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당신이 바로 도련님
(142/154)
142 당신이 바로 도련님
(142/154)
#142 당신이 바로 도련님
2022.11.06.
카일은 묵묵히 리엘라를 따랐다.
그가 뒤처질 때면 리엘라가 굳이 돌아보며 신경을 쓰는 통에, 어느새 그는 리엘라의 바로 옆에서 걸었다.
그런 두 사람의 뒤로는 황후의 수행원들이 한가득이었다.
그중에는 조금 전까지 연회장 안에서 연맹 간부들과 카일을 붙잡고 으름장을 놓던 기사들도 있었다.
카일은 그들을 흘긋 보다가 리엘라에게 물었다.
“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응? 그럼요. 우리 만난 적 있잖아요.”
그 말에 카일은 심장이 덜컥했다가.
“전에 연회 때 발코니에서. 몰래 땡땡이치고 있던 그 시종. 맞죠?”
이내 얼이 빠져 쓴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렴. 그때라도 기억을 해주는 게 어디야.’
문득 옆에서 나란히 걷는 리엘라를 보는 카일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런 느낌이군. 가까이서 보는 리엘라는.
키는 자신보다 딱 한 뼘만큼 작고, 어깨는 참 작고 동글동글했다.
찰랑찰랑 흔들리는 붉은 머리카락에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났고, 눈동자는 여전히 불꽃처럼 강렬하면서도 따스했다.
그때, 손을 대면 톡 터질 듯이 붉고 탐스럽게 익은 입술이 예쁘게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 뒤로 줄곧 찾았는데 없던데요. 오늘에야 다시 만나네요. 큰 연회 때만 외부에서 파견 오는 건가 봐요?”
“저를 찾으셨습니까?”
“네.”
“어째서 찾으셨습니까?”
“그러게요. 왜일까. 그냥 눈에 밟혔나.”
“…….”
“오늘도 그래서 이렇게 마주쳤나 봐요.”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카일은 이대로라면 위험하겠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마주하면, 자신을 보고 방긋거리는 저 미소를 한 번만 더 보면, 이 자리에서 영영 이대로 사로잡혀 버리겠다, 싶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리엘라를 가질 것이었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었다.
당장 벽 너머 연회장 안에선 황제의 사냥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가롭게 있을 시간이 없었다.
“데리고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네? 간다고요?”
“예.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 이 황궁 소속이 아니라서.”
카일은 눈을 질끈 감고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나 찾아 헤맸던 리엘라를 두고 도망쳐야만 하다니.
“아아…….”
마음이 찢기는 것 같은 그때, 고개를 끄덕이며 저를 보내주나 싶던 리엘라가 갑자기 이마를 감싸 쥐며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미안해요. 두통이……. 고질병이라.”
리엘라는 신음하면서 자연스레 카일의 팔뚝을 살짝 잡고 몸을 기대 왔다.
그렇게 어깨가 맞닿은 순간 카일의 전신에 소름이 쫙 퍼졌다.
수행원들은 몇 발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따라오느라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다.
“바람을 쐐야겠어요. 미안한데, 지금 퇴근하지 말고 그전에 나랑 산책 한 번만 더 해주면 안 될까요? 추가수당은 내가 직접 줄게요. 두 배로.”
카일의 팔뚝을 살짝 쥐었던 리엘라의 손이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카일은 계속 사슬에 꽁꽁 매인 것처럼 무력하게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리엘라의 손이 잠깐 닿았던 부분이 꼭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니면 세 배?”
리엘라가 천진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뒤로 펼쳐진 아득한 노을에 녹아들었다.
“저 말고도 부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으실 텐데요.”
“편하게 있고 싶어서요. 저 사람들은 전부 폐하의 사람들인지라.”
“연회장에서 위험한 소동이 일고 있는데 산책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리엘라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다.
나는 당신에게 위험한 사람이니 날 놓으라는.
나를 더 붙잡으면 나도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뜻.
“저 연회장 안의 일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걸요.”
하지만 리엘라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카일의 마음에 걸렸다.
당신은 어째서 ‘폐하의 사람’ 곁에서는 편하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인지.
당신을 노리는 연맹과 황제가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데 그게 왜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인지.
순간 리엘라의 고운 얼굴에 씁쓸한 빛이 스쳤다.
“나랑 같이 산책 안 해줄 건가요?”
거절해야 했다.
당장 황궁 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리엘라의 머리카락이 가을바람에 나부꼈다.
손을 뻗어 그 부드러운 결을 쓰다듬고 싶은 욕망을 참는 데만도 힘이 들어서 카일은 차마 리엘라를 떨쳐낼 수 없었다.
*
“아-! 이제 좀 살 것 같아!”
뒤따르던 시종과 기사들을 멀찍이 물리고 카일과 단둘이 정원에 들어온 리엘라는 아주 개운한 듯 기지개를 켰다.
카일은 일부러 한발 뒤에서 그런 리엘라를 따랐다.
살랑살랑 걷는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그는 꿈결을 걷는 것만 같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다.
“이제 편안하십니까?”
“네!”
리엘라는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근심 없이 행복한 얼굴은 아니었다.
카일은 그런 리엘라가 걱정되었다.
그녀가 제 목표물이자 적이기도 하다는 생각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아까 그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냥. 다 똑같은, 뻔한 얘기죠. 누군가가 엄청 행복해 보여도 안에서 제대로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그런 얘기.”
그 말에 어쩐지 카일의 심장이 크게 내려앉았다.
“행복하지…… 않으신 겁니까?”
바람결에 돌아가는 바람개비 날개처럼, 리엘라가 매끄럽게 몸을 틀어 카일을 보았다.
리엘라가 애써 머금는 미소에는 고되고 쓸쓸한 기운이 가득했다.
“이제는 모르겠어요. 뭐가 행복한 것인지…….”
“황제 폐하께서는 전쟁이라도 벌일 기세로 황후 폐하를 지키시는 줄로 압니다만.”
“폐하는 변하셨어요.”
리엘라는 걸음을 멈추고 카일 모르게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는, 나의 폐하를 부인해야 할 시간이었다.
“저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너무 많은 사람을 희생하고 계세요. 이제는 폐하가 지키는 것이 나인지, 당신의 권력인지도 모르겠어요. 전 이제 폐하가 무서워요.”
“폐하를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글쎄요…….”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리엘라의 고개에 카일의 분노가 일었다.
리엘라가 행복하지 않다.
리엘라를 차지한 그 탐욕스러운 사내가 리엘라를 괴롭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오늘따라 첫사랑이 보고 싶네요.”
“첫사랑이요?”
“네. 사실은. 음…….”
리엘라는 여태껏 솔직하게 이런저런 말을 하던 것과는 달리 머뭇거렸다.
그게 제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는 걸, 수줍어서 살짝 붉어진 리엘라의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카일은 깨달았다.
“당신이 내 첫사랑을 참 많이 닮았어요.”
“……!”
“아주 어릴 적에 어떤 시골에서 알고 지내던 귀족 도련님이었어요. 그땐 우리 둘 다 꼬맹이였으니까. 키가 아마, 이쯤, 되었으려나.”
리엘라가 제 허리께를 가리키며, 추억에 젖은 듯 예쁘게 미소 지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을 거예요. 도련님이 좋고, 도련님이랑 있는 게 즐거워서, 늘 그 댁에 놀러 가는 날만 손을 꼽아 기다리곤 했었거든요.”
“…….”
“아직도 생각나요. 도련님이 궁금하고. 그때 그 도련님 곁에 계속 머물렀다면 내 인생도 지금과는 많이 다르겠지, 하면서…….”
상념에 젖어 중얼거리던 리엘라는 카일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제 입을 가렸다.
“아 참! 내가 이런 말 한 거 어디 가서 얘기하면 절대 안 돼요. 특히 폐하께는 절대로……. 알았죠?”
바로 그 순수한 모습이 카일의 무장을 해제했다.
“나도 그랬습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고백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정체를 드러내선 절대 안 되는데도.
“나도, 당신이 오는 날만을 기다렸어요.”
카일은 울컥했다.
리엘라가 이런 마음인 줄 알았더라면. 자길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줄 알았더라면.
“내가 잘못했습니다. 당신이 황제에게 붙잡히기 전에, 내가 먼저 당신을 찾았어야 하는 건데.”
“네? 뭐라고요? ……갑자기 왜 그래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리엘라는 놀라서 카일을 채근하면서도 다정하게 답을 기다렸다.
꼭 어린 날의 모습과 같았다.
“날 계속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무슨…….”
“내가 당신을 더 빨리 찾아왔어야 했는데.”
“설마…….”
리엘라는 서서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당신이, 카일 도련님이에요?”
카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카일 도련님.”
“아니. 그냥 카일.”
“그건 안 돼. 도련님한테 도련님이라고 안 하면 혼나니까.”
“누가 리엘라를 혼내는데?”
“……있어.”
어린 리엘라는 속상한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 카일은 저택의 모든 하인을 전부 매질했다.
열 살 남짓한 아이의 명령이었지만, 백작이 애지중지하는 막내아들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카일은 그렇게 자신이 리엘라의 평화를 지켜냈다고 생각했다.
카일에게 있어 리엘라는 그런 존재였다.
자신을 구원해 준 사람이자, 자신이 구원해 주어야 할 사람.
“리엘라. 이거 가져. 보석 머리끈이야.”
“도련님. 나는 이런 거 필요 없는데…….”
“아니야. 리엘라는 예쁘니까, 예쁜 걸 해. 나는 세상에 예쁜 건 다 리엘라에게 줄 거야.”
가난한 리엘라.
불쌍한 리엘라.
그런 리엘라를 구하기 위해, 그는 어린 마음에 자신이 가진 모든 값비싼 것을 다 리엘라에게 주었다.
카일은 리엘라 덕분에 기력을 되찾았지만, 반대로 리엘라가 없으면 더 포악해졌다.
날이 갈수록 리엘라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는 그를 두고 식솔들의 걱정이 짙어져 가던 어느 날.
마차를 타고 멀찍이 여행을 떠났는데, 며칠이 지난 후에야 카일은 그게 평범한 ‘여행’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여보. 아무래도 카일이 정말 이상해요. 어젯밤에도 무서운 잠꼬대를 계속하고……. 요새 우리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생기는 것도…….”
“쉿. 카일이 이상한 게 아니야! 다 그 요망한 계집애 때문이라니까?”
늦은 밤.
문득 잠에서 깨어난 카일은 부모의 은밀한 대화를 엿들었다.
“그 애를 만난 뒤로 카일이 변했잖아? 리엘라. 그래. 다 그 계집 때문이야. 그것, 혹시 마녀 아닐까?”
“모르겠어요. 나는…….”
“됐어. 어차피 다신 그 마을로 갈 일도 없으니 이젠 괜찮아. 카일이 그 계집을 만나는 일도 다시없을 테고.”
리엘라를 더 만날 수 없다고?
다음날.
카일은 다시 행장을 챙기는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다.
“난 안 가요! 난 안 갈 거라고!”
“카일! 그만 떼쓰고 어서 마차에 올라. 왕궁에서 우리를 잡으려고 병사를 보냈단다. 어서 도망쳐야 한다니까!”
“나는 리엘라 보러 갈 거예요. 마을로 돌아갈…….”
화가 난 아버지가 카일의 따귀를 때렸다.
“그래. 어디 한번 너 혼자 잘 돌아가 보아라!”
가족들은 그렇게 어린 카일을 여관 안에 내버려 두고 떠났다.
사실 모두가 그렇게 영영 떠날 생각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카일은 열 살 어린애니까, 이대로 하룻밤을 혼자 지내도록 벌을 주고 다음 날 다시 돌아오면 고분고분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카일의 생각은 달랐다.
카일에게 가족은 더는 가족이 아니었다.
자신을 괴롭힌 사람이고 리엘라를 마녀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과 리엘라의 사이를 가로막는 사람이었다.
‘전부 미워. 마차가 굴러떨어져서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카일은 깊이 잠든 그 순간까지 그들을 원망했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카일의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일은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어린 나이에 혼자 남겨진 카일은 살아남는 것이 급급했다.
자신에게 타인을 조종하는 힘이 있다는 것.
그 특별한 힘을 이용해 더는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무렵.
그때 카일은 다시 옛날 옛적, 제 손을 잡아 주었던 소녀와 함께했던 마을로 돌아왔지만.
“그 용병단, 얼마 전 마을을 떠났다는군요. 이 목걸이 외에는 되찾은 것이 없습니다.”
카일이 거머쥘 수 있는 것은 리엘라를 데리고 저택을 드나들던 사내의 푸른 목걸이뿐이었다.
***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그때가 아니면 엊그제라도.
조금만 일찍 왔으면 황제의 곁에서 고통받는 당신을 하루빨리 구해낼 수 있었을 텐데.
“농담하지 말아요.”
그런 그를 향해 리엘라가 물었다.
“당신이 정말 카일 도련님이라니.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요?”
카일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리엘라는 어릴 적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너는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카일은 속상한 마음 대신 품 안에 깊이 감추어 두었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이거면.”
그가 꺼낸 것은 은빛 체인에 푸른 보석이 달린 목걸이.
“이제 날 믿겠어요?”
카일은 리엘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직접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껴안듯이 목을 감쌀 때, 리엘라는 짐승에게 사로잡힌 것처럼 경직되었다.
“이건…….”
리엘라는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고도 한동안 경직된 눈빛을 풀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카일은 참 벅찬 기대를 했다.
이제야 당신을 다시 만났노라고 리엘라가 기뻐하리라 생각했다.
리엘라를 만난 자신이 비로소 천국에 당도한 것처럼 행복하듯이.
그런데 리엘라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렇구나. 당신이 정말 카일 도련님, 맞구나.”
카일은 그런 리엘라의 손을 잡았다.
그것만으로도 몸에 강한 힘이 깃드는 것이 느껴졌다.
안투의 힘. 혹은 마침내 제 반쪽을 만나 완성된 영혼이 주는 힘일까.
“나랑 같이 가요.”
카일은 리엘라를 강렬하게 응시하며 고백했다.
“나더러 황궁에서 도망치라고요? 무슨 수로요?”
“내게 방법이 있어요. 황궁 밖에 대기시켜 놓은 사병들이 있으니 그들과 함께 도망치면 돼. 당신만 내 옆에 있어 준다면 황제쯤은 언제든 처리할 수 있어. 그러니 나를 믿어요.”
“…….”
“당신도 날 기다려왔잖아. 나와 함께 가요. 당신은 내 곁에서 행복할 수 있어요. 야욕에 미쳐 버린 황제랑 나는 달…….”
탁!
카일의 말이 끝나기 전에 리엘라가 소리 나게 제 손을 빼내며 뒤로 물러났다.
“우리 폐하를 처리할 거라고?”
일자로 굳은 눈썹.
힘이 가득 들어간 눈과 웃음기가 가신 붉은 입매까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게 싸늘해진 리엘라가 카일을 노려보며 말했다.
“곱디고운 내 남자가 야욕에 미쳐 버렸다고 누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