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 겁도 없이 외박을 (138/154)


#138 겁도 없이 외박을
2022.10.23.


아멜리아 사제가 병영 공관의 거처로 돌아오고 나서도 리엘라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줄곧 몸을 가까이하고 마주 앉았다.

아직은 아멜리아의 혐의가 완전히 벗겨진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 거리를 두라고 헤르한이 이따금 주의를 시켜도 그때뿐이었다.

물론 헤르한도 진심으로 아직 아멜리아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 진작 알아보지 못하였을까요? 이렇게 보니 이다지도 닮은 것을.”

“정말요? 제가 정말 그분을 많이 닮았나요?”

“예. 특히 눈이 참 닮았어요. 이본느 사제님도 항상 그렇게 깊고 붉은 눈으로 저를 보곤 하셨지요.”

“그렇군요. 내가 그분의 눈동자를 닮았구나…….”

손을 맞잡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기쁨과 슬픔, 반가움, 애틋함과 경이로움.


‘저런데 어찌 의심해.’

헤르한은 실소를 뱉어냈다.

신관에겐 후손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 리엘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걸 아쉬워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굳이 능력을 쓰지 않아도 두 사람의 마음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투명하게 드러났기에.

리엘라는 아멜리아에게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제가 다시 가져가도 괜찮은가요?”

“당연하죠. 아멜리아 사제의 것이잖아요.”

“하지만 그 이전에 이본느 사제께서 주신 것인데…….”

“그분이 당신에게 주었으니 당신의 것이에요. 제 것은 폐하께서 찾아 주신다고 하였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대화를 나눌 만큼 나누고, 또 목걸이까지 다시 돌려주었는데도 리엘라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 ‘그분’은 어떤 분이셨는지 좀 더 듣고 싶은데…….”

아직 이본느 사제가 제 어머니라고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눈빛이 참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어쩌면 제 어머니일 수도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리엘라는 계속 마음에 밟혔다.

아멜리아는 그런 리엘라에게 따스하게 답해 주었다.


“이본느 사제님은 정말 아름다워서 신전의 모든 사람이 다 우러러보는 분이었어요.”

그 설명에 헤르한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엘라의 어머니라면 응당 그런 분이었겠지, 하면서.


“그리고 그만큼 심지도 곧으신 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게 하신 말씀은 바른길로 가라는 거였어요. 그러다 보면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

“아마도 오늘을 이야기하신 건가 봅니다.”

“신전을 내부 고발할 결심을 한 것도 그래서였군요.”

제스의 말에 아멜리아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그분의 소식을 들은 적은 있나요?”

하나 더, 리엘라의 질문이 이어졌다.

실은 가장 확인하고 싶었던 사실.

하지만 그 질문에, 내내 꿈을 꾸듯 벅차게 울고 웃던 아멜리아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 그게……. 이본느 사제님을……. 그 후로는…….”

아멜리아가 더 말꼬리를 흐릴 새도 없이 리엘라를 잡아끈 것은 헤르한이었다.


“리엘라.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시간이 늦었어.”

 

 

*

다음날, 헤르한이 눈을 떴을 땐 침대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리엘라?”

리엘라가 헤르한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최근은, 먼저 깬 헤르한이 숨을 죽이고 잠든 리엘라를 질리도록 보고 또 보는 것이 아침을 여는 관례였다.

깃털로 빚은 인형을 대하듯이 불면 날아갈까 소중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잠결에 리엘라가 하얗고 동그란 이마를 찡그린다.

그때가 바로 리엘라에게 입을 맞출 타이밍이었다.

그러면 리엘라의 반응은 매일 달랐다.

아이처럼 웃기도 하고, 아직 잠결에 손길을 뿌리치기도 하고, 또 어쩔 땐 저보다 더 열렬히 화답하기도 하고.

어쨌든 결말은 늘 농염한 입맞춤이었고, 때에 따라선 다시 둘만의 사랑을 이어가기도 했는데.

그런데 그런 리엘라가 옆에 없었다.

헤르한의 아침 일과가 통으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홀로 적막하게 이불을 걷고 일어난 헤르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리엘라 없이는, 어떻게 해도 하루가 제대로 시작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리엘라는?”

밖으로 나간 헤르한은 시종장이 정중히 문안을 올리기도 전에 먼저 물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외출하셨습니다.”

“어디로?”

“병영으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병영?

처음엔 의아하게 고개를 비틀던 헤르한은 이내 답을 떠올려냈다.

아. 아멜리아 사제.


“……참나.”

그새를 못 참고 쪼르르 가버렸나. 어제도 그렇게 발을 못 떼더니 아침 댓바람부터.

헤르한은 리엘라가 귀엽고 어처구니없어서 웃었다.

시종장 역시 그를 따라 웃으며 덧붙였다.


“뭘 많이 들고 가셨습니다.”

설명을 들어보니, 시종과 호위 기사들을 잔뜩 대동해 온갖 짐을 꾸려갔다고 한다.

옷이며 먹을거리며, 아멜리아 사제에겐 당장 필요도 없을 다기와 촛대, 만년필, 등등.

그냥 손에 들 수 있고, 건네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아. 오셨습니까. 폐하?”

헤르한은 직접 병영 공관으로 이동했다.

과연 리엘라는 헤르한이 온 줄도 모르고 방 안에서 아멜리아와 대화 삼매경이었다.


“별일은 없었나?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정황은 없었고?”

아시온에게 물으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냅다 대답했다.


“예. 위험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황후 폐하가 저렇게 말씀을 많이 하는 건 처음 봤거든요. 새벽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대화를 하시는데 저러다가 목이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헤르한은 일부러 방 안쪽을 향해 헛기침했다.

무려 황제가 직접 데리러 왔으니 꾸역꾸역 일어서면서도, 리엘라는 쉽게 발길을 떼지 못했다.


“폐하! 그거 아세요?”

리엘라는 헤르한에게 억지로 잡혀 나온 후에도 들뜬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본느 사제는 무려 3개 국어를 하셨대요. 남방어도 하시고 고대어도 하시고. 저는 제국 문자도 서툴러서 아직 가끔 틀리는데. 똑똑한 건 그리 닮지 못한 걸까요.”

“…….”

“또 이본느 사제는 아멜리아 사제 말고도 다른 아이들을 많이 데려와 거두셨대요. 아멜리아 사제는 그중에서 자기가 제일 귀염을 받았다고 확신하는데 그건 모를 일이죠. 어쨌든 이본느 사제는 참 성품이 고우신 분이었던 것 같아요.”

“…….”

“아 참! 아멜리아 사제가 이본느 사제의 초상화 하나를 갖고 있다는 거 아세요? 다음에 신전에 다녀와서 꼭 가져다주겠다고 했는데, 과연 어떤 모습일지 너무 궁금하고…….”

헤르한은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함락 당하듯,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최근 들어 리엘라가 이렇게 쫑알쫑알 쉬지 않고 재잘댄 적이 있던가.


“그렇게 좋아?”

“네? 아…….”

리엘라는 순간 머쓱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고 보니 병영까지 황제가 직접 자기를 데리러 오게 만들고.

또 본궁까지 돌아가는 길에도 내내 이본느 사제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고작 이름만 알았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도 기뻐?”

“이름만 안 게 아니에요. 그분에 대한 기억을 전해 들었잖아요. 어떤 풍경을 좋아하셨는지, 어떤 말을 많이 하셨는지. 기분이 좋을 땐 그분이 어떤 표정을 지으시는지.”

리엘라는 수줍어하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헤르한은 고개를 살짝 틀고서 그런 리엘라를 빤히 보았다.

크게 웃을 땐 언제고 이제 헤르한의 눈썹에는 힘이 풀어져 있었다.

리엘라가 참 예뻐서 마음이 좋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리엘라가 마냥 예뻐서 마음이 안 좋기도 했다.


“이본느 사제의 종적을 열심히 찾아볼 테지만, 그래도 만나기는 어려울 수도 있어.”

한없이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리엘라는 그제야 그가 왜 이렇게도 아프게 저를 보았던 것인지 깨닫고서,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렇게 돌려서 말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알아요. 이본느 사제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을 거라는 걸.”

아멜리아도, 헤르한도. 직접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모두가 짐작할 사실.

이본느 사제는 죽었을 것이다.

아마도 안투의 후손을 쫓던 누군가로부터 리엘라를 지키다가.

그게 이본느 사제가 신전에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고, 어린 리엘라가 그녀의 목걸이를 대신 건 채 홀로 버려져 있던 이유일 것이었다.


“아멜리아 사제처럼 많은 것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저도 하나 기억하는 게 있거든요.”

“무엇인데?”

“목소리요.”

 


“……꼭 살아남아야 한다. 꼭 살아남아. 응, 알았지, 리엘라?”

 


“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꼭 살아남으라고 말하던 목소리. 그걸 다시 떠올린 것만으로도 저는 좋아요. 폐하도 그랬던 것처럼. 저도 버려진 게 아니라 지켜진 거였다는 걸 알았잖아요.”

때마침 사방에 그윽한 꽃향기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한낮의 가을 대기를 떠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딘가에 핀 꽃으로부터 날아올랐을 이 향기처럼.

자신 역시 어딘가에 뿌리를 내린 존재였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저는 너무 기뻐요.”

리엘라는 꽃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헤르한의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조금만 덜 기뻐할까요?”

헤르한은 리엘라의 코끝을 귀엽게 톡톡 치다가 볼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아니. 난 네가 내 앞에서는 늘 그렇게, 더 마음껏 행복해하면 좋겠어.”

“……응.”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의 품 안에 꼭 안겨 들었다.


“폐하 덕에 난 너무 버거운 행복을 누려요.”

헤르한은 대답하는 대신 리엘라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내 덕이라니. 나를 살게 하는 여신께서 내게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

덕분에 헤르한은 기합이 더욱 바짝 들었다.

폐하 덕에 버겁도록 행복하다고, 리엘라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헤르한이 더 힘을 내서 싸우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명하신 대로 확인해 보았으나, 여기서 열람할 수 있는 기록으로는 이본느 사제에 관해 남아 있는 정보가 없었습니다. 아멜리아 사제의 말대로였습니다.”

회의실.

아시온이 보고를 전하며 서두를 뗐다.

오전에, 아멜리아가 아시온을 통해 조심스럽게 전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본느 사제에 관해서는 저도 계속 조사해왔지만……. 제 선에선 찾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아무리 신전을 떠났다고 하더라도 신관으로 역임했던 이의 기록은 다 남기 마련인데, 이본느 사제에 대한 기록은 신전의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질 않았습니다. 꼭 누군가 일부러 지운 것처럼요.”

 
‘꼭 누군가 일부러 지운 것처럼’.

그 말을 들을 때, 헤르한은 황실의 역사에서 지워진 제 어머니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런 비극을 갖는 건 나 하나면 족한데.’

상념에 젖은 헤르한 앞에서 아시온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그가 꺼낸 건 ‘보고’가 아니라 ‘의혹’이었다.


“이본느 사제가 신전을 떠난 후 약 6년쯤 후에 로마노 대주교가 급사했습니다. 그때 루도비코 주교가 새 대주교로 올랐고요. 시기가 아무래도 묘하게 맞물립니다.”

중앙 신전의 주인이 바뀐 해.

연맹 세력이 신전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도 그때.

리엘라가 어머니를 잃고 헤매다가 용병단을 만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아시온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이 묘하게 엉킨 정황들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인물은 하나였다.


“루도비코 대주교를 칠 때가 된 것 같군. 그를 황실로 소환할 수 있겠나?”

중앙 신전의 대주교를 불러오라니, 대체 무슨 수로, 대체 어떤 명분으로.

그런 걱정과 의문이 터져 나와야 할 상황이건만 회의실에 둘러앉은 이들 중 누구도 헤르한의 명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준비하겠습니다.”

주군이 가고자 하는 길이라면 모두가 그저 묵묵히 갈 뿐이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

헤르한은 회의를 마치고 일찍 본궁으로 돌아왔다.

몰래 목걸이를 조사하다가 리엘라에게 혼쭐났던 것이 바로 엊그제였다.

그래서 오늘은 회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리엘라에게 전하려는데, 정작 그녀가 또 없었다.


‘설마 그새 또 아멜리아 사제에게 간 것은 아니겠지?’

설마는 역시나였다.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떴다.


“오늘 밤은 병영의 공관에서 손님과 함께 주무시겠답니다.”

“뭐라고?”

헤르한은 델쿠르 백작이 전한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되묻고서야 헛웃음을 터트렸다.

헤르한은 당장 망토를 걸치고 전장에 나서는 사람처럼 병영으로 향했다.


“가족을 찾아주면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심지어 아멜리아 사제는 친자매도 아니잖아?”

“황후 폐하께는 친자매보다 더 특별한 분이죠. 어머니에 대한 얘길 들려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잖아요.”

“그래서, 내 황후의 외박이 합당하다는 건가?”

“합당한 것까진 모르겠고, 어쨌든 지금 아멜리아 사제는 폐하도 못 주는 걸 황후 폐하께 드리고 있다는 얘기…….”

아시온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싸늘하다 못해 칼바람이 쌩쌩 부는 주군의 눈총에.


“아, 폐하!”

그렇게 예고도 없이 쳐들어간 병영 공관에서, 헤르한은 막 밖으로 나오던 아멜리아 사제와 부딪쳤다.


“폐, 폐하.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부르려던 참이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제 방에서 주무시겠다고 버티시는데, 제 생각에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아멜리아는 멋쩍은 표정으로 방문을 열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대화 중에 잠드셨어요. 종일 많이 고단하셨는지.”

헤르한 기가 찬다는 듯이 한숨을 뱉었다.

리엘라는 바닥의 카펫 위에 앉은 채로 침대 맡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시종을 부르겠습니다. 폐하.”

“됐어.”

아시온은 딱히 두 번 묻지 않았다.
애초에 정말 시종을 부를 생각으로 꺼낸 말도 아니었다. 어차피 주군이 직접 나설 것을 알았으니까.

헤르한은 자기 망토를 벗어 리엘라를 몸에 따뜻하게 두르고는, 그대로 허리를 받쳐 품에 안아 들었다.


“리엘라. 내 앞에서 마음껏 행복해 하랬지, 누가 겁도 없이 외박을 하랬어?”

 

 
헤르한의 질책은 너무나 달콤해서 잠든 리엘라를 깨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리엘라는 그저 코끝에 감도는 찬바람에 기분 좋게 몸을 떨면서, 포근한 품속으로 더 파고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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