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 나의 엔리 (151/154)


  • #151 나의 엔리
    2022.12.08.



    “네? 내가요? 신전의 새 수장 자리에?”

    리엘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다가 황당함을 참지 못한 나머지 너털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말이 안 되잖아요. 내가 뭐라고.”

    리엘라는 계속 웃었다.

    그런데 정작 아시온은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꼭, 답은 당신이 더 잘 아실 거라고 말하듯이.


    ‘내가 뭐라고.’

    웃음을 거둔 리엘라는 그 말을 두어 번 더 곱씹으면서 스스로 답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무엇인지.

    강력한 권력을 가진 엘슈바이크 대제국의 황후.

    안투의 현신.

    정화의 힘으로 엔릴의 후손들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성녀.

    또, 신전을 개혁하고자 했던 이본느의 유지를 이을 하나뿐인 핏줄.


    “아…….”

    “황후 폐하보다 더 맞는 적임자를 찾기가 더 힘들지, 싶은데요.”

    아시온이 말했다.

    부정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어떻게 신전을 맡아요? 신관도 아닌데.”

    “정확히는 감독 기관의 수장이니, 사제 서임을 받지 않은 이가 자리에 오르는 게 맞습니다.”

    “그래도…….”

    말끝을 흐리는 리엘라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역할, 주어진 운명.

    또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그 걱정만큼이나 두근거리는 기대감 같은 것들이.

    리엘라는 혼란스러워하다가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만약 그 자리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혹시 폐하와의 결혼에 문제가 생기는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다만 아주 바빠지시겠죠. 지금처럼 황궁에서 편하게 지내시지는 못할 겁니다. 신전 쪽으로 출장도 자주 다니셔야 할 거고, 골치 아픈 일도 많이 떠맡게 되실 거예요.”

    아시온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을 돕게 되실 겁니다.”

    신전을 재건하려 애쓰는 이들.

    또 당장 정화의 힘이 필요한 숱한 엔릴의 후손들까지.


    “주군께서 이 일을 비밀로 하라고 하셨던 건, 황후 폐하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황후 폐하는 그만큼 선한 분이라는 걸 잘 아시니까.”

    “…….”

    “그래서…….”

    “…….”

    “어떻게 하실 것인지 여쭈어도 됩니까?”

    아시온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의 정직한 품성이 오롯이 담긴 눈동자가 리엘라를 강직하게 바라보았다.

    리엘라는 아시온이 자신에게 비밀을 알려준 게 그래서라는 걸 알았다.

    단지 자신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서 알려준 것이 아니라, 결국 이건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일이니까.

    *

    아시온을 돌려보낸 후 리엘라가 욕실로 들어가니, 헤르한은 욕조 안에 노곤하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헤르한의 손에는 와인잔이 들려 있었다.

    욕조 바로 옆에 놓인 병은 이미 반이나 비워진 상태였다.


    “늦었잖아. 나 혼자 벌써 석 잔이나 마셨어.”

    리엘라를 타박하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나른했다.

    리엘라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 헤르한이 쥔 와인잔을 빼앗아 내려놓았다.

    헤르한은 저항 없이 잔을 내주면서도 리엘라의 옷차림을 보고 또 이맛살을 찌푸렸다.


    “옷은 왜 아직 입고 있지?”

    “벗겠다고 한 적 없는데요?”

    헤르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토라짐이 한층 더 짙어지는 순간이었다.


    “리엘라.”

    “네. 폐하.”

    리엘라는 샐쭉하게 대답했다.

    같이 목욕하는 게 어쩌고 하면서 투덜댈 줄 알았더니, 헤르한이 나긋하게 꺼낸 질문은 의외로 다른 것이었다.


    “내 옆에 있어 줄 거지?”

    “지금 옆에 있잖아요.”

    “아니. 계속.”

    어쩐지 말이 조금 어눌하다 싶더니 헤르한의 얼굴에 살짝 취기가 올라 보였다.

    붉어진 뺨.

    수증기가 맺혀 반짝이는 속눈썹.

    몽롱한 눈빛까지.

    까딱하면 그에게 영락없이 홀리겠다 싶어서, 리엘라는 일부러 시선을 거두고 대답했다.


    “글쎄요. 폐하가 하는 거 봐서 계속 옆에 있어 주든지, 조금만 옆에 있어 주든지 할까 봐요.”

    일부러 놀리듯이 한 말이었다.

    그러면 헤르한은 평소처럼 눈살에 힘을 주면서 덤빌 줄 알았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

    “내가 너에게 무얼 주면 내 옆에만 있어 줄래?”

    오늘의 그는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나약하고, 나약해서 아름다웠다.


    “응? 리엘라…….”

    헤르한은 리엘라를 보채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을 에워싼 사방이 뿌연 수증기로 가득했다.

    장미향이 그윽한 가운데, 헤르한은 본능적으로 제 생명의 원천을 찾아가 입을 맞추었다.


    “으음…….”

    그러다가 별안간, 헤르한이 팔을 뻗어 리엘라의 허리를 감아서 세게 끌어당겼다.


    “폐, 폐하!”

    첨벙!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물이 넘쳐흘렀다.

    리엘라가 방심한 것도 한순간.

    그런 리엘라가 헤르한의 힘에 욕조 안으로 끌려 들어간 것도 한순간이었다.


    “폐하! 다 젖었잖아요!”

    “아. 미안. 과음해 버렸나? 그냥 잡으려고만 했는데 팔이 뜻대로 움직이지를 않아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던 헤르한의 팔은 리엘라를 잘도 끌어다가 자신과 마주 보는 모양새로 다리 위에 앉혔다.

    졸지에 잡힌 민망한 자세에 리엘라가 몸을 틀어보았지만 그럴수록 찰방찰방하는 물소리만 귀를 더 자극했다.

    움직일수록 리엘라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이 거세어졌다.


    “난 욕조 안에 들어오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아까 하던 거 마저 하기로 했잖아. 그게 이 얘기 아니었나?”

    “전혀 아니었는데요!”

    “그래? 정말로, 절대로, 아니야?”

    헤르한이 등을 곧추세워 몸을 가까이 밀착했다.

    순간 젖은 몸과 젖은 몸이 맞닿으면서 리엘라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맞닿은 헤르한의 몸이 원래부터 달구어져 있던 것인지, 아니면 제 몸이 뒤늦게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헤르한의 더운 숨결이 다시 다가왔다.

    아까는 홍차 향이 났는데, 이번엔 진한 와인 향기가 풍겼다.

    그래서 이렇게 아찔한 걸까?

    꼭 자신이 잔뜩 취해 가는 것처럼.

    이제는 리엘라의 볼도 헤르한만큼이나 붉었다.

    리엘라는, 아무래도 이건 자신을 옭아매기 위한 헤르한의 지능적인 수법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폐하. 아무래도 이상한데. 정말 취한 거 맞아요? 솔직히 말해요. 그냥 취한 척하는 거죠?”

    리엘라는 제 품 안으로 끈질기게 파고드는 헤르한의 머리를 겨우 떼어 놓으며 물었다.

    헤르한은 제 볼을 감싼 손을 낚아채듯 쥐고는, 희고 보드라운 손바닥 안에 입을 맞추는 모양으로 대답했다.


    “그게 중요한가?”

    리엘라의 손바닥 안에서, 헤르한의 입술이 오물거리며 움직였다.

    그게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워서.

    그래서 그의 대답을 더 들으면 온몸이 이 장미 향 가득한 욕조 안에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아서.


    ‘아뇨.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로 쳐요.’

    리엘라는 헤르한을 더 추궁하는 대신 그를 꼭 끌어안았다.

    *

    그날 밤 새벽.

    혼자 잠결을 떨치고 일어난 리엘라는 헤르한이 깨지 않도록 일어나 침실 바깥으로 나왔다.

    해가 짧아진 탓인지, 겨울의 어스름은 유독 어두컴컴했다.

    응접실로 나온 리엘라는 테이블 가운데에 놓인 촛대를 가까이 끌어왔다.

    은은한 촛불 빛에 의지해 리엘라가 펼친 것은 얇은 책 한 권이었다.

    낮에 이엘이 주었던 선물.

    어릴 적, 리엘라의 보물이었던, 동화책 ‘엔리와 안’이었다.

    조심스레 책장을 펼치는 리엘라는 꼭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눈에 익은 그림들을 보았을 땐, 반가운 마음에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엔리’의 모습.

    그런 엔리를 올려다보며 활짝 미소 짓는 ‘안’의 모습.

    다시 보니 참 유치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그림 동화인데도, 어릴 적 리엘라에겐 그게 꿈이고 세상의 전부였었다.


    ‘엔리……. 안…….’

    서로가 짝일 수밖에 없는 엔릴과 안투.

    그렇게 운명처럼 하나가 되어 나아가는 이들의 모험담을 애틋하게 읽어 내려가던 리엘라는 문득 뒤를 돌았다.

    그러면 살짝 열린 문틈 안으로 보이는 건, 참 아름다운 모습으로 잠든, 나의 사랑.

    나의 엔리.


    ‘우리는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랑하게 된 걸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리엘라는 문틈으로 헤르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그날 강에 몸을 던지지 않았다면……. 당신이 그런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럼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까?’

    가슴이 덜컥할 법한 상상인데도 리엘라는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이상한 확신이 들어서였다.

    만일 그날 만나지 못했더라도 우리는 언젠가, 어디선가, 분명 만났을 거고 분명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으리라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온 리엘라는 동화책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구절을 눈에 담았다.


    ‘엔리와 안은 서로 사랑하며 영원히 행복했습니다.’

    그 구절을 보고 또 보던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결말이 이렇게 유치하고 뻔했던가. 하긴. 이건 동화니까.’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웃음이 날 정도로 그렇게 ‘뻔한 결말’이라는 것이, 어쩐지 감당할 수조차 없을 만큼 감사하고 벅차게 느껴졌다.

    나에게도 이런 뻔한 행복이 왔어.

    나의 엔리.

    당신이 날개를 달고 내게 가져다준 거겠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솟는 그때, 응접실 문이 달칵 열리더니 ‘꺅’ 하는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잠결에 인기척을 느끼고 안을 둘러보러 온 루였다.


    “황후 폐하? 아직 안 주무셨어요? 어두운데 왜 거기 혼자 계세요. 따뜻한 우유를 한 잔 가져다드릴까요?”

    리엘라는 잠을 떨치지 못해 눈을 비비는 루를 보며 웃다가 대답했다.


    “우유 대신, 만년필과 양피지를 좀 가져다줄래요? 그리고……. 황후의 인장도.”

     

     

    *

    며칠이 지나, 어느덧 국혼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세상 모두가 축복의 날을 기다리며 두근두근 가슴을 졸이는 때에 황궁의 회의실 안은 아직도 때아닌 논쟁으로 어수선했다.


    “부디 긍정적으로 다시 검토하시지요. 폐하. 다시 못 올 기회입니다.”

    논쟁의 주체는 리엘라를 신전 감독 기구의 새 수장으로 임명하는 것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그들의 열렬한 제안을 무시로 일관하는 황제 헤르한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신전의 주인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폐하.”

    “그동안 콧대 높게 굴던 자들이 제 발로 우리 황실의 권역 안에 들어오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세계 정부의 여론도 모두 같은 뜻이라 합니다. 안투의 후손께서 버젓이 존재하시는데 그 자리를 다른 이가 차지하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니겠습니까?”

    “결단만 내려 주시면 국혼에는 아무 차질이 없도록 저희가 잘…….”

    “전담 기구를 창설하여 모든 업무를 대행할 테니 부디 걱정은 놓으시고…….”

    “황후 폐하께서 감독관 직을 수락하시면 그 외교적, 경제적 효과가…….”

    헤르한은 성토를 그칠 줄 모르는 대신들을 모두 단칼에 내쫓아 버렸다.


    “어째, 날이 갈수록 더 심하게 징징거리는군.”

    “국혼 전에 빨리 확정하고 싶어 저러죠. 황후께서 신전의 수장이 된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니까요.”

    “자기들에게나 자랑이지. 누구 속 썩어 들어가는 줄은 모르고.”

    헤르한은 제스마저 밖으로 물리고 홀로 회의실에 남아 고민을 이어갔다.

    대신들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황실 입장에서는 실보다는 득이 많은 제안.

    무엇보다, 리엘라라면, 당연히 수락할 제안이었다.


    ‘또 내 욕심인가.’

    이 땅 위에 만민을 다스리는 이로서. 또 엔릴의 후손 중 하나로서.

    리엘라가 봉사하겠다면 당연히 지지해 주어야 할 일이지만, 이번에도 또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은 헤르한의 욕심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나도 이런 내가 싫군. 그냥 내 선에서 버텨 보려고 했는데……. 그래도 역시……. 어쨌든 리엘라의 의사를 물어봐야겠지…….’

    헤르한은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쁜 놈들. 하여간 리엘라를 한시도 가만히 놔두질 않아. 내 신혼을 방해하면 절대 가만 안 둘 테다.’

    오늘 아침 황궁에 도착했다던 아멜리아 사제가 헤르한을 찾아온 건 그때였다.

    여태껏 급한 논의안도 서신을 통해 전하던 그녀가 몇 주 만에 황실을 다시 방문한 이유는 분명했다.


    ‘리엘라를 데려가려고. 담판을 지으러 온 모양이지.’

    조금만.

    리엘라를 아주 조금만 내어주자고 크나큰 양보의 결심을 한 것이 고작 몇 분 전인데도 불구하고.


    “제국의 태양이신 폐하를 뵙습니다.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막상 아멜리아를 대하는 헤르한의 마음속엔 괜한 투지가 샘솟았다.

    악이든 선이든, 제게서 리엘라를 한 줌이라도 빼앗아 가려고 하는 이들은 모두 적으로 인식하는 것.

    그건 어느 순간부터 헤르한의 뼈에 새겨진 본능이었다.


    “신전 내부 회의를 통해 신전의 감독관을 맡아 줄 후보자를 확정하였습니다. 폐하께서 검증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

    헤르한은 고까운 마음에 대답도 없이 개혁안을 받아들었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신전이 확정했다는 후보자는 당연히 리엘라일 줄 알았는데.


    “……발루아 공작?”

    “예. 이번 개혁 내내 신전을 물심양면 도와주신 분이십니다.”

    “물론 알고 있지. 발루아 공작이라면 믿을 만한 정직한 자이고. 그런데…….”

    이 난데없는 이름이 헤르한은 미칠 듯이 반갑고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문이 생겼다.

    리엘라를 내어주기 싫은 것과는 별개의, 자존심 문제였다.


    “발루아 공작이 리엘라보다 후보자 추천 점수가 더 높았던가?”

    우리 리엘라보다 더 잘난 후보가 있었을 리가 없는데?

    그러자 그 질문에 도리어 아멜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당연히 블리니테 황후께서 1순위 후보였습니다만.”

    ……습니다만?


    “당사자께서 마다하시는데 강요할 수는 없지요.”

    “당사자가 마다했다고?”

    “……모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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