 신상은 알지 못하니까요. 다만…….”

     
    하인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손에 든 서류와 리엘라를 번갈아 보았다.

    리엘라는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하인은 이내, 정말 브레니케 공작의 말처럼 리엘라를 알아보지 못했다.


    “부인께서 브레니케 여공작 되시지요?”

    “네, 네! 제가 브레니케 공작입니다.”

    기쁘게 대답하는 리엘라에게 하인은 공손히 손을 뻗었다.


    “아이고. 공작 나리처럼 귀하신 분께서 이런 누추한 섬에 다 오시고!”

    리엘라는 자신을 극진히 대접해 주는 하인의 주름진 손이 참 정다워 웃었다.


    “발을 조심하시지요. 모래사장이라 발이 푹푹 빠집니다. 여기, 편안한 신발을 미리 준비해 왔으니 신으시지요.”

    “어머나. 고맙습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그러고 나면, 남은 것은 아직 배 위에서 팔짱을 낀 채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르한이었다.

    늙은 하인은 그런 헤르한을 빤히 보았다.

    혹 황제를 알아보는 듯 하인의 주름진 눈꺼풀이 한껏 들어 올려졌으나.


    “네놈은 공작님의 종놈인가! 주인님께서 발이 푹푹 빠져 헤매시는데 뭘 뚱하게 보고만 있는 건가? 당장 내려와서 주인님을 빠릿빠릿하게 모셔야지. 하여간, 요새 젊은것들 하고는!”

    그는 헤르한을 향해 역정만 잔뜩 내고는 휙 돌아섰다.

    덕분에 홀로 남은 헤르한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리엘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브레니케 공작의 당부가 다시 떠올랐다.


    “다만 에트르 섬의 주민들은 아마 황제 폐하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다소 폐하께 방자하게 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두 분의 신상이 알려져 번거로워지는 것보다는 백 배 나으실 테니, 부디 자유롭게 여행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

    모든 것이 좋았다.

    브레니케 공작이 내어준 저택도 아주 좋았고, 그 저택을 둘러싼 고즈넉한 풍경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저택까지 이동하는 길에 이따금 마주친 민가의 주민들이 그저 반가운 손님을 대하듯 자신들에게 눈짓을 해주는 것도 좋았고, 자상한 저택의 하인이 헤르한에게 ‘주인님을 잘 모시거라! 에헴!’ 하며 마지막까지 훈수를 두고 떠나는 것도 참 재미있었다.


    “아직 토라져 있는 거 아니죠?”

    “토라진 적 없어.”

    “에이. 정말? 폐하보고 종놈이라고 했는데? 나 제대로 안 모신다고 혼쭐이 났는데?”

    하인은 다행히 리엘라를 극진히 대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그 이상 헤르한을 드잡이하지는 않았다.

    바로 그게 헤르한에게 또 다른 굴욕이라면 굴욕이었다.

    그는 평생 어딜 가든 언제나 중심에 설 줄만 알았지, 이렇게 투명인간 취급을 받은 적은 없었으니까.


    “그 하인도 나이를 허투루 먹은 듯해. 제대로 연륜이 쌓였다면 상대의 직함은 모르더라도 눈빛만으로 어떤 오라를 느껴야 하는 거잖아?”

    “오. 폐하에게 오라가 있나?”

    “당연하지.”

    헤르한은 제 오라를 느껴 보라면서 가슴을 편 채 한껏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분명, 매섭게 천하를 호령하던 바로 그 헤르한이 맞는데도, 리엘라는 잇새로 마냥 웃음이 삐져나와 곤란했다.


    “풉. 그러면 한번 실험해 보러 나가요.”

    “나가자고?”

    “네.”

    언제는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며칠을 꼼짝 않고 잠만 잘 거라고 하더니.

    리엘라는 자신이 언제 그리 피곤했냐는 듯이 발랄하게 헤르한 앞에 날아들어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브레니케 공작이 그러는데 오늘이 여기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래요!”

     

    *

    작은 섬마을,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시장이었다.

    야시장이라고 칭할 만큼 대단할 것 없는 소박한 골목 시장이었지만, 리엘라는 매 순간이 너무나 즐겁기만 했다.


    “우와. 이건 뭐죠?”

    “글쎄. 오징……어?”

    “아닌 것 같은데……. 폐하가 한번 드셔 보세요!”

    “아니, 왜 나한테?”

    “맛있어 보여서 양보하는 거죠.”

    “나도 네게 양보하고 싶은데. 리엘라. 네가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내 배가 다 부른 거 알잖아?”

    정체 모를 작은 꼬치구이 하나를 가지고 씨름하던 둘은 결국 사이좋게, 동시에 한입씩을 베어 물기로 했다.

    그러다가 리엘라의 입가에 양념이 묻어 버렸지만, 리엘라는 곧바로 손수건을 찾는 대신 웃음을 먼저 터트렸다.

    헤르한이 그걸 닦아 준답시고 다가와서 제 입술로 할짝대며 사욕을 채웠지만 그걸 두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 육지에서 오신 손님들!”

    “저희를 아세요?”

    “처음 보는 얼굴이니 육지에서 오셨나 하는 거지요. 애인 사이이신가요?”

    “아…….”

    어느 잡상인의 물음에 리엘라는 이제 수줍은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그러자 잡상인이 능글맞게 건넨 것은 시음용 술 한 잔이었다.


    “그러면 이게 딱입니다. 우리 섬의 전통주인데 사내의 정력에 이만한 게 없어요!”

    “네에? 괘, 괜찮습니다. 저희는 그런 거 필요 없…….”

    “고맙게 마시지.”

    “폐하! 아니, 헤, 헤르한!”

    헤르한은 밤을 더욱 뜨겁게 불태워 준다는 술을 겁도 없이 넙죽 받아 마셨다.

    언제나 독을 든 암살자가 접근할지도 모른다며 ‘검증’ 없이는 아무 음식이나 먹지도 않더니, 이 섬 안에서만큼은 그의 긴장도 한층 누그러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정력을 키워준다는 술이 궁금했든가.

    무엇이 되었든, 어쨌든 리엘라로서는 입가가 아플 정도로 환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즐거운 것이 있다면.


    “음. 우리 폐하의 오라에 놀라는 사람은 딱히 없는 것 같아서 아쉽네요?”

    “아쉬운 것 맞아? 엄청 즐거워 보이는데?”

    아무도 자신들을 알아보는 이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표정과 목소리를 숨길 필요 없이 정말 마음껏 크게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것.


    “헤르한! 이쪽으로 와 봐요! 여기 바로 아래가 바닷가예요!”

    또, 쩌렁쩌렁 울리도록 그의 이름을 크게 불러도, 거기에 반응해서 다가와 주는 건 오로지 밤바다처럼 깊은 눈빛을 일렁이는 내 남자, 하나뿐이라는 것.


    “조심해. 리엘라.”

    “당신도 내려와요. 신발 벗고 모래 밟아 봐요. 윽. 엄청 푹신푹신하고 간질간질해요!”

     

     
    얼마나 들뜬 것인지, 리엘라는 헤르한이 붙잡을 새도 없이 벌써 저쪽 해안가에 잔파도가 넘실대는 곳까지 가서 발을 첨벙거렸다.

    아이처럼 마냥 행복해하는 리엘라의 모습에 헤르한은 절로 미소를 머금고 리엘라의 뒤를 따랐다.

    이 정도면, 태어나 처음으로 종놈 취급 받는 굴욕쯤은 얼마든지 무릅쓰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때였다.


    “폐하! 이쪽에는 예쁜 조개가……, 아앗!”

    “리엘라! 괜찮아?”

    팔랑거리며 파도를 밟고 다니던 리엘라가 별안간 넘어진 것이었다.

    헤르한이 곧바로 달려가 안아 드니, 리엘라의 흰 발바닥 가운데에 피가 조금 흘렀다.

    날카로운 조개껍데기에 찔린 모양이었다.


    “이런…….”

    “괜찮아요. 푸흡.”

    헤르한은 리엘라의 상처가 마냥 안타까워 이맛살을 찌푸리는데, 리엘라는 놀랍게도 그 순간까지 웃고 있었다.


    “웃어, 지금?”

    “아, 그게 아니라.”

    리엘라는 뭐가 그리 반가운지 한참 더 웃다가 대답을 이었다.


    “르 데르에서 폐하가 날 구해 주었던 게 생각나서.”

    다친 리엘라를 노려보던 헤르한도 그 순간만큼은 인상을 폈다.


    “그때랑 지금은 많이 다르지.”

    “맞아요.”

    그때랑 똑같이 생쥐처럼 젖은 꼴로, 그때랑 똑같이 헤르한에게 안겨 있으면서, 리엘라는 그때의 자신과 다른 ‘지금’들을 떠올렸다.

    당신과 내가 선 곳.

    우리의 이름.

    우리의 관계.

    자신은 이제 더 울지 않고 어엿하게 누군가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고.

    그리고…….


    “짜요.”

    “응?”

    “그때랑 다르게 짠맛이 나요.”

    그 말에 헤르한은 기어이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하지. 여긴 바다잖아.”

    “그러니까요.”

    그때 서로의 사지라고 생각했던 좁고 얕은 강가와 달리, 여긴 모든 것을 다 품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아주 깊은 바다였다.

    바로 그런 곳에서, 리엘라는 헤르한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 헤르한.”

    “이름 부르는 것에 맛 들인 모양이군.”

    “응. 여기서 우리는 황제나 황후나 후손 같은 게 아니니까. 그냥 당신이랑 나일 뿐이니까.”

    바닷물에 젖은 탓인지, 그의 품이 평소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사랑해. 헤르한.”

    한 번 더 리엘라가 하는 고백에 헤르한은 웃음 섞인 대답을 건넸다.


    “……내가 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