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 폭주 (144/154)


#144 폭주
2022.11.13.


‘폭주’였다.

리엘라에게서 폭발적인 정화의 힘을 얻어낸 카일이 제 능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린 것.

헤르한도 겪어 본 적이 있는 현상이었다.

한때 그의 머릿속으로 황궁 바깥 시민들의 생각까지 모조리 밀려들었으니, 지금 카일이 이렇게 눈을 부릅뜬 상태로 만난 적 없는 수백 명을 조종한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헤르한이 머리로 이해하고 말고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카일의 무자비한 팔에 리엘라가 작은 인형처럼 와락 구겨져서 잡혀 있다.

카일이 리엘라의 순결한 살결에 더러운 입술을 맞대고 리엘라의 생명의 기운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리고 리엘라는 카일의 품 안에서 의식을 잃었다.

리엘라의 솜털 하나 건드는 것도 봐줄 수가 없는데, 감히.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가 있지?

어떻게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활활 타는 불길 속에 내던져진 것처럼 헤르한의 속이 뜨거웠다.

역정이 치밀어 속이 뒤틀리고 피가 펄펄 끓었다.

인간으로서의 이성이 전부 날아가 버리고, 헤르한의 껍데기를 움직이는 건 오로지 분노였다.

때마침 주군을 향해 달려드는 병사 하나를 헤르한은 가볍게 물리쳤다.

헤르한의 머릿속을 점령한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카일을 찢어 죽인다.’

저 사내는 반드시 내 손으로, 갈가리 찢어 버리고 말 것이다.

리엘라의 고운 몸을 험하게 쥔 저 더러운 손, 리엘라를 품은 가슴, 리엘라를 바라보는 저 더러운 눈. 전부.


 


“비켜.”

카일은 아직 까마득한 저 멀리.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 숱한 꼭두각시들이었다.

어깨에 황실의 문장을 진 그들이 주군도 알아보지 못하고 검을 세웠다.

카일의 조종을 받는 그들이 헤르한의 명령을 들을 리는 없었고, 헤르한 역시 그들을 봐줄 생각은 없었다.


‘내 앞을 막는 놈이라면 누구든.’

네 편 내 편을 가를 수 있을 만한 판단력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리엘라에게 향하는 길을 막는 이는 헤르한에게 전부 적일 뿐이었다.

‘챙-! 채앵-!’

‘퍽!’

정원 안에 먼지가 피어오르고 화단의 여린 풀꽃이 짓밟혔다.

검과 검이 맞붙는 소리, 또는 헤르한에게 당한 이가 뱉어내는 비명만이 연이었다.

헤르한은 조종당하는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초점이 없이 그저 검을 휘두르고 전진했다.

자신이 휘두르는 검에 제 백성이 쓰러져 나간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못했다.

몇 번 그들의 검이 헤르한의 살갗을 얕게 베었지만, 통증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리엘라를 되찾겠어.’

오로지 그 일념 하나로.

죽으라고 덤비는 것들을 일일이 다 받아주며 앞으로 나아가던 그때, 다른 자들과는 다르게 민첩한 팔이 휘익 뻗어 나왔다.


“……!”

무감하게 고개를 돌린 헤르한은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얼어붙었다.

헤르한은 진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낮게 뇌까렸다.


“……제길.”

아시온이었다.


“왜 멈추는 거지? 이자는 차마 못 베겠나? 리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그 정도야?”

아시온의 목소리를 빌어, 카일이 말했다.

헤르한의 노여움은 한층 더 거세어졌다.

주군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웃으면서 제 목이라도 내놓을 이 바보를, 카일 네깟 것이 꼭두각시로 부리다니.


“실망스러운데. 고작 그 정도의 결심이라면 리엘라를 놓는 게 맞지 않겠어?”

아시온이 검을 뻗어 공격했다.

아무리 카일이 조종하는 것이라도 그의 움직임은 다른 병사들의 공격과 남달랐다.


“나라면 미련 없이 벨 텐데.”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말을 이어가면서도 아시온의 검은 눈동자는 동공이 흐렸다.

순간, 그가 내뻗은 검이 헤르한의 어깨를 스쳐 붉은 선혈을 흩뿌렸다.


‘젠장할!’

헤르한은 어깨를 감싸 쥔 채로 민첩하게 몸을 낮추고 파고들었다가 아시온의 목덜미를 검 손잡이 부분으로 내려쳤다.


“으헉!”

아시온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고꾸라졌으나, 곧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어차피 조종을 당하고 있으니, 목을 쳐서 기절시켜 봐야 소용없는 것이었다.


“아시온! 정신 차려!”

말이 통한다면 좋았겠지만, 헛된 기대였다.

가뜩이나 듬직한 아시온의 허우대 뒤로 다른 병사들도 다시 일어서 헤르한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수세의 몰린 헤르한의 눈앞이 아득했다.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병사들의 몸으로 시야가 가로막혀, 저 안쪽에 있는 리엘라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난입해서 헤르한을 빙 에워싼 대열을 흐트러뜨리고는 앞으로 달렸다.

조종당하는 병사들과는 다른 움직임.

헤르한은 곧 앞으로 내달리는 이의 정체를 확인했다.

이엘이었다.

*



“제게 왜 이것을 돌려주십니까?”

작전에 돌입하기 전.

정확히는 이엘이 바친 명단대로 연맹 간부들에게 초대장을 발송한 후.

헤르한은 남모르게 이엘을 불러 독대했다.

이젠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겸허히 무릎을 꿇는 이엘에게 헤르한이 내민 것은 마석 목걸이였다.


“카일이 황실로 들어올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카일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전에 그자의 골치 아픈 능력이 문제다. 이 마석은 후손의 힘을 막아주는 결계이기도 하니 카일에 대한 유일한 방어책이 되겠지.”

“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다시 말해 이 목걸이를 걸고 있으면 카일의 조종을 피할 수 있다는 뜻.

그런데도 헤르한은 이엘에게 건넨 마석을 거두어가지 않았다.

이엘은 여전히 손바닥을 펼친 채 마석을 뚫어져라 보다가 물었다.


“제 말뜻은, 어째서 그런 것을 다른 이가 아닌 저에게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리엘라와 내게는 어차피 그자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

“두 분을 빼고도……. 저보다는, 아시온 대장이나 제스 경을 보호하시는 편이 더 나을 텐데요.”

“나는 너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다. 이용하는 거야. 그들은 나의 사람이고.”

“…….”

“너는 그냥 나의 카드니까.”

이엘은 쓴웃음조차 터트리지 않았다.

헤르한은 그런 그를 빤히 보았다.

그는 모든 백성에게 좋은 주군이고자 했지만, 이엘에게만큼은 아니었다.

리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할까.

설령 제 백성을 도구처럼 쓰고 버리는 제왕이 된다고 할지라도.


“리엘라가 그러더군. 자신이 카일의 미끼가 되겠다고. 하지만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어. 그러니 필요한 때가 오면 네가 미끼가 되도록 하라.”

제 백성에게 기꺼이 미끼가 되라고 명령하는 폭군이 된다고 해도, 그는 상관없었다.


“네 소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엘. 지금 이 목걸이를 내주면서도, 네 놈의 속을 읽었으니.”

그 말에 이엘이 동요하며 크게 눈을 부릅떴다.


“황제로서 마지막 은혜를 베풀어 주지. 네 소원을 허락하겠다. 이엘 바이스.”

이엘의 소원.

그건 부디 스스로 리엘라를 지키다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건 참 마지막까지도 괘씸한 소원이었지만.


‘리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연적의 희생을 허락하는 것까지도, 헤르한은 상관없었다.

*

카일은 리엘라를 더 꼭 끌어안았다.

이 여린 체구를 그저 품 안 깊이 끌어안고 살결을 탐할 뿐인데도, 카일의 몸 전체에 미칠 듯한 힘이 솟구쳤다.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이.

카일은 저 자신이 아주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대로라면 이곳에 모인 병사들뿐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조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당신에게 입을 맞추면 될까?

그러면 난 만천하의 주인이 될까?

카일은 축 늘어져 의식도 없는 리엘라의 턱을 틀어잡았다.

고이 눈을 감은 그녀는 잠든 천사 같아서 더 아름다웠다.

굳게 다문 붉은 입술.

그걸 빤히 보다가 고개를 숙이는 그때.


“으윽-!”

갑자기 누군가 거칠게 내달아 몸을 밀치는 바람에 카일이 리엘라를 놓치고 뒤로 자빠졌다.

리엘라는 정원의 잔디 위로 풀썩 쓰러졌다.

카일은 잠시 골이 띵했다.


‘누, 누가 내게 반항을……!? 여기에 황제 말고 조종이 통하지 않는 자는 없을 텐데!’

눈을 들어보니 제 위에서 숨을 몰아쉬는 이는 검은 머리의 창백한 사내였다.

카일은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시온 공작의 눈을 통해 숱하게 마주하고 또 염탐했던, ‘이엘 바이스’.


‘하. 마석 결계를 뒤집어쓴 거로군. 누가 저를 이 자리까지 끌고 와주었는지, 은혜도 모르고.’

이엘의 손에는 얼핏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검도 있었지만, 카일은 그가 검 따위는 제대로 휘둘러 본 적도 없는 샌님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조종을 피한다고 해서 죽이지 못하는 건 아니지. 오히려 자신이 먹잇감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건가, 이엘?’

카일은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번뜩이며 조종하던 이들에게 새로운 지령을 내렸다.

그들은 카일의 명령대로 몸을 틀어 이엘에게 향했다.

이엘은 엉성한 자태로 검을 휘두르며 꼭두각시들의 이목을 끌지언정, 제대로 맞서 싸우지는 못했다.


‘뭐야. 고작 그런 허술한 모양으로 날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뒤는 간단했다.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큰일이 난 것은 아니었다.


“미안해요. 더러운 곳에 눕게 해서.”

카일은 다시 리엘라에게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동화 속 공주님처럼 풀숲 위에 곱게 누운 리엘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리엘라의 새하얀 볼에 어울리지 않는 흙이 묻어 있었다.

그걸 닦아주고자 카일이 손을 뻗은 바로 그때, 날카로운 쇠붙이가 바람을 가르며 카일의 눈앞에서 번쩍였다.

영문을 알 틈도 없이 카일의 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리엘라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라.”

카일은 제 정수리를 덮은 인영의 주인공을 확인하고 기겁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뻗은 채 다가서는 것은, 몸의 곳곳을 붉게 물들인 헤르한이었다.


“어, 어떻게 아직 살아 있었……!?”

헤르한의 뒤로, 쓰러진 자들도 무수했지만 그냥 멀뚱히 선 자들도 무수했다.

황제를 공격하던 병사들의 조종이 풀린 것이었다.

카일은 그제야 아까 이엘이 제게 뛰어들었을 때 의식이 흐트러져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빈틈을 허락했음을 깨달았다.


“제, 제…….”

제길, 하는 욕지거리를 뱉을 새도 없이 이번엔 헤르한의 굵은 발길질이 카일의 얼굴을 강타했다.


“함부로 쳐다도 보지 마.”

카일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뚝.

일격에 카일의 의식이 끊어졌는지, 아직 흐느적대며 조종당하던 이들마저 완전히 동작을 멈추고 우뚝 섰다.

이제 헤르한을 공격하는 이는 없었다.

이엘에게 달려들던 이들도 움직임을 멈추었고, 카일도 진득한 피를 꿀렁꿀렁 토해낼 뿐 끅끅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 더러운 숨을 뱉지도 말고.”

하지만 그래도.


“리엘라의 곁에 살아서 존재할 생각은 하지도 마.”

카일을 향한 헤르한의 움직임은 멎지 않았다.

카일의 폭주는 그쳤으나, 이제는 헤르한의 폭주가 시작된 것이었다.

후손으로서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눈앞에서 빼앗길 뻔한 자의 광기였다.

카일이 토해내는 피가 헤르한의 옷자락을 붉게 적셨다.

이대로라면 저 자신까지 완전히 다 타버려 재가 될 것을 알면서도 헤르한은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다.

꼭 제 영혼이 악마에게 사로잡힌 것만 같은 괴로움에 마냥 이성을 잃고 날뛰기만 하는 그때.


“……폐하.”

아주 미약한 부름 한 번에 헤르한의 머릿속을 점령했던 먹구름이 걷혀 들었다.

밝게 드는 빛에 헤르한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조종당하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였던 그 순간부터의 기억이 흐릴 정도인데도.


‘리엘라…….’

오로지 그 이름과 그 향기만큼은 헤르한에게 또렷했다.

사방이 뿌옇게 일어난 먼지로 흐렸다.


“리엘라.”

헤르한은 카일을 향해 쥐었던 주먹을 풀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리엘라를 찾았다.

그런데도 도무지 리엘라가 보이지 않아서 또 가슴 속이 불길로 치솟기 시작할 때, 헤르한의 목덜미로 부드럽고도 간지러운 느낌이 쏟아졌다.

천사의 날개가 내려앉는 것인가 했는데, 리엘라의 머리카락이었다.


“……폐하.”

헤르한의 등 뒤로 리엘라가 한없이 지치고 여린 몸을 기대어 왔다.


“폐하. 이제 그만 해요.”

물기가 묻어나는 음색이 헤르한의 정신을 애틋하게 일깨웠다.


“이제 그만 하고, 대신에 나를 좀 안아주세요. 나. 폐하가 필요해요.”

헤르한은 제 목을 따뜻하게 감아오는 리엘라의 팔을 단단히 쥐고, 그 살결 위에 뜨거운 숨결을 터트렸다.

그의 이성을 태우던 불길이 이제는 간절한 기도가 되어 그의 여신을 향했다.


‘그래. 그러자. 이제는 전부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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