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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망각의 약 (146/154)


  • #146 망각의 약
    2022.11.20.


    다음날 아침, 리엘라가 눈을 떴을 때까지도 헤르한은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중이었다.

    간밤에 챙겨 먹은 진통제와 수면제가 생각보다 독했던 모양이었다.

    리엘라는 헤르한이 깨지 않도록 상체만 살짝 일으켜서 반듯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요히 꿈결에 빠진 그는 이제야 조금 편안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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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너무 아파하지 마세요. 폐하를 공격한 건 카일이지, 폐하의 병사들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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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

     
    어젯밤, 헤르한의 몸은 덧난 상처로 평소보다 더 뜨거웠다.

    리엘라는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그의 몸을 밤새 따스한 손길로 쓸어 주며 그를 달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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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병사들이 정 미우면, 제가 혼쭐을 내줄까요? 아시온 대장도 제가 불러서 아주 따끔하게 혼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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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나부터 혼이 나야겠네. 나도 내 병사들을 베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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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헤르한이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스스로 제 병사들을 베어 버린 손을 보려는 것 같아서, 리엘라는 그가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그의 손바닥을 낚아채듯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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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려고. 맞서 싸우지 않으면 죽으니까. 그래서 그랬던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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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병사들은 조종 받았지만 난 아니었어. 그런데도 내가 그들의 주군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러니 자신은 그들을 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처지라는 것이었다.

    그 자조적이고 애처로운 눈빛에 마음이 얼마나 아팠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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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에 대한 병사들의 충성심이 흐려졌을까 봐 무서우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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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거 뻔히 알면서. 폐하도 은근히 겁쟁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리엘라는, 헤르한이 그들의 진심을 보기를 겁내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헤르한은 특별한 힘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늘 그런 것들을 감당하며 살아왔을 테니까.

    겉과 다른 속마음들. 자신을 향한 은밀한 불신과 배반 같은 것들.

    보통 사람이라면 알아채지 못하고 평화롭게 지나쳤을 것들을 헤르한은 늘 피하지 못하고 속속들이 대면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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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가 혼자 감당할 필요 없어요. 이제는 내가 같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오늘은, 아무 걱정 없이 푹 자요.’

    리엘라는 단정하게 감긴 헤르한의 눈꺼풀 위에 살짝 입을 맞추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빠르게 아침 단장을 마치고 나서 응접실로 나가자마자 제일 먼저 마주한 건 황제의 오전 일과표를 들고 온 대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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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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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아시온 대장은요?”

    리엘라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오전마다 일과표를 챙겨 오는 것은 늘 아시온이 하던 일이었으니까.


    “그게……, 근위대장이 아직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예?”

    리엘라의 되물음에 대신도 마찬가지로 난감한 기색이었다.

    근위대장을 한참 기다려도 오지 않고 병영 쪽에서도 그의 소식을 모른다고 하기에, 자기가 급한 대로 직접 일과표를 들고 왔노라면서.


    ‘이상하다. 아시온은 말없이 지각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닌데.’

    리엘라는 걱정을 털지 못하고 서성이다가 루를 불러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설마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건 아니겠지?’

    직접 황궁을 다 뒤져서라도 아시온을 찾을 생각으로 본궁을 나온 리엘라는, 병영으로 가려다 말고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



    “……역시.”

    리엘라의 예상이 맞았다.

    리엘라가 발길 한 곳은 제스의 연구실.

    아시온은 바로 이곳, 당직실 침대에 뻗어서 자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병영에 알린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녀석이 밤새 혀 깨물고 죽어 버리겠다고 난리를 친 통에 저도 진이 다 빠져서…….”

    대신 상황을 설명하는 제스의 몰골도 초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보아하니, 아시온을 밤새 상대해 준답시고 무리한 모양이었다.


    “폐하가 찾으십니까? 당장 아시온을 깨우…….”

    “아뇨. 그냥 둬요. 폐하도 아직 주무세요.”

    그 말에 당장 아시온의 엉덩이를 걷어차려던 제스의 발이 우뚝 멈추었다.

    잠을 설쳐 신경질이 가득했던 얼굴엔 순간 수심이 가득 깃들었다.

    헤르한과 아시온.

    어울리지 않게 오늘따라 늦잠을 자는 두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괴로운 밤을 보냈다는 건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바람이나 좀 쐴까요?”

    연구실 복도로 나와 창문을 여니 찬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깥은 겨울 햇살이 따사로웠다.

    빛바랜 잎을 떨구고 무채색으로 차분하게 물들어가는 정원도, 그 곁을 분주히 오가는 시종들의 모습도, 언뜻 전부 평화로워 보였지만.


    “다친 사람들이 너무나 많네요.”

    싸움은 다 끝났고 승리도 했는데.

    소중한 ‘나의 사람들’이 아직 참 많이도 아파한다.


    “시간이 약입니다. 조금 지나면 알아서 다 괜찮아질 겁니다.”

    “의사라는 사람이 시간이 약이라니. 그런 거 말고 다른 약은 없어요? 예를 들면……. 아!”

    리엘라는 생각이 떠오른 듯 손바닥을 마주치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제스에게 무언가를 소곤거렸다.

    무슨 은밀한 얘기인가 싶어서 리엘라의 말을 진지하게 듣던 제스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예? 세상에 그런 약이 대체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없죠.”

    “있는데 제스 경이 만들 줄 모르는 건 아니고?”

    “아니, 절 뭐로 보시고 진짜. 그런 게 가능한 일이면 제가 여기서 이 고생을 하고 있겠습니까? 나가서 약장수로 떼돈이나 벌지.”

    “흠……. 알겠어요. 상관없어요. 꼭 진짜가 아니어도 될 것 같으니까.”

    제스는 그때까지도 리엘라의 말이 알쏭달쏭했다.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괴상한 약을 내놓으라고 하질 않나, 또 이제는 그런 게 없어도 상관없다고 하질 않나.


    “아시온 대장 일어나면 잘 챙겨 줘요.”

    “어디 가십니까?”

    “전 이제부터 조금 바쁠 것 같아서요.”

    리엘라는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아시온은 당직실에서 깨어난 뒤로도 아무런 의욕 없이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다.

    제스의 등쌀에 식사를 몇 숟갈 뜨고 다시 드러누운 그때, 한 병사가 아시온을 찾아왔다.


    “아시온 대장님. 복장을 갖추고 따라와 주십시오.”

    아시온은 창백해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폐하께서 정원 전투 건에 관해 병사들의 공식 처분을 내리셨습니다.”

     

    *

    아시온이 병사를 따라 들어선 곳은 병영의 회의실이었다.

    기다란 테이블을 따라서는 이미 병사들이 참혹한 얼굴로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전부 ‘그날’ 현장에 있었던 이들이었다.

    상석은 아직 비어 있었다.

    아시온은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상석 바로 맞은편 빈자리에 앉았다.

    그는 늘 회의를 주재하는 입장이었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아시온은, 오늘만큼은, 그저 자신에게 내려질 처분을 겸허히 받아들일 죄인 중 하나에 불과했다.


    “황후 폐하 드십니다.”

    곧 안으로 들어선 것은 헤르한이 아닌 리엘라였다.

    아시온과 병사들은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차리면서도 절대로 고개를 들지는 못했다.

    차마 리엘라의 눈을 마주 볼 면목이 없어서.


    “모두 앉아요. 여러분에 대한 폐하의 결정을 전하겠습니다.”

    리엘라의 명에 병사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리엘라는 냉엄한 목소리로 그런 그들을 꾸짖었다.


    “여러분이 지은 죄는 자신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겠죠.”

    그 엄격한 나무람에 뜨끔 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리엘라의 말대로, 그들은 제 죄를 잘 알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죄는 제 손으로 주군의 신뢰를 배반한 죄라는 것도.


    “이 중에는 감히 폐하의 옥체에 상흔을 남긴 자도 있어요. 그건 역모에 준하는 중죄입니다. 제국 법령상 참수가 마땅하나, 이 많은 인원을 전부 참수할 수는 없으니.”

    리엘라는 잠시 숨을 고른 뒤에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심려 끝에 여러분에게 마지막 배려를 베풀기로 하셨습니다.”

    쟁반을 든 시종들이 안으로 우르르 들어오더니 병사들 앞에 작은 약병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마시는 즉시 고통 없이 숨을 멎게 해주는 약입니다.”

    그 말에도 병사들은 아무도 놀라거나 떨지 않았다.

    감히 황제에게 검을 대고 휘둘렀으니 당연한 처분이었다.

    모두는 오히려 이제야 냉정한 결심으로 자신들에게 마땅한 벌을 내려주는 주군의 뜻에 감사할 뿐이었다.


    “이 약을 마시고 말고는 여러분의 선택에 맡기겠어요. 여러분은 이미 폐하에게 불복한 죄로 불려왔으니, 명령 하나쯤 더 무시한다고 해서 죄명이 달라지진 않아요. 도망칠 사람은 지금 떠나세요. 붙잡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리엘라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이는 없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예상대로, 병사들은 미동도 없었다.


    “떠날 자는 아무도 없나요?”

    리엘라가 다시 한번 물었다.

    꼭, 바깥에서 이를 엿듣고 있는 누군가도 잘 들으라는 듯이.


    “폐하께서 하명하신 이상, 그게 어떤 명령이든 저희는 그저 따를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폐하의 명예로운 충신으로 남고 싶습니다.”

    “불충에 대한 죗값을 치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들 앞에 놓인 건 목숨을 앗는 독약이라는 데도.

    그때 여태까지 굳은 채로 침묵하던 아시온이 움직였다.

    설마 떠나려는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아시온은 손을 들어 제 앞에 놓인 약병을 집더니 일말의 고민도 없이 병 안의 독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아시온…….’

    제일 먼저 약을 마신 아시온을 시작으로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독을 들이켰다.

    꼴사납게 빌거나 울먹이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전부 다 약을 마신 건가요?”

    주군께서 주신 것이기에, 그것이 설령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달게 받아들이는 그들 전부가 하나같이 굳세고 결연한 모습이었다.

    강건한 기개와는 어울리지 않는 흐느낌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한 것은, 테이블 위에 놓인 약병이 전부 다 비워지고 난 후로 한참 뒤였다.

    마시는 즉시 숨이 끊어지는 독약이라더니 아무도 고꾸라지는 이가 없었다.

    대신 자신들이 리엘라의 수에 속았음을, 그리하여 용서 받았음을 깨달은 이들만 있었다.

    오랜 침묵이 참 따뜻했다.

    병사들 모두를 일일이 바라봐 주는 황후의 눈빛처럼.


    “그대들의 목숨을 걸고 모두가 변함없는 충심을 증명해 주었군요.”

    그 말에 어디선가 몇몇의 울음이 터져 나왔지만, 리엘라는 듣지 못한 척 자리에서 일어나 낭랑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그건 독약이 아니라 망각의 물약이에요. 안투의 축복을 담아 내가 직접 만든 아주 특별한 약이죠. 아픈 기억만 골라서 잊게 해준답니다. 난 여러분이 정원의 일을 잊도록 그 약에 마법을 걸어 두었어요.”

    리엘라의 바로 맞은편.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입술을 세게 물고만 있던 아시온의 입가가 더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리엘라가 되지도 않는 사기를 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훤히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대단한 안투의 현신이니, 나의 마법의 힘을 거스르는 자는 하나도 없어야 할 거예요. 모두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

    그래도 리엘라는 마지막까지 뻔뻔하고 당당하게, 제 역할을 모두 해낸 뒤에 회의실에서 나왔다.

    *



    “리엘라.”

    달칵.

    회의실 문을 닫고 몇 발을 떼기가 무섭게 헤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그가 처음부터 근처에 있었다는 걸 알았던 리엘라는 주저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보셨죠? 폐하의 병사들이 이 정도예요.”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 독을 마시는 선택을 하게 하다니.”

    “이 정도는 해야 용서해 줄 명분이 서죠.”

    왠지 자신이 더 뿌듯한 느낌에 리엘라가 미소 짓자, 헤르한이 그 미소를 따라지었다.

    약에 취해서도, 잠에 취해서도 아니고, 그 자체로 편안한 웃음이었다.


    “대단한 걸 만들었네. 망각의 물약이라.”

    리엘라는 팔짱을 끼고 저를 바라보는 헤르한의 앞으로 한 발 더 다가갔다.


    “폐하도 하나 드실래요?”

    “그럴까.”

    헤르한은 리엘라가 건넨 약을 한 모금에 삼켰다.

    참 귀엽고 황당한 수를 다 썼구나, 하는 생각은 진작했는데 막상 약을 삼키고 나니 참지 못한 웃음이 더 삐져나왔다.


    “달군.”

    헤르한의 입안에 퍼지는 건 그저 다디단 사과 향이었다.

    예전 황후 근위대의 발대식 때, 리엘라가 마셔야 할 맹세의 술 대신 자신이 바꿔치기했던 사과 주스와 똑같은 맛.


    “네. 폐하의 것은 특별히 안투의 축복을 더 가득 담았거든요.”

    리엘라는, 그때 헤르한이 시치미를 떼던 것과 똑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폐하도, 이제는 행복한 것만 기억하게 되실 거예요.”

    헤르한을 가까이 올려다보는 리엘라의 눈이 따스했다.

    그래. 너와 함께라면 어련히.

    헤르한은 대답 대신 사과 향이 가득한 입술을 리엘라의 이마에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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