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화려한 피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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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화려한 피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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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화려한 피날레
2022.10.27.
결혼식 준비도 대부분 마쳤겠다, 이제 초상화를 완성하는 것 외엔 큰 일정이 남지 않은 황후 리엘라에게는 최근 새로운 일과가 하나 생겨났다.
“그럼 다녀올게요. 폐하!”
“……그렇게 신난 얼굴로 가지는 말아 주겠어?”
“에이. 또 서운해하세요?”
바로 아멜리아 사제를 만나러 병영으로 가는 것이었다.
“아직도 할 얘기가 그렇게 남았나?”
“네! 끝도 없어요. 오늘부터는 성서도 같이 읽어보기로 했는데.”
“그래……. 난 너를 두고는 출근하는 것도 발이 안 떨어지던데. 리엘라, 너는 참 걸음도 가벼워서 좋겠군.”
대놓고 비꼬는 말인데도 리엘라는 전혀 타격 입지 않은 얼굴로 맑게 웃었다.
나비처럼 헤르한의 품 안으로 팔랑팔랑 날아든 리엘라는 그에게 아주 가볍게 쪽 입을 맞추었다.
새 부리가 풀잎을 쪼듯 아주 짧고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헤르한은 그게 아쉬워 몸부림쳤지만, 리엘라는 그가 붙잡을 틈도 없이 헤르한의 품 밖으로 빠져나왔다.
“리엘라. 그래도 외박은 절대 안 돼. 알지?”
멀어지는 뒤통수에 대고 헤르한이 외쳤다.
장난기 어린 웃음을 터트린 후 발길을 재촉하던 리엘라는, 막 병영 앞뜰에 도착했을 즈음 누군가와 몸이 부딪쳤다.
“앗!”
“으앗!”
리엘라의 가슴께 정도로 키가 작은 여자아이들이었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무엄하다. 네 이 녀석들. 어느 안전에서 몸가짐을 경박히 하는 것이냐?”
호위 기사가 바로 호통을 쳤지만 리엘라는 그를 뒤로 물렸다.
그리 세게 부딪친 것도 아닌데다가, 몸집이 작은 저 아이들이 다쳤으면 다쳤지, 하는 생각에.
“괜찮니?”
“화, 황후님. 황후님. 잘못했습니다.”
“난 괜찮으니 일어나 보렴.”
황실 예법조차 어려워 보이는 아이들이 몸을 납작 엎드리고 떠는 모습에 리엘라는 애틋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정하게 부르며 일으켜 보니, 아는 얼굴들이었다.
“데니스?”
“어, 어……, 황후님이 저를 기억하세요?”
“물론이지.”
너희를 여기로 데려온 게 나인데.
이엘의 여동생들이었다.
병영 공관으로 처음 데려왔을 땐 몇 번 들러 살피기도 했는데 그 이후로는 바빠서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다.
그래서 어쩐지 미안한 마음에 내려다보니, 어린 두 자매는 아주 쑥스러운 듯이 리엘라를 흘긋거렸다.
이렇게나 예쁘고 대단한 ‘황후님’이 자기들을 기억하며 이름을 불러준다는 게 기쁘고 우쭐한 모양이었다.
“다리는 좀 괜찮아졌니?”
“많이 나았어요. 아, 아니. 잘 나았습니다. 황후 폐하.”
그때, 저쪽에서 머리를 틀어 올리고 회색 앞치마를 맨 부인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뛰던 부인은 리엘라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사색이 되어서 당장 허리를 숙였다.
“화,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리엘라는 그녀를 일으킨 뒤, 아이들을 멀리 뛰놀게 했다.
긴장을 풀어도 된다고 했는데도 부인은 리엘라 앞에서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잘 지냈나요?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그간 신경은 못 써줬네요.”
“아, 아닙니다! 황후 폐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천벌 받아 마땅한 저희를 용서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제게 일자리도 주시고, 아이들도 거두어 주시고…….”
자유롭게 뛰놀던 아이들은 ‘어머니!’ 하고 부르며 뛰어왔다가 훌쩍이는 어머니를 보고 당황한 눈치였다.
그런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와 눈빛이 리엘라의 마음을 꿍 울렸다.
리엘라는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지켜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말 말아요. 부인. 이엘 경이 아주 훌륭한 공신이라서 황실은 여러분께 그에 맞는 대접을 하는 거니까요.”
그 말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이며 떠올랐다.
“들었어? 우리 오라버니가 아주 훌륭한 공신이래!”
부인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소리 없이 울며, 입 모양으로 되뇌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
리오타 대사관에 복직한 이엘은 꼭 어느 공정에 속한 부품처럼 움직였다.
정해진 대로만, 감정 없이.
그레타가 처형된 이후로는 브레니케 섭정 내각을 돕는 것이 그의 주업무였다.
그는 말없이 출근해 업무를 보고 또 말없이 퇴근했다.
대사관 직원들과도 거리를 둔 채 지냈고, 항상 황제가 근처에 배치해 둔 사복 기사의 감시와 보호를 받았다.
‘나는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리엘라를 탐내는 자들에 대한 황제의 선전 포고.
또 그 결과를 보여주듯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오지 못한 로리엘이나 마침내 광장의 처형대에서 생을 마감한 그레타를 보면서 이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진작 황제의 손에 죽었어야 했다고.
감히 리엘라를 사랑했다.
황제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알면서도 방관했고, 그 틈을 노려 리엘라를 빼앗을 시도까지 했었다.
아무리 연맹의 협박을 받아 한 일이었다지만 리엘라를 탐냈던 마음만큼은 제 진심이었는데.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알고도 황제가 자신을 살려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철저히 쓸모를 다 하고 죽일 것이다. 너는 리엘라를 지키는 데 유용한 카드가 될 테니까.”
그 이후로 이엘은 기꺼이 제 쓸모에 대해 생각했다.
반드시 그분을 지키다가 죽자, 그런 결심도 했다.
“이엘 바이스. 따라와라.”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던 기사가 그를 부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황후 폐하의 명이시다. 조용히 따라와라.”
‘황후 폐하의 명’이란 말에 이엘의 가슴이 잔잔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또 어떤 은밀한 지령이라도 내리시려나.
이 와중에 다시 그분을 뵐 기대나 품다니, 이건 정말 미친 거지.
이엘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걸었다.
기사를 따라간 곳에서 마주한 건 의외의 사람들이었다.
“이엘!”
“이엘 오라버니!”
“……어, 어머니? 데니스? 테릴? 너희들이 어떻게?”
가족들이 대사관에서 30분 거리의 병영 공관에서 지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들을 만나는 건 이엘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엘은 황실이 제 가족을 거두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었다.
만남은 바라지도 않았는데.
“황후 폐하께서 허락해 주셨어요! 오늘은 오라버니가 휴가라서 같이 놀아도 된대요! 오라버니. 그동안 잘 지냈어요? 진짜진짜 보고 싶었어요!”
……당신께서 또.
대체 나를 얼마나 더 빚지게 만들 셈이신지.
이엘은 눈을 질끈 감고서 뜨거운 숨을 뱉어냈다.
동생들은 계속 이엘에게 꼭 붙어 재잘거리다가 한참 뒤에야 오라버니가 일하는 호수궁을 구경한다며 쪼르르 사라졌다.
이엘의 어머니는 멀어지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이엘. 나 때문에 다 이렇게 된 것 같구나.”
“어머니 탓이 아니에요.”
“아니야. 다 알면서……. 네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인지 뻔히 알았으면서 널 구하기는커녕 몰아세웠어. 네 아버지도 같은 길에서 변고를 당했는데도. 당장 먹고사는 것이 두려워서, 널 그 길로 또 밀어 넣었던 거야.”
“괜찮아요. 어머니. 황제 폐하께서는 저를 다 용서하셨어요.”
거짓말이었다.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엘은 일부러 그렇게 말했고 안도한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또 눈물을 흘렸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참 따뜻하신 분이야. 살아서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할 텐데. 무어라도 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에 잠기던 어머니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엘. 지하실에 네 아버지의 유품이 남아 있어. 어쩌면 그게 두 분 폐하께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구나.”
“이미 제가 다 찾아봤어요.”
“네가 모르는 곳이 있단다. 지하실 왼쪽 바닥에 작은 덧문이 있을 것인데 그 안을 뜯어보면…….”
“……!”
가족들이 돌아가고 난 뒤, 이엘은 곧바로 궁을 나서 집으로 향했다.
집 안은 이미 몇 번이나 샅샅이 뒤졌었다.
단서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하실 한구석을 살피니 어머니의 말대로 작은 공간이 있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들키면 해를 입을까 봐 꼭꼭 숨겨 두었던 거란다. 이 어미는 배운 것이 없어서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네 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 긴히 챙기던 것이니, 그만큼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겠니?”
‘이런……. 이게 여기에……!’
숨겨진 공간 속, 먼지 쌓인 함에서 서류 뭉치를 꺼낸 이엘은 속으로 깊게 탄식했다.
드디어 제 쓸모를 찾은 것 같았다.
*
“폐하. 이엘 바이스가 폐하를 뵙고자 합니다.”
“뭐?”
집무실 상석에 앉은 헤르한은 자신이 들은 것을 의심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회의 중이라는 사실은 알렸는가?”
“예. 그런데도 급한 용무라면서.”
‘괘씸하기는 한결같군.’
헤르한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헤르한은 루도비코 대주교를 황실로 소환할 방법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그레타를 숨겨주었던 것과 관련해 당장 그를 추궁할 죄목과 증거는 확실했지만 그것만으로 덤비기엔, 대주교는 확실히 어려운 상대였다.
바로 공격할 의도를 드러내면 증거 인멸을 시도하거나 연맹 세력의 힘을 빌려 도망쳐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무력으로 제압해서 끌고 오거나.
아니면 그럴듯한 핑계로 속여서 일단 황실까지 데려와 발을 묶거나.
그 둘 중 하나의 안을 놓고 참모진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하지만 거기서 더 진전되지 않아 이만 회의를 물리고 잠시 눈을 붙일까 하던 참이었는데.
“중요한 회의면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됐어. 들라고 해.”
헤르한은 표정을 풀지 않고 빳빳이 앉았다.
이엘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땀이 맺힌 이마와 홍조를 띤 볼.
거기에 숨도 제법 거칠게 쉬는 것을 보니 정말 급하게 오긴 한 모양이었다.
“이게 무엇이지?”
그런 이엘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헤르한 앞에 내민 것은 아주 낡은 문서였다.
군데군데 종이가 누렇게 바래서 내용을 정확히 알아보기도 힘든.
“자세히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폐하.”
이엘은 대답까지 괘씸했다.
네 농간이 어디까지 계속되나 보자 하며 도전적으로 문서를 집어 든 헤르한은 문서의 내용을 살피다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서류인지, 이엘이 설명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여러 대신 앞에 한마디로 밝히기엔 너무 거대한 증거였기에.
“왜 그러십니까? 폐하? 그게 무엇입니까?”
헤르한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엘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것을 어디서 구했지?”
“제 부친께서 숨겨 두신 문건입니다. 시기가 오래되어 내용에 사소한 변동은 있을 것입니다.”
집무실 안에 묵직한 침묵이 일었다.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레 입을 연 것은 제스였다.
“폐하. 그게 어떤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명단이다.”
“명단이요?”
황제를 이렇게나 놀래게 만든 것이 과연 ‘무엇’에 관한 명단일지 눈치챈 건 그 자리에서도 소수였다.
제스는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허-’ 하고 숨을 내쉬었다가, 마지막에는 그의 주군과 눈이 마주쳤다.
헤르한의 눈이 번뜩 빛을 내고 있었다.
“아예 화려한 피날레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주군의 혼잣말이 의미심장했다.
홀로 그 뜻을 이해한 제스의 목덜미에는 소름이 바짝 돋아났다.
“제스.”
“예.”
“연회를 준비해야겠다. 아주 성대하게.”
헤르한은 뚫어져라 보던 낡은 문건을 제스의 앞으로 밀었다.
“이 자들을 전부 황궁으로 불러들여라. 루도비코 대주교도 포함해서.”
*
황궁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연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무슨 연회래?”
“전 세계 각지에서 손님들이 다 모일 거라는데.”
“두 분 폐하의 국혼도 아직이잖아. 축하 사절로 온 외교 대사들도 황궁에 바글바글한데 여기서 손님이 더 온다고?”
“지금까지랑은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대연회라니까? 지방성의 하인들까지 다 동원된 거 보면 모르겠어?”
이번 연회는 황성을 넘어 제국과 대륙 전체가 들뜰 정도의 규모였다.
국혼을 앞두고 귀빈들에게 새 황후이자 안투의 화신을 선보이는 대대적인 연회였다.
참석자는 철저히 황실에서 미리 초대장을 보낸 이들로만 제한되었지만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머나먼 이국의 왕족에서부터 지방의 이름 없는 귀족들까지.
신분도 인종도 천차만별인 손님 명단을 보고, 궁인들은 그게 차별 없이 만민에게 안투의 축복을 나누어 주려는 황실의 뜻이라며 감탄했다.
많은 손님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중앙 신전의 수장인 루도비코 대주교였다.
“대주교님. 이제야 제국 황실에서 정신을 바로 차렸나 봅니다. 번듯한 권력자로 거듭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줄을 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흠흠! 그런 말 말게. 난 그저 겸허한 마음으로 안투신의 부름에 응하는 것뿐이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루도비코 주교의 어깨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황실에서는 일찍이 이번 연회의 가장 중요한 손님이 중앙 신전의 대주교임을 천명했다.
황실은 중앙 신전까지 호화로운 마중 행렬을 보냈고, 가장 길한 날을 골라 그를 직접 모셨다.
곧 진행될 연회의 식순엔, 대주교가 직접 블리니테 황후를 공인하는 순서까지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 왕녀를 치워 버리고 나니 황제도 참 너그러워진 모양이야. 아니면 정말 내 쪽으로 붙어 볼 심산인 건가?’
황제가 저에게 붙는 것인지, 자신이 황제에게 붙는 것인지.
엄밀히 말하자면 후자가 맞겠지만 루도비코 대주교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루도비코 대주교. 환영합니다.”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건, 황금색 꽃비가 날리는 이 풍요로운 황궁 한복판.
권력의 정점에 선 황제와 그를 지키고 선 여신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공손한 인사를 건네고 있다는 것.
“황제 폐하. 그리고 블리니테 황후 폐하.”
“예. 대주교님.”
신전에서 만났을 때는 함부로 손길도 할 수 없었던 그녀, 리엘라 블리니테가 오늘은 주교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다시 뵐 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리엘라의 인사에 루도비코 대주교는 만면에 화색을 띠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를 둘러싼 이 모든 환영의 인파가 곧 제 올가미를 맬 사냥꾼인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