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 내가 이렇게 잘 자라서 (148/154)


  • #148 내가 이렇게 잘 자라서
    2022.11.27.


    루도비코 주교가 자백하는 것을 뒤에서 듣고 있던 리엘라는 더 버티지 못하고 지하 감옥 바깥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헤르한이 곧장 그런 리엘라를 따라 나왔다.

    그는 비틀거리는 리엘라를 부축해 앞쪽의 벤치로 이끌었다.

    거기서, 리엘라는 헤르한에게 기댄 채로 한동안 가쁘게 숨을 골랐다.

    숨이 터지도록 찬 공기를 가득 들이마셔도 꼭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가슴 속이 뜨거워서 괴로웠다.


    “알고 있었는데. 주교가 그랬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봇물 터트리듯 감정을 쏟아내는 리엘라를, 헤르한은 그저 가만히 안았다.

    헤르한의 품은 따뜻하고도 단단했다.

    그 안에서 자신은 언제나 이렇게 안전하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는 동시에 또다시 서러움이 치밀었다.

    저는 안전한데 제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다.

    기댈 곳 하나 없이 온전히 혼자 싸웠고, 혼자 저를 지키다가 돌아가셨다.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얼마나 괴롭고, 억울하셨을까…….


    “어떻게 해 줄까. 말만 해.”

    헤르한의 너른 손이 리엘라의 어깨를 토닥였다.


    “당장 주교를 죽여줄까? 신전을 전부 불태워 버릴까?”

    그게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리엘라는 헤르한을 만류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리엘라는 흰 주먹을 꽉 쥐고 떨었다.

    그러자 어깨를 쓸어 주던 헤르한의 손이 내려와 그 작은 주먹을 감싸 쥐었다.

    분노는 내 몫이니, 너는 너무 깊이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처럼.

    막 밖으로 뛰쳐나오던 아멜리아와 리엘라의 눈이 마주친 건 바로 그때였다.


    “황후 폐하…….”

    “…….”

    아멜리아는 꼭 리엘라와 같이 아픈 표정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가 역시 같은 고통으로 붉었다.

    다만 아멜리아는 죄책감에 리엘라 쪽으로 더 향하지 못하고 맥없이 고개를 숙였다.

    리엘라 역시 아멜리아를 향한 원망을 차마 거둘 수가 없었다.

    스무 걸음 남짓한 거리가 몇백 걸음은 되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불과 오늘 아침, 아멜리아와 친자매라도 된 것처럼 까르르 웃던 때는 더 멀게 느껴졌다.

    아멜리아는 리엘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돌아서야만 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감히 황후 폐하를 대하겠어.’

    루도비코 주교가 과거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자신도 몰랐다는 건 절대 핑계가 될 수 없었다.

    저 자신도 스스로가 이렇게나 한심하고 괘씸한데, 황후 폐하는 오죽하실까.


    “아멜리아 사제.”

    그런데 그때, 어느새 다가왔는지 리엘라의 음성이 바로 뒤에서 다가왔다.

    아멜리아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뒤를 돌지 못했다.

    그냥 눈을 질끈 감고서 곧 날아들 따끔한 질책과 불호령만을 기다렸는데.


    “……고생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저를 보듬는 말에 아멜리아는 리엘라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기꺼이 따귀를 맞으려고 뺨을 내놓았더니 꽃으로 치시다니.

    아멜리아는 바로 그게 사나운 매질보다도 더 잔혹한 형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폐, 폐하……. 저는…….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폐하의 보살핌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아멜리아.”

    “저는 이본느 사제를 지키지 못했어요. 또한 무지하다는 명분 뒤에 숨어서 그릇된 길을 걸어왔습니다. 부디 저를 용서하지 말아 주십시오!”

    참담한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엘라는 아멜리아가 말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가 한참 뒤에 자신이 결정한 처분을 전했다.


    “알겠어요. 벌을 줄게요. 아멜리아 사제를 종신 유형에 처하겠어요.”

    “예. 어디든 달게 가서 평생 속죄하며 살겠…….”

    “중앙신전으로 돌아가세요.”

    아멜리아는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중죄인을 신전에 유폐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만, 신관인 자신을 신전으로 돌려보내겠다는 건 그 경우와 달랐다.


    “화, 황후 폐하. 그건 제게 과한 처사입니다. 차라리 이곳에서 루도비코 주교와 함께 벌을 받게 해주십시오!”

    “안 돼요. 누구 좋으라고요?”

    “……네?”

    당황해서 고개를 든 아멜리아는 그제야 리엘라의 얼굴을 마주했다.

    리엘라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눈에 힘을 바짝 주고 아멜리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 좋으라고 아멜리아 사제를 감옥에 가둬요? 그러면 신전은 어떻게 하는데요? 신전에 아직 정리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잖아요. 연루된 신관들도 잡아야 하고, 수용소의 후손들도 보살펴 주어야 하고. 그리고 이본느…….”

    애써 차분한 척하던 호흡을 잔뜩 흐트러뜨린 채로 리엘라는 말을 이어갔다.


    “내 어머니는 어떻게 하고요? 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널리 알려 줘야 할 것 아니에요? 억울함을 풀어주고, 내 어머니가 이루려던 뜻도 마저 이뤄 줘야 하잖아요.”

    “황후 폐하, 저는…….”

    “그러니까 신전으로 돌아가요. 돌아가서 모든 걸 다 책임지고 돌려놓으라는 말이에요.”

    다시 고개를 숙인 아멜리아를 향해 이번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엄명했다.


    “황후의 명을 따르라. 아멜리아 사제.”

    황제였다.


    “그대가 책임지고 신전을 재정비하겠다던 약속을 지켜라. 내 황후의 어머니의 명예 또한 되찾아 주어라. 모든 게 다 정리된 후에 다시 벌을 달라 청한다면, 그때 더 혹독한 벌을 생각해 보지.”

    아멜리아는 더 반발하지 못하고 이내 겸허히 눈을 감았다.

    어제는 상처 입은 병사들에게 망각의 물약을 내려 주시더니, 오늘은 자신에게 벌을 가장한 속죄의 기회를 내어 주시는구나.

    지나치게 커다란 은혜였다.

    이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제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해내는 것뿐.


    “알겠습니다. 두 분 폐하의 명, 따르겠나이다.”

     

     

    *

    아멜리아가 돌아가자마자, 신전의 정비는 아주 빠르게 이루어졌다.

    아멜리아는 루도비코 주교의 만행을 전부 담은 문건을 만들어 폭탄 터트리듯 온 세상에 발표했다.

    전국의 신관들은 루도비코 대주교의 탄핵에 만장일치로 동의했고, 향후 처분을 엘슈바이크 제국 황실에 온전히 맡기기로 했다.


    “루도비코에겐 사형대도 아깝습니다. 감옥에 빈자리도 많으니 그냥 종신형으로 하시지요.”

    제스가 그답지 않게 인정을 베푸는 것처럼 보이는 데에는 당연히 남다른 속셈이 있었다.


    “제스 경. 요즘 대체 감옥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요?”

    “듣고 싶으십니까?”

    리엘라의 물음에 대답하는 제스의 눈에는 언뜻 광기가 서려 보였다.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듣고 싶으십니까? 분비물 얘기까지는 괜찮습니까? 유혈이 낭자한 건 아무래도 조금 그렇…….”

    “제스.”

    “뭐 어떻습니까? 그저 건전한 학구열에서 비롯한 연구 얘기이자 정의 구현의 미담일 뿐인데요. 폐하.”

    “그래도 입 다물어. 리엘라의 귀를 더럽히지 마라.”

    헤르한은 일단 제스를 일축하면서도 제스만큼이나 서늘한 눈빛은 거두지 않은 채 당부했다.


    “물론 처분은 확실히 하고.”

    “예. 명 따르겠습니다. 단언컨대, 루도비코는 하루에 백번씩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루도비코와 함께 연맹을 따르던 신관들의 최후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루도비코와 함께 약물 실험을 자행하며 악행에 직접 가담했던 신관들은 신전의 수용소에 수감 되었다.

    그들은 숭고한 사제의 이름 대신 수감 번호로 불리게 되었고, 짐승처럼 대우 받으며 죄를 추궁 당했다.

    조사를 마친 이들에게는 형벌로 말과 생각을 잃게 하는 주사가 놓였다.

    바로 그들 스스로가 엔릴의 후손들을 괴롭히던 방식 그대로였다.

    아멜리아는 젊은 신관들과 성기사를 주축으로, 엔릴의 후손들에 대한 처리도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다.

    신전이 그들을 함부로 다스려선 안 된다는 ‘이본느의 유지’를 받든 것이었다.


    “어머니의 유지…….”

    리엘라는 아멜리아가 직접 작성해서 보내온 신전 개혁안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후손이라는 이유로 신전에 강제로 수용되는 일은 없어질 겁니다. 죄인 취급 받던 일도 없어질 거고요. 당장 수용소에 있는 후손들은 치료가 끝나는 즉시 자유를 되찾을 겁니다.”

    아시온의 설명대로, 아멜리아의 개혁안은 서두를 이렇게 떼고 있었다.

    [앞으로 중앙신전은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가장 낮은 곳에서 후손들을 섬기며 돕고자 합니다.]

    그 한 문장.

    그게 리엘라의 심장을 푹푹 찔러왔다.

    나의 어머니가 간절히 이루고자 했던 뜻은 바로 이것이겠지.

    조금만 더 일찍 세상이 이 뜻에 힘을 실어 주었다면, 어쩌면, 나의 어머니는 아직 살아 계실지도 모르는데…….

    서류의 문장을 손끝으로 훑다가 별안간 서글픈 감정이 치밀었다.


    “먼저 실례할게요.”

    리엘라는 왈칵 들이친 울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괜히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 폐하…….”

    아시온의 안타까운 눈길이 리엘라의 꽁무니를 쫓았지만, 헤르한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책상 위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



    “리엘라.”

    “아. 폐하.”

    헤르한이 침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한 시간 뒤였다.

    일부러 리엘라가 혼자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준다고 준 것이었는데도 부족했던 걸까.

    창가의 티테이블에 앉아 밖을 내다보던 리엘라의 눈가가 붉었다.

    스윽 헤르한의 눈치를 보면서 애써 시큰한 콧잔등을 감추려는 것이 뻔히 보이기에,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코끝을 톡톡 건드렸다.

    제 앞에서 억지로 참을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저 괜찮아요. 진짜예요.”

    헤르한은 아직 촉촉한 리엘라의 눈가를 엄지로 쓸었다.

    이래도?


    “이게 뭐가 어때서요. 원래 엄마 얘기하면 다들 이 정도는 울잖아요.”

    듣고 보니 그것도 영 틀린 논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 것과 상관없이 헤르한은 리엘라가 우는 것보단 웃는 것이 더 좋았다.

    그래서, 헤르한은 리엘라의 앞에 마주 앉아 허리 뒤로 감추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리엘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헤르한이 내미는 것을 받았다.


    “흠. 사랑의 편지라도 되나?”

    장난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친 리엘라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커다랗게 떠오른 눈에는 이내 또 반짝이는 눈물이 차올랐다.

    어쩜 이리도 순식간에 잘 울어대는 것인지.

    헤르한은 당황한 것 반, 기가 찬 것 반으로 리엘라의 눈물을 훔쳐 주었다.


    “달래 주려고 주는 선물인데 또 울면 어떻게 해?”

    “그럼 이걸 보고 어떻게 안 울어요? 내가 방금 그랬잖아. 엄마 얘기하면 다 우는 거라고요.”

    리엘라가 대답했다.

    항변하는 것치곤, 상당히 벅차서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로.

    헤르한이 건넨 것은 이본느 사제의 초상화였다.


    “며칠 전에 아멜리아가 보내왔더군.”

    “그런데 왜 이제 주세요?”

    “이렇게 널 달래주어야 할 때 유용하게 쓰려고.”

    헤르한은 그렇게 대충 뭉뚱그렸지만 사실 초상화를 이제야 주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멜리아가 보낸 초상화는 그림을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낡고 헤져서 엉망이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구석진 곳에 몰래 보관했을 테니, 당연히 상태가 좋을 수는 없었다.


    “아이고. 어쩌죠? 이걸 보시면 황후 폐하가 더 슬퍼하시는 거 아닙니까? 겨우 하나 남은 초상화 상태가 이래서야…….”


    “엘리아스를 불러.”


    “예? 엘리아스라면……. 아. 지금 황후 폐하의 초상화를 작업 중인 화공 말씀이시군요.”

     
    당장 아시온의 손에 끌려 온 화공 앞에 헤르한은 이본느의 초상화를 내려놓았다.


    “복원할 수 있겠나?”

     
    물음 같았지만, 실은 명령이자 협박이었다.


    “이틀 주겠다.”


    “해, 해내겠습니다!”

     
    그동안 리엘라의 초상화를 작업하며 몇 번이나 헤르한의 짓궂은 도전을 감내해 냈던 화공은 기어이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마지막 정리 작업만을 앞두고 그가 자랑스럽게 헤르한에게 내보인 건 아주 그럴듯하게 복원된 초상화였다.

    흐릿하던 원본과 똑같으면서도, 훨씬 밝고 선명했다.

    화공이 아직 손대지 못한 부분은 딱 한 군데였다.


    “입꼬리 부분은 완전히 지워져 있어서 새로 그려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헤르한은 그림 속의 이본느를 빤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리엘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바라볼 얼굴이었다.

    그러니.


    “활짝 웃는 입 모양으로 그리게.”

     
    마무리를 지시하면서 헤르한은 절대로 덧그린 것이 들통 나지 않도록 감쪽같이 작업하라 명했다.

    그렇게 공을 들인 이유는 당연히.


    “내 어머니……. 내 엄마…….”

    드디어 평화롭고 행복하게 미소 짓는 리엘라의 얼굴.

    이걸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 엄마 정말로, 너무 예쁘다. 저보다 더 예뻐요. 그렇죠, 폐하?”

     

     
    아닌데. 내 눈엔 네가 훨씬 더 예쁜데.

    헤르한은 진심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리엘라의 장단을 맞춰 주려고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저랑 많이 닮았어요. 아니다. 제가 엄마를 닮은 거죠.”

    “응.”

    “그리고 활짝 웃고 계세요. 이 초상화를 남길 땐 무척 행복하셨나 봐요. 그렇죠?”

    “그래. 그러게.”

    헤르한은 시치미를 뚝 뗀 얼굴로 진지하게 맞장구를 치다가 덧붙였다.


    “지금도 이렇게 행복하시지 않을까? 네가 이렇게 예쁘게 잘 자라서, 마침내 제 뜻을 이루도록 해 주었으니.”

    그 말에 리엘라가 입술을 꾹 물었다.

    이런. 또 울려 버린 건가.

    헤르한은 당황해서 리엘라의 볼을 쓸어주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맞아요. 우리 엄마는 행복할 거야. 내가 이렇게 잘 자라서 사랑받고 있으니까.”

    리엘라가 그 어느 때보다 씩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참 사랑스럽게 웃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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