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버려진 게 아니라 지켜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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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버려진 게 아니라 지켜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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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버려진 게 아니라 지켜진 것
2022.10.16.
“무슨 말씀이십니까?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지만 이건 제 개인 물품입니다. 돌려주십시오. 폐하!”
“무엄하다, 감히 황후 폐하께!”
내내 아멜리아를 경칭하던 아시온이 이제는 경직된 팔로 그녀를 꽉 붙잡았다.
아멜리아는 옴짝달싹 못하면서도 목소리만은 다부지게 외쳤다.
“그건 제겐 아주 소중한 물건입니다. 폐하. 무엇이 되었든 간에, 폐하께서 찾으시는 그런 물건이 아닙니다!”
아멜리아가 아니라고 한다고, 그 물건이 리엘라가 모르는 물건이 되는 건 아니었다.
꾸중과 같은 말투로 아멜리아를 다그친 건 헤르한이었다.
“이것이 어디서 났느냐.”
“…….”
“언제, 누구에게서 난 물건이냐고 벌써 여러 차례 물었다.”
“…….”
아멜리아는 입을 열지 않았다.
황제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것이 크나큰 불경임을 뻔히 알 것이면서.
그래서 모두는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평생 지니고 있던 것입니다. 그 외엔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렇다 할 해명도 하지 않고 그저 우기기만 하니, 그녀가 의뭉스러운 속셈을 가진 거라고 여길 수밖에.
“침묵하겠다, 라.”
“…….”
“그 선택이 그대를 죽음으로 내몬다고 해도 끝까지 침묵할 수 있을까?”
“…….”
헤르한의 그 말에 아멜리아가 저항하듯 굳센 눈을 들어 보였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 긴장감이 짙어졌다.
리엘라는 온통 혼란스러워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신전과 싸워나갈 얘기를 하며 전우애까지 나누던 사이였는데.
“아시온. 아멜리아 사제를 데리고 나가.”
체포하라는 뜻이었다.
아시온에게 끌려 나가는 동안에도, 아멜리아는 계속 고개를 가로저으며 황제를 부를지언정 목걸이에 대한 진실은 실토하지 않았다.
“아멜리아 사제…….”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리엘라는 절박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아멜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리엘라는 그녀를 차마 붙잡거나 옹호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행크의 목걸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걸 왜 아멜리아 사제가 가진 건지…….”
아멜리아가 나가고 난 뒤.
테이블 위는 그녀가 저항하면서 흐트러뜨린 신전의 보석들로 어지러웠다.
리엘라는 그 가운데 놓여 있는 푸른 보석을 집어 들었다.
매끄러운 표면. 익숙한 빛깔.
어릴 때 지긋지긋하게 보았던 이게, 왜 여기에.
“그건 행크의 것이 아니야. 리엘라. 네 것이지.”
헤르한은 짐짓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그건 리엘라에겐 그리 담담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행크가 널 발견했을 때 네가 목에 걸고 있던 물건이야. 그자가 어린 네 신발을 벗겨 팔아먹었듯이, 그 목걸이도 빼앗아서 제 것처럼 메고 다니다가 돈이 궁하니 팔아 버렸던 거였지.”
리엘라는 눈을 부릅떴다.
‘이게 내 거였다고?’
하얗게 펼친 손바닥 위.
엄지손톱만 한 푸른빛의 작은 돌멩이 하나가 리엘라에게 건넨 진실은 참 무거웠다.
“그걸 카일이 도로 사 갔고.”
“……카일이요?”
“그래. 그자는 그때부터 너를 주시하고 있었던 거다. 그레타의 기억을 읽었을 때, 최근까지도 카일이 이걸 갖고 있는 걸 보았어. 그런데 그게 지금 아멜리아 사제의 손에 있다는 것은…….”
헤르한이 차마 끝맺지 못한 말은 제스가 이었다.
“아멜리아 사제가 카일 파를란테와 한패로 작당했을 가능성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제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먼저 나간 후로도 리엘라는 꽤 오래 멍했다.
아멜리아 사제가 위험한 인물일 수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정신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제 거라고요?”
“그래.”
더 정확히는.
“네 가족이 네게 남긴 물건이었겠지.”
잠깐 침묵이 일었다.
“폐하는 그걸 언제 아셨나요?”
“행크가 왔을 때.”
“그럼 그때부터 계속 조사하셨겠군요. 목걸이의 행방에 관해서. 나에게 이걸 남겨준……, ‘가족’의 존재에 관해서.”
“…….”
“그리고 그걸 이제야 저에게 말씀하시는 거고요.”
“그래.”
헤르한은 리엘라의 눈을 피하지 않고 이실직고했다.
그래서 리엘라는 그가 더 미웠다.
“저만 모르는 제 얘기가 아직 더 있나요?”
원망을 가득 담아 묻는데도 헤르한은 변명 한마디 없었다.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을 남겨 두고 회의실을 떠났다.
*
병영에서 나온 리엘라는 정처 없이 황궁을 걸었다.
심란해서. 또, 헤르한에게 시위라도 할 마음에.
병영 밖에서 기다리던 시녀들과 근위대 기사에게도 따라오지 말라고 하고 보란 듯이 혼자 걷는데, 어느 순간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가 뒤를 따랐다.
아멜리아를 제스에게 넘기고 허겁지겁 리엘라를 따라온 아시온이었다.
“나 감시해요? 내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럴 리가요. 가장 유능한 무인의 호위를 받아 마땅한 몸이시니 곁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리엘라는 아시온을 노려보았다.
사실은 헤르한을 노려보고 싶었지만, 그를 버리고 나와 버렸으니 꿩 대신 닭이었다.
“폐하 성격 진짜 고약한 거 아세요? 맨날 나만 따돌려요.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어요.”
“이번 일은 오해이십니다. 정말 곧 말씀하려고 하셨어요. 결혼식 전까지 꼭 목걸이를 찾아 드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얼마나 애를 쓰셨…….”
“와. 설마 결혼식 미룬 것도 그것 때문이었나요?”
아시온이 뜨끔하며 눈을 부릅떴다.
그는 눈치가 없는 만큼, 속을 숨길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됐어요. 다 한통속인 사람한테 하소연해서 뭐 해.”
리엘라는 한탄한 뒤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시온은 기꺼이 주군 대신 매를 맞겠다는 듯이 다시 리엘라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아까 아멜리아 사제와 웃으며 지나왔던 길.
또, 어제 헤르한과 산책하던 길을 조금 걷다가 발길을 한 곳은 본궁 로비 동쪽의 회랑이었다.
역대 황가 일원들의 초상을 모아 놓은 방이라, 초상화의 방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곳.
밝은 조명이 비추는 회랑의 한쪽 벽엔 이 제국을 이끌어 온 왕조의 면면이 걸려 있었다.
수십 개의 액자를 따라 걷다 보면 나오는 제일 끝은 아직 빈자리.
곧 헤르한과 리엘라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리게 될 곳이었다.
“…….”
그 빈자리를 보는 마음도 이상하지만, 오늘따라 눈길이 더 가는 것은 그 자리보다 한 칸 이전에, 황후의 보관을 쓴 어떤 여인의 초상화였다.
헤르한과는 닮은 구석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여인.
“대부인의 초상화는 이곳에 모시지 못했습니다.”
아시온이 말하는 ‘대부인’은 헤르한의 친어머니를 뜻했다.
리엘라도 아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지금 바라보는 저 초상화 속 선대 황후는 헤르한의 계모임을.
초상화 속 여인은 제 핏줄이 아닌 어린 황태자에게는 눈길은커녕 다정한 손길 한번 주지 않았을 것처럼 냉랭해 보였다.
“황실 역사 수업 때 들었어요. 폐하의 친어머니께서는 폐하가 어렸을 때 병으로 돌아가셨다고요.”
“단순한 병마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숨겨진 비화가 있을 거라는 짐작은 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한때 번듯하게 황후를 지내고 황태자까지 낳은 여인의 초상화 한 장이 이 황궁 어디에도 걸리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일찍이 특별한 힘이 발현한 폐하를 두고 당시 황후이셨던 대부인과 황비 사이에 알력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황비에게 폐하가 후손이라는 사실을 들켰던 건가요?”
“예. 대부인은 그 점을 빌미로 잡혀 황후 자리를 내어 주시고도 계속 위협을 당하시다가 끝내 목숨을 구하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폐하가 황실 밖으로 도망쳐 살았던 것도 그래서…….”
간악한 황비는 헤르한의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았고, 곧 그의 아들이 새 황제로까지 즉위했다.
그래도 헤르한에 대한 그들의 견제는 끊이질 않았다.
지치지도 않고 사라진 황태자 헤르한을 쫓았고, 계속해서 암살자를 보내왔다.
“리오타 왕국도 그 입김에 이용당했던 겁니다.”
리엘라는 뜨거운 날숨을 뱉어냈다.
어린 헤르한의 것을 모조리 빼앗고 그를 황궁 밖 모진 세상으로 몰아내었을 이들은 아직 금테가 번쩍이는 액자 속에 고고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까?
어떻게 저렇게 나빠?
보석같이 소중한 내 사람이 괴롭힐 데가 어디 있다고.
리엘라는 왈칵 치미는 울분에 욕지기를 머금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 폐하도 이랬겠구나.’
행크에게 모질게 당하는 나를 보았을 때.
그 목걸이가 어떤 목걸인지도 모르고, 마냥 빼앗기고 살았던 나를 보았을 때.
이렇게 화가 나고 속상했겠구나.
“근위대장이라는 게 감히 황제의 은밀한 가족사에 대해 멋대로 떠들고 다녀?”
단단한 발소리와 함께 헤르한의 질타가 날아든 건 그때였다.
“에이, 폐하. 저 정도 되는 충성스러운 부관이니 폐하께서 여태 끙끙거리고 못 한 얘기도 대신 해 드린 거 아닙니까?”
“주제넘게 남 일에 간섭하지 마라.”
“남 일이라니요! 서운하게!”
두 사람이 씩씩하게 드잡이하는데 리엘라는 왠지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아시온이 물러나고 헤르한의 발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다가오던 발소리는 리엘라와 몇 발 거리를 둔 자리에서 애매하게 멈추었다.
검을 든 부관은 엄청 힘차게 쫓아내 놓고, 리엘라에게는 한없이 조심스럽기만 한 남자.
“리엘라. 옆에 가도 되나.”
그런 그가 정성스럽게 물었다.
리엘라가 대답하지 않자,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물었다.
“안아도 돼?”
대답하는 대신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는데도 헤르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큰 보폭으로 걸어 리엘라를 뒤에서 안았다.
등을 단단히 받쳐주는 힘에 리엘라는 그제야 마음이 든든하면서도 울컥했다.
제 어머니의 초상화도 벽에 걸지 못하고 억울하게 쫓겨났을 어린 소년이, 이제는 이 땅 위에서 제일 강한 남자가 되어 자신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에.
“저 나쁜 인간들 초상화는 그냥 치워버리지, 왜 계속 걸어 둬요?”
“……잊지 않으려고. 내 사람들을 지키려면 언제나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는 걸.”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무감해질 법도 한데, 헤르한의 대답에는 마치 어제의 적을 대하듯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게, 평화롭게 지내게만 하면서, 힘든 건 자기가 혼자 다 하려고.”
리엘라는 헤르한에게 깊이 몸을 기대며 안겼다.
투정이자 위로였다.
등 뒤로 헤르한의 가슴이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며 꿈틀거렸다.
엇박자의 움직임은, 그가 할 말이 있으면서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목걸이 얘기를 미리 못 한 건…….”
그렇게 머뭇거리다가 꺼낸다는 말이 결국 아까 일에 대한 사과와 변명이라.
리엘라는 여태까지 꾹 참았던 웃음을 피식 뱉어냈다.
“제가 아플까 봐 그랬겠죠. 안 들어도 뻔한 걸.”
“…….”
“저도 그랬어요. 저도 폐하의 어머니에 관해 묻지 못했어요. 어떤 사연일지 알 것 같아서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그러니 당신도 그랬겠지.
리엘라는 제 허리를 감싼 헤르한의 팔뚝 위에 손을 얹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참 많이 무섭고 힘들었겠어요.”
“그리 아프지는 않았어.”
참 헤르한다운 허세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덧붙인 이유가 참 그럴듯했다.
“난 버려진 게 아니라, 지켜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렇구나.
당신은 참 강한 사람이네.
우는 대신에, 지켜준 사람의 마음에 보답해 일어나서 싸울 줄 아는 사람이니까.
“리엘라. 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헤르한이 리엘라를 꼭 끌어안은 채로 말을 이어갔다.
“어린 너에게 그 목걸이를 걸어준 사람. 널 지키려던 사람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너 역시, 버려진 게 아니라 지켜진 거였을 거야. 그러니 그게 누구든, 어디에 있든 내가 반드시 찾아 줄게.”
“제가 눈치 채기 전에 먼저 찾아내서 멋있게 보여 주려던 계획은 실패했지만요?”
리엘라는 드디어 몸을 돌려서 헤르한과 눈을 맞추었다.
“혼자 애쓰지 말고, 이제 같이 찾으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