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마음껏 행복할게요
(149/154)
149 마음껏 행복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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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마음껏 행복할게요
2022.12.01.
“모두 좋은 아침이에요!”
이른 아침, 의상실로 들어서는 리엘라의 목소리는 오늘도 기운찼다.
황궁 안에서도 가장 크다는 본궁 2층 의상실을 가득 메운 건 온통 흰색이었다.
흰 웨딩 구두와 흰 꽃송이의 코르사주.
넓은 바닥을 다 메울 정도로 길고 화려한 면사포와 눈부신 웨딩드레스까지.
운동 하얗고 반짝이는 것들 사이에서 쪼그려 앉아 의상을 손보고 있던 시녀들은 벌떡 일어나 리엘라와 같이 활짝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바쁜가요? 부케만 다시 준비하면 된다고 들었는데요?”
“예. 그래도 혹시 놓친 것이 없는지 더 점검하려고요.”
“다들 열심히 해주는 건 좋지만.”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는데.
‘혹시 놓친 것’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미 한참 전부터 준비한 결혼식이었다.
날짜까지 정해졌다가 미루어진 것도 벌써 여러 번.
그러는 사이에 계절이 바뀌는 바람에 드레스도 겨울용으로 다시 지었고, 부케도 겨울꽃으로 다시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결혼식 날짜가 다시 확정되었다.
바로 열흘 뒤였다.
“아. 폐하께서 이 드레스를 입으시는 날이 눈에 그려져요! 얼마나 아름다우실까요?”
“그 얘기 열 번도 넘게 한 것 같은데?”
그 말에 루가 머쓱한 표정을 짓자 리엘라는 짓궂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칭찬 많이 들어서 좋다는 뜻이었어요.”
리엘라는 마네킹에 걸린 드레스 앞으로 한발 다가가 반짝거리는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직접 입어보기까지 했을 때도 마냥 남 일 같게만 느껴졌는데, 이번은 사뭇 달랐다.
‘이젠 정말로 결혼식…….’
혼인 서약도 진작 했고, 부부로 인정받은 지도 이미 오래지만.
‘원래 이렇게 다들 두근거리는 건가?’
리엘라는 기분 좋은 설렘에 볼을 붉혔다.
*
부케를 점검한 뒤엔 마지막 초상화 작업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엘리아스 화공은 이상하게 더 자신감에 넘치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죠, 폐하? 오늘이 마지막 작업이라 신나신 건가?”
루가 갸우뚱하며 한 말에 리엘라도 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그러기엔 지나칠 정도로 기합이 넘쳐 보이는데.”
리엘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튼을 전부 열어젖힌 응접실 안에는 맑은 겨울 햇살이 가득 들어 있었다.
캔버스 앞에 놓인 의자에 앉기 전, 리엘라는 오늘도 저만의 의식을 치르듯이 응접실 벽에 걸린 초상화 앞으로 갔다.
예쁜 액자에 걸어 둔 초상화 안에서 빛나는 이본느의 미소를 보고서는 씩씩하게 다짐했다.
오늘도 마음껏 행복할게요. 엄마.
“……?”
그러다가 문득 강렬한 시선을 느낀 리엘라가 고개를 돌려 마주친 것은 엘리아스 화공이었다.
그가 엄청나게 감격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야?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나?’
리엘라는 눈이 마주친 김에 화공에게 말을 걸었다.
“화공. 이분 보이죠? 제 어머니의 초상화거든요. 참 아름다우시죠?”
“예. 그렇습니다. 무척 아름답습니다.”
“저도 이렇게 그려주겠어요? 내 어머니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로?”
부디 예쁘게 잘 그려 달라는 당부인데도 화공은 뭐가 그리 감동적이었는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가 떨어지도록 세차게 끄덕거렸다.
‘이상한 사람이야.’
리엘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흐뭇한 기분이 들어서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작업을 이어가던 중, 화공이 잠시 붓을 놓았다.
“다 끝났나요?”
“예. 거의 다 완성되었으나 무언가가 부족한 듯……. 아! 목걸이를 추가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네? 아, 그럼 무얼 해야 할까…….”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화공의 돌발 제안에 리엘라가 당황할 틈도 없이 시녀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몇 단이나 되는 액세서리 함을 통째로 들고 온 시녀들은 저마다 열렬한 눈빛을 반짝이며 제 안목을 뽐냈다.
“이게 가장 잘 어울리십니다. 폐하!”
“이 다이아는 어떠세요?”
헤르한이 안으로 들어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헤르한은 안으로 들자마자 당연한 듯 제일 먼저 리엘라를 찾았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편안하게 눈꼬리를 접고 근사한 미소를 짓는.
좋은 향기만큼이나 반짝이는 햇살을 담뿍 몰고 다가와 주는.
세상에서 제일 빛나는, 나의 남자.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을 빤히 보다가, 자기가 새삼스레 그에게 반한 것이 들킬까 괜히 민망해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가 제 목걸이를 골라 주실래요? 초상화에 들어갈 거예요.”
“그러지.”
다짜고짜 한 말인데도 헤르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인의 보석함을 진지하게 살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거 어때?”
헤르한은 리엘라가 목걸이를 확인할 틈도 없이 허리를 숙였다.
‘……!’
그의 얼굴이 리엘라의 입술과 볼을 스치듯이 가까이 지나가더니 귀 뒤까지 쑤욱 다가왔다.
달칵.
그가 직접 목걸이를 채워주는 소리에 한 번.
“엉큼한 상상 했지?”
“아, 아닌데요.”
제 귓가에만 들릴 법한 나른한 속삭임에 또 한 번, 리엘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난 했는데.”
그 말에 얼굴이 화르륵 붉어지기가 무섭게 헤르한이 떨어져 나갔다.
시녀들은 전부 박수를 치면서 리엘라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감상했다.
“와. 정말 잘 어울리세요.”
“빛깔이 영롱하고 아름답네요. 꼭 황제 폐하의 눈동자 색 같은 걸요?”
루가 볼 수 있게 대어 준 거울을 통해 헤르한이 걸어준 목걸이를 보고서, 리엘라는 잠깐 멈칫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헤르한은 거만하게 살짝 턱을 들었다.
마치 ‘내 안목 좋지?’ 하고 자랑하듯이.
루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그 다정한 눈빛의 의미를 깨달은 건, 문득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본 후였다.
“어라? 그러고 보니 그 목걸이, 저 초상화의 대부인께서 걸고 있는 것과 같은 것 같네요?”
“맞아요. 어머니가 내게 남겨 주신 유품이에요.”
그런데도 차마 제 목에 걸지 못한 채 오래 떠돌았고, 되찾고도 어쩐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 걸지 못하던 것.
그런데 그것을 헤르한이 이렇게 쉽게 걸어 주었다.
아니.
오직 헤르한만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겠지.
‘고마워요. 폐하.’
리엘라가 입 모양만으로 말하니 헤르한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붉고 통통한 입술이 평소보다 갑절은 더 예쁘게 보여서, 당장 입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공.”
“예. 폐하.”
“한 시간 정도 쉬고 오는 건 어떤가?”
“예? 지금 말씀이십니까?”
난데없는 축객령에 오히려 놀란 건 리엘라 쪽이었다.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폐하?”
“별 건 아니고.”
‘그냥 조금만 단둘이 안고 있을까 해서’라는 속내는 굳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눈치가 빠른 시녀들은 알아서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화공도 부랴부랴 붓을 놓고 나가려는 그때, 마냥 해맑은 얼굴로 아시온이 등장했다.
“폐하! 신전 측 보고서가 도착했습니다!”
“지금 바…….”
“예! 바로 확인하실 줄 알고 회의실에 전부 준비해 놓았습니다!”
“…….”
헤르한은 이를 꽉 깨물었다.
자신이 하려던 말은 ‘지금 바로 가겠다’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쁘다’라는 것이었는데.
“아시온. 너는…….”
결국 리엘라와의 달콤한 시간은 다음을 기약해 두고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온 헤르한은 영 저기압이었다.
“예. 폐하. 제가 무엇이요?”
너는 주군을 위해서 독약도 주저 없이 마시는 자식이 그 눈치 조금 키우는 게 그렇게 힘드냐.
헤르한은 그렇게 아시온을 타박하려다가 말았다.
잔소리를 해서 나아질 것이었으면 진작 나아졌겠지.
“폐하. 뭐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니. 그냥.”
“…….”
“오늘따라 어깨가 이상하게 더 아프군.”
복수를 마친 헤르한은 가뿐한 걸음으로 울상이 된 아시온을 지나쳐 걸었다.
*
“재정비는 착실하게 되어가는 것 같군요.”
보고서를 다 훑어본 제스가 한 마디로 평가했다.
매사에 평가가 박한 것을 고려한다면 저 정도는 아주 후한 칭찬이었다.
그만큼 아멜리아는 착실하게 신전 일을 정리해 나가는 중이었다.
“특히 아멜리아 사제가 직접 낸 이 제안서 말입니다. 좀 놀랐습니다. 이런 생각까지 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제스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제안서를 손끝으로 툭툭 가리키며 말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양이, 꼭 ‘제법인데’ 하고 아멜리아를 인정하는 듯했다.
제안서에 담긴 건 신전에 ‘감독 기구’를 새롭게 창설하는 것에 대한 구상이었다.
아멜리아는 중앙신전 자체가 폐쇄적으로 운영되던 집단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알력이 생기고 비리가 만연하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바로 그걸 막기 위해, 심지가 곧은 외부의 인물을 감독관으로 임명하겠다는 뜻.
아멜리아의 정직하고 씩씩한 쇄신의 의지가 담긴 계획이었다.
“하긴. 중앙신전은 지금 최고 사제의 자리도 공석인 상태니까요. 아멜리아 사제도 계속 혼자 앞장서서 신전을 지휘할 수는 없을 테고.”
“하지만 그 자리를 누가 맡아?”
아시온이 제기한 의문에 제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아멜리아의 제안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감독관의 이름이 적혀야 할 칸은 공란이었다.
하단에는 국제 사회의 여론과 추천을 받겠다는 계획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말이 감독관이지, 상황 돌아가는 꼴을 보면 결국 신전을 이끌어 줄 외부 인사를 영입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 귀찮은 일을 자처해서 맡으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명예라도 남은 자리라면 모를까.
현재 신전은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서 뼈대만 간신히 남아 있는 꼴과 다름없었다.
“하아…….”
헤르한의 골치가 지끈지끈한 건 바로 그래서였다.
왠지 불 보듯이 미래가 뻔하다고나 할까.
제스도 곧장 헤르한의 계산을 이해하고 마찬가지로 자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여전히 혼자만 아무 눈치를 채지 못하는 아시온을 향해, 헤르한은 엄명을 내렸다.
“아시온. 이 일은 리엘라가 모르게 해. 특히 결혼식을 무사히 치르기 전엔 절대로. 신전의 ‘신’자도 리엘라 앞에서 꺼내지 마.”
*
초상화 작업이 끝나고 한참 뒤로도 헤르한은 돌아오지 않았다.
목을 빼고 그를 기다리던 리엘라는 결국 찌뿌둥한 몸을 펼치며 기지개를 켜다가 루를 불렀다.
“회의가 길어지시나 봐요. 우리 오랜만에 호수궁 쪽으로 산책이나 갈까요?”
“좋습니다. 폐하! 날이 꽤 추우니 두툼한 숄을 가져올게요.”
그렇게 리엘라는 루와 호위 기사 몇을 데리고 단란하게 호수궁 산책에 나섰다.
날이 무척 쌀쌀해졌지만 아직 호수가 단단히 얼어붙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 기분 좋다.”
폐하랑 함께 왔으면 더 좋았을걸.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산책하던 리엘라의 발길은, 문득 대사관 집무실 창문이 난 쪽에서 멈추었다.
창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집무실 안이 캄캄했다.
자신의 집무실이라지만 사실상 이엘이 늘 혼자 일하던 곳이었는데.
리엘라는 아직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하고 쓸쓸한 내부를 조금 들여다보다가, 내친김에 대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대사관 로비를 분주히 오가며 일하던 직원들은 예고 없이 등장한 리엘라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리엘라는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반가움에 활짝 웃었다.
“다들 잘 지냈죠? 오늘은 대사로서 왔어요.”
“네?”
“일감이 많이 밀렸을 것 아녜요?”
그 말에 직원들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리엘라의 말이 맞았다.
얼마 전부터 이엘이 결근하는 바람에 대사관은 사실상 거의 마비 상태였다.
“내가 도와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어찌 저희가 황후 폐하께 업무를 드리겠습니까?”
“내 업무 내가 찾아서 하는 건데요? 황후이기 전에 내가 리오타 대사잖아요.”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하고 싶어서 온 거니 개의치 말고 결재할 것 있으면 줘요. 집무실에 가 있을게요.”
“아. 어쩌나. 저, 정말로 괜찮은데. 정 그러시면…….”
직원들은 난감한 얼굴로 서로 눈치를 주고받다가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면 제일 급한 서류 딱 세 개만 슬쩍 보여 드리자!
리엘라는 정말 면목이 없다는 듯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서류를 내미는 직원의 모습이 귀여워서 웃다가, 문득 옆자리의 책상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 말을 전해야겠지.
리엘라는 이엘의 빈 책상을 잠깐 쓸쓸하게 보다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이엘 경은 이제 여기로 출근하지 않을 거예요.”
“네? 정말인가요?”
“그래요.”
“왜……. 보좌관님께 무슨 사정이 있나요?”
“그건…….”
리엘라는 잠깐 고민하다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개인 사정이에요.”
직원의 말을 일축한 뒤엔 다시 씩씩하게 미소를 지었다.
순식간에 다 살펴보고 결재를 마친 서류를 내밀면서.
“적당한 후임을 찾고 있으니 결정될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이엘 경보다 더 일 잘하는 사람으로 구할 테니…….”
집무실 문이 열리고, 바라지도 않았던 목소리가 나타나 대답한 건 바로 그때였다.
“저보다 더 일 잘하는 사람을 어디서 구하시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