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이본느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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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이본느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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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이본느의 비밀
2022.11.24.
황실 제1기사단 및 황후 근위대 병사들에게는 곧 황제의 복직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 전부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만 모두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전보다 더 힘이 바짝 들어서 씩씩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아침 일찍 일과를 시작한 건 아시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출근해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내실로 일과표를 가져오고, 헤르한의 옆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아시온. 화장실까지 따라올 필요 없어.”
“아닙니다. 폐하. 그래도 아직 몸이 성치 않으시니 제가 도와 드릴…….”
“작작 하라고.”
아시온을 향한 헤르한의 살벌한 농담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시온은 그것이 마냥 기껍다는 듯이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주군의 뒤를 쫓았다.
“어머나. 아시온 대장님. 오늘따라 기합이 넘치시네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눈이 퉁퉁 부으신 것 같은데? 밤새 울기라도 하셨어요?”
때마침 내실을 방문한 아멜리아의 농담에 아시온은 허둥대며 얼굴을 감추었다.
“아멜리아 사제. 사실은요…….”
“푸흡. 설명 안 해 주셔도 압니다. 황후 폐하. 그 대단한 ‘망각의 약’ 소문은 벌써 들었거든요.”
그러니 말하자면, 아멜리아는 다 알면서 일부러 아시온을 놀렸다는 소리.
생각보다 짓궂은 아멜리아의 면모에 리엘라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새 드레스 차림도 익숙한 아멜리아의 목에는 푸른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리엘라는 그것과 똑같은 어머니의 유품을 카일에게서 되찾았지만 아직 목에 걸지는 못했다.
뭐랄까.
왠지 아직은 엄두가 나질 않는다고 할까.
그 마음을 알아챈 듯, 아멜리아 사제가 한결 굳센 눈으로 리엘라를 보며 말했다.
“실은 오늘 루도비코 대주교님을 만나 뵈러 갈 생각입니다. 이제는 매듭을 지으려고요. 황후 폐하.”
“아…….”
“같이…… 가시겠어요?”
리엘라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리아는 단단한 손길로 그런 리엘라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
루도비코는 애써 담담한 척했다.
잠깐 긴장을 풀면 다리가 달달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쳤지만 그래도 누가 볼세라 계속 제정신을 채찍질했다.
‘위대한 중앙신전의 대주교로서의 체통을 잃으면 안 되지.’
때마침 감옥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루도비코는 그게 아멜리아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제 눈을 의심했다.
“아멜리아……? 네가 여기는 어떻게? 그 차림은 또 무엇이고?”
갖은 고초로 더 퍼석해진 팔십 대 백발노인의 미간이 건조한 주름으로 일그러졌다.
어둠에 익은 눈빛을 번뜩이며 아멜리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웬 귀족 영애라도 된 양 고상한 드레스 차림이라니.
하마터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뻔도 했다.
“제 신분을 감추고 여기까지 오느라 이렇습니다.”
“설마 내 소식을 듣고 날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와주었다는 것이냐?”
“물론입니다. 대주교님.”
루도비코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어떻게 연명해 온 삶인데 여기서 이렇게 끝낼 수는 없는 게지.
“그래. 나의 서신은 잘 받았느냐? 날 구명할 준비는? 황제와 맞서 싸우는 일이다. 탄원서 한두 장만으로는 부족할 터이니 전국의 사제들을 전부 규합해야 해. 날 공격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는 것을 분명히 일깨워 줘야…….”
“주교님. 그 전에 여쭐 것이 있습니다. 혹 이본느 사제를 아십니까?”
“뭐? 이, 이본느? 갑자기 그건 왜?”
루도비코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본느라니.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난데없는 이름이었다.
“사실은 얼마 전에, 과거에 행방불명되었던 이본느 사제를 주교님이 해한 것이라는 제보를 접했습니다.”
루도비코는 잠시 동요했지만 이내 엄중한 태도를 되찾았다.
“그건 옛날 일이 아니더냐? 그 일이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이지?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누명을 벗고 이 감옥에서 나가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여쭙는 것입니다. 대주교님.”
아멜리아는 루도비코의 꾸짖음에 차분한 대답으로 응수했다.
“카일이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뭐라고? 카일 님이?”
“예. 지금 황실에서 카일과 연맹의 죄목을 낱낱이 수사 중이라 합니다. 그러니 이 기회에 주교님과 조금이라도 닿아 있는 모든 악행은 전부 그자에게 덮어씌워야 합니다. 그것만이 주교님께서 이 감옥을 벗어날 방법입니다.”
“아아……. 그런……. 카일 님이…….”
카일마저 잡히고 말았다고?
그건 확실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동시에 루도비코에겐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이기도 했다.
‘아멜리아의 말대로 모든 것을 그분에게 덮어씌울 수만 있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게 그리 쉽게 가능할까? 이 또한 함정이라면?’
“대주교님. 아는 것은 전부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주교님을 구해 드릴 수 있습니다.”
“…….”
“저를 못 믿으십니까?”
섣불리 믿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연회장에서도 한패라고 믿었던 이에게 속아서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상황이어서 믿는 것이 아니었다.
믿는 것 외엔 다른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본느. 그 여잔 로마노 전(前) 대주교가 애지중지 감싸고돌던 아주 맹랑한 것이었지.”
루도비코는 결국 망설임 끝에 결심을 굳히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루도비코는 처음부터 신전이 ‘후손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수용소에 엔릴의 후손들을 강제로 가두다시피 하고 그들을 지배하려고 했다.
‘필요한 때’가 오면 그들을 신전의 군대로 부리기 위해서였다.
그런 루도비코의 뜻에 줄곧 반발하던 것이 바로 이본느 사제였다.
‘후손들’은 죄인도 아니고 저주받은 이들도 아닌, 그저 자신들과 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그러니 신전이 그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면서, 그녀는 사사건건 루도비코의 뜻을 당돌하게 걸고 넘어졌다.
“정말 눈엣가시였어. 그 젊은 것 하나를 어쩌지 못해서 내 뜻을 펼칠 수가 없었으니.”
루도비코 주교가 연맹과 결탁한 것은 그래서였다.
후손의 힘을 이용해 더 많은 권력을 쥐고자 했던 이해관계가 잘 맞물렸던 것이었다.
이본느가 어느 날 갑자기 야반도주를 한 건 참 공교롭게도 그때쯤이었다.
“운이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지. 아니면 눈치가 빨랐거나. 그렇지 않아도 처리하려던 참이었으니까.”
“그러면, 그쯤 로마노 대주교께서 사고를 당하신 것도 혹시…….”
“그래. 내가 처리한 것이었다.”
그렇게 전임 대주교를 죽이고 신전의 수장 자리를 거머쥔 루도비코는 몇 년 뒤 로마노 전 주교의 유품 안에서 그의 일기를 발견했다.
그 안엔 도망친 이본느에 대한 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었다.
이본느가 신전에서 지내던 당시.
그녀는 신전 수용소에 있던 엔릴의 후손 중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고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어디에나 하나씩은 있을 법한 사랑 이야기였겠지만 이본느의 경우는 조금 더 특별했다.
임신한 후, 이본느에게서 안투의 성력이 발현된 것이었다.
“그 강한 성력은 아마 이본느의 배 속에 들어선 아이에게서 비롯된 것이었겠지.”
로마노 전 대주교는 그 사실을 알고 이본느를 신전 밖으로 탈출시켰다.
그 후로 이본느와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녀를 몰래 보살펴 주던 와중에 루도비코에게 변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안 이후로 루도비코는 아직 어딘가에 숨어 있을 이본느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이본느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그녀와 알고 지냈던 수용소의 후손들도 전부 심문했다.
그들 중에 이본느와 사랑했다던 사내가 숨어 있었을 것이니까.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끝까지 밝혀내지 못했다.
당시에 약물 실험을 빙자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한 후손들이 전부 죽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말입니까? 주교님! 야, 약물 실험이라니……!”
“놀랄 것 없단다. 아멜리아. 오늘날 수용소의 후손들이 죄다 고분고분하게 우리 말을 잘 듣는 것이 거저 얻어진 결과라고 생각하느냐?”
아멜리아는 신전의 소름 끼치는 만행에 몸을 덜덜 떨었지만, 루도비코의 눈은 이미 광기로 물들어 그런 아멜리아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다.
“신께서 그런 나의 노력에 감응하신 거야. 나는 결국 이본느를 찾아냈단다.”
소름이 쭈뼛 돋아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루도비코는 과거의 그날에 이본느의 숨통을 낚아채었듯이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어. 이본느는 내 고문에 너무 쉽게 죽어 버렸고, 이본느가 낳았다던 그 계집아이는 그 길로 잃어 버렸거든. 제길. 그때 진짜 안투의 후손을 손에 넣었더라면 지금 내 꼴은 분명 달라졌을 것인데!”
루도비코는 여전히도 뭐가 그리 분한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 모습에 아멜리아는 속에서부터 진득한 구역질이 일었다.
이런 자를. 이렇게 끔찍한 인간을 여태껏 신의 대리인으로 여기며 모셔 왔다니.
“그나저나 카일 님이 정말 잡혔다고? 어떤 분이시더냐?”
아멜리아는 이제 더는 루도비코 주교의 숨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끔찍했고 말을 섞는 것은 더 끔찍해 당장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다시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저 또한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니까.
자신에게 속죄의 기회를 준 리엘라를 위해서라도 끝맺음은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카일은 스물셋의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주교님.”
“무……. 뭐라고?”
“아무리 그가 전지전능하다고 해도,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사주할 수는 없었겠지요. 당신께서는 스스로 그 모든 악행을 저지르신 겁니다. 알면서도 모른 척 연맹의 이름을 내세워서.”
“아멜리아. 네가 지금…….”
그 말에 루도비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멜리아의 표정과 눈빛, 목소리가 전과 달라져 있다는 것을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허…….”
루도비코의 잇새로 격노에 찬 숨이 흘러 나왔다.
빛이 바랜 회색 눈동자는 가늘게 뜬 채로 아멜리아를 소름 끼치게 노려보았다.
이미 배신에, 배신으로 말미암아 이른 구렁텅이였다.
한 번 더 배신을 당한다고 해서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그게 저 새파랗게 어린 것이 선사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멜리아. 나를 속인 것이냐? 내가 너를 어찌 키웠는데, 이 괘씸한……!”
“어찌 키우시기는요. 숱한 악을 행하시고, 그 원죄의 씨앗으로 키우셨지요.”
노기 띤 음성에 아멜리아가 더 악에 받친 울음으로 받아쳤다.
“제가 그토록 사랑하는 분을 죽인 당신을, 제 손으로 직접 모시면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제 무슨 낯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살아서는 황후 폐하를 뵐 낯이 없고, 죽어서는 이본느 사제를 뵐 낯이 없는데! 대체 어찌 그런 끔찍한 짓을 행하신 겁니까! 대체 왜요!”
아멜리아는 절규하듯이 울부짖었다.
어찌 그런 짓을 하였느냐고 따졌지만 루도비코가 이제 와 변명하거나 속죄할 리는 없었다.
아멜리아는 그런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카일은 이미 며칠 전에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잘린 목이 광장에 걸려 있으나, 주교님은 그 얼굴을 보지는 못하실 겁니다. 살아서 이 감옥을 나가진 못하실 테니까요.”
감옥 안은 어두운데도 하얗게 질린 루도비코의 얼굴만은 또렷했다.
떠나는 아멜리아의 뒷모습에 대고 저주를 퍼붓는 루도비코의 주교 앞에는 곧 새로운 그림자가 다시 드리웠다.
“순순한 자백 감사합니다. 주교님. 전국의 사제들이 이 모든 만행을 알면 놀라 자빠지겠군요. 물론 신전이 어떻게 뒤집히든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제스였다.
“그나저나 수용소의 후손들에게 약물 실험을 해오셨다고요. 흥미롭군요. 무얼 어떻게 하셨기에 사람을 다 죽이셨습니까?”
“으……. 으익…….”
“아. 말로 못 하시겠으면 몸으로 직접 보여주셔도 좋고.”
“무, 뭐……!?”
제스는 거기서 말을 더 잇진 않았다.
다만 묵묵히 가죽 장갑을 꺼내서 끼는 모습이 그 자체로 위협적이었다.
그가 들고 온 검은 가방을 확 열어젖히니, 그 안에는 정체 모를 약물이 든 주사기가 몇 뭉치는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커다란 주사기 하나를 꺼내 드는 제스의 행동에는 일말의 감정도 없어 보였다.
루도비코는 그제야 이 젊은 사내가 자신에게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이, 이봐! 이보게! 지금 무슨 짓을……!”
루도비코는 살려 달라 애원하고 회유하다가, 마지막에는 성서의 구절을 읊으며 제스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입 다무십시오. 신도 당신 같은 쓰레기의 기도는 듣기 싫으실 테니까.”
그런 루도비코에게 일갈하는 제스의 독설은 루도비코의 저주보다도 살벌했다.
“타락도 정도껏 해야지. 미치지 않고서야, 신관이라는 X끼가 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우리 황후 폐하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제스는 싸늘한 시선을 유지한 채 루도비코에게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