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 또다시 ‘그녀’의 얼굴이 (135/154)


  • #135 또다시 ‘그녀’의 얼굴이
    2022.10.13.


    단란한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리엘라는 헤르한과 황궁을 산책했다.

    늦가을에 핀 분홍장미도 구경하고, 향기가 가득한 정원 한가운데서 심호흡도 하고, 아이처럼 맞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참 평화롭게 노을이 지는 길을 걷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리엘라는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폐하. 이제 하실 말씀 하세요.”

    “응?”

    “아까부터 저한테 하실 말씀 있었잖아요. 뭔데 그렇게 계속 뜸만 들이고 있어요?”

    헤르한은 뜨끔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물으니, 리엘라는 어찌 모르겠냐며 웃었다.


    “계속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제 눈치만 살피셨잖아요. 산책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시면서 일부러 나오시고. 또, 평소엔 호위 기사 없이는 아무 데도 못 가게 하면서, 지금은 일부러 기사들을 멀리 물리고 걷고.”

    지적을 하나하나 듣고 보니 이보다 더 허술할 수는 없었겠다, 라는 생각에 헤르한도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허술한 본모습을 보아주는 게 오직 리엘라뿐이라는 것.

    헤르한은 리엘라를 애틋하게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어렸을 때 만났던 도련님 말이야.”

    “네? 카일?”

    “그래. 카일.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얼마 전에 광장에서 제가 닮은 사람을 본 것 때문에 그러세요?”

    헤르한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엘라는 그의 깊고 침착한 눈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질투나 걱정으로 묻는 얘기는 아닐 것이었다. 이제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리엘라는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카일이 정말 엔릴의 후손이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 못할 확률이 높겠죠. 수용소에 가 있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폐하처럼 약으로 버티고 있을까?”

    “그자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는 알아?”

    리엘라는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워낙 어릴 때라 기억도 잘 안 나지만, 특별한 걸 본 기억도 따로 없어요. 왜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

    헤르한은 이제 더 머뭇거리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레타의 기억에서 그자를 보았다. 연맹을 이끌고 신전을 조종한 남자, 우리에게 꼭두각시를 만들어 보낸 자가 바로 그 카일 파를란테야.”

    “……네?”

    순간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마냥 향긋하다고 생각했던 꽃향기가 어쩐지 갑자기 머리를 어지럽히며 리엘라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흔들었다.

    아주 살짝.

    리엘라는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함께 걷기 시작한 그때부터 헤르한의 다정한 손이 리엘라의 손을 단단히 잡고 단 한 순간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꽤 오랜 정적이 흘렀다.

    헤르한이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리엘라는 지금까지 그의 모든 여정에 함께해 왔고 함께 싸워 왔으니, 충분히 제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을 다 맞추어낼 수 있었다.


    “폐하.”

    사라락 풀꽃이 흔들리는 소리만이 이어가던 침묵을 리엘라가 마침내 깼다.


    “혹시 저 때문일까요?”

    리엘라가 그렇게 오래 생각하고, 오래 고민하고서 한다는 말은 또 헤르한의 속을 뒤집는 말이었다.


    “제가 어릴 때 카일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런 일은 없었…….”

    “그래. 네가 그 용병단에 있지 않았으면 오늘 이런 일은 없었겠지. 하지만 그러면 우리도 만나지 못했을 테고. 너는 설마 네 삶에 내가 없기를 원하는 건 아니지?”

    오늘에 이르기까지 너에게 잘못된 걸음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아주 단호한 표정.

    그 강인한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리엘라는 짧은 순간이나마 자신이 또 얼마나 나약하게 굴었는지를 깨달았다.


    “네. 아니에요.”

    다시, 부는 바람이 향기로웠다.


    “폐하를 모르고 사느니, 폐하랑 이렇게 손잡고서 열심히 나쁜 놈들이랑 싸우면서 사는 게 훨씬 낫죠.”

    헤르한은 그제야 뿌듯하고 마음이 놓였다.

    리엘라가 담담하게 사실을 받아들여 다행이었다.


    “걱정하지 마. 리엘라. 그자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내가 더 강해.”

    “당신은 황제이니까?”

    “아직도 모르네. 널 가졌으니까.”

    아.

    그렇지. 난 엄청 대단한 안투의 후손이지.

    리엘라가 웃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아시온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한창 분위기 좋을 때 나타났다며 헤르한이 살벌하게 그를 노려보았지만 아시온은 고개를 푹 숙이기만 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아시온이라도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 때는 늘 이유가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방문객이 있습니다.”

    방문객? 이 시간에? 예정도 없이?

    어쨌든 적당히 물러나 주려는 리엘라를 아시온이 붙잡았다.


    “황후 폐하도 함께 가시지요.”

    그렇게 아시온을 따라간 곳은 황궁 정문도, 본궁의 알현실도 아니고, 황국 동쪽 병영 뒤로 난 쪽문 근처.

    리엘라는 거기서 나타난 이를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람과 동시에 반가움이 밀려들었다.


    “송구합니다. 누추한 행색으로 두 분 폐하를 뵙습니다.”

    “아멜리아 사제!”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아멜리아 사제는 황실의 비밀스러운 부름에 응한 것이었다.

    전신을 덮는 로브로 머리카락 한 올까지 꽁꽁 감추고, 이렇게 쪽문으로 은밀히 들어왔는데.


    “어떡하죠? 나 때문에 들키면 안 되는데. 놀랐죠? 너무 반가워서 소리를 질러 버렸네요.”

    리엘라의 머쓱한 웃음에, 아멜리아는 아직 긴장을 떨치지 못한 웃음으로 어색하게 화답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황후 폐하.”

     

    *

    아멜리아 사제는 병영에 딸린 공관에서 은밀하게 묵기로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겠군.”

    “아닙니다. 폐하께서 뒤를 잘 봐주신 덕택에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루도비코 주교는?”

    “아직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습니다. 그레타 전 왕녀의 처형 후로는 오히려 긴장을 다 놓은 것 같았습니다.”

    황제가 아멜리아를 통해 신전의 근황을 듣는 사이, 아시온과 제스가 묵직한 짐을 들고 와 아멜리아의 방 안에 내려놓았다.

    그 둘을 지휘한 건 리엘라였다.


    “아멜리아 사제. 일단 급한 대로 내 것을 좀 가져왔어요. 앞으로는 이 옷들을 입어요.”

    “네?”

    “여기서 계속 그런 로브나 사제복을 입고 돌아다닐 순 없잖아요. 그나마 요즘엔 황궁에 외부 손님이 많아서 그렇게 눈에 띄지 않을 테니 다행이에요. 그래도 조심해야 해요. 누가 사제를 알아보면 큰일이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황후의 옷을 그냥 받아도 되는가.

    당황한 아멜리아 앞으로 황제 헤르한이 다가왔다. 옷을 받으라든가, 그러지 말라든가 말할 줄 알았는데.


    “아멜리아 사제. 지금 바로 증인들을 만나 보러 가겠는가?”

    황제는 본론만 꺼내 들었다.

    심지어 그 본론마저 리엘라의 만류 한 번에 바로 끊어졌다.


    “폐하. 아멜리아 사제는 지금 막 도착했잖아요. 여독이 짙을 거예요.”

    황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바로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내일.

    황제의 단답이 떨어지자마자 리엘라가 다시 말을 이었다.


    “따뜻한 물을 준비해 두라고 했으니 씻고 오늘은 편안히 쉬어요. 목욕하는 동안 아시온 대장이 뒤를 봐줄 거예요. 좀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아시온 대장은 그리 엉큼한 사람은 아니니까…….”

    “화, 황후 폐하!”

    아시온이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지만 리엘라는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방 안을 둘러보면서 더 챙겨야 할 것들을 작게 중얼거렸다.

    이불이 얇아 보이네. 촛대도 비어 있고.

    황제와 황후 부부는 그렇게 떠났다.

    아멜리아는 떠나는 리엘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근위대장이 이끄는 곳으로 가서 몸을 씻었다.

    중앙 신전에서 이곳 황궁까지는 말로 꼬박 달려도 일주일이었다.

    아멜리아는 혹시 제 정체를 들킬까, 누군가에게 뒤를 밟히지는 않을까 내내 긴장하며 달려왔다.

    안전하게 황궁의 성문 안으로 들어선 그 순간엔 정말 긴장이 풀려 기절할 뻔도 했다.

    그런 속내를 알아주고 자신을 편히 쉬게 해준 것은, 그 따뜻한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황후.


    “……다 마치셨으면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황제의 근위대장은 아멜리아를 친히 다시 방 안까지 들여보내 주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안으로 돌아와 보니 그새 침구가 두툼하고 뽀송뽀송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촛대엔 은은한 불이 켜져 있었고, 침대 옆 탁상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프와 갓 구운 빵도 놓여 있었다.

    또다시 ‘그녀’의 얼굴이 생각났다.

    왠지 마음 한편이 아릿했다.


    ‘이상하다.’

    아멜리아는 제 가슴을 조용히 짓눌렀다.

    마음이 왜 이러지.

    *

    다음날.

    아멜리아는 리엘라가 가져다준 의상 중 하나를 골라 입었다.

    평생 하얗고 품이 넓은 사제복을 입다가 이런 드레스를 갖추어 입는 것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헤매느라 감히 황제와 황후를 기다리게 만들어 송구해 죽겠는데도, 리엘라는 아멜리아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잘 어울리네요! 아멜리아 영애.”

    “예, 예?”

    아멜리아가 더 당황할 새도 없이 귓가에 리엘라의 귓속말이 날아들었다.


    “혹시 듣는 귀가 있을지 모르니 사제라는 호칭은 뺄게요. 오늘만 아멜리아 영애, 해요.”

    아멜리아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가지.”

    황제가 말했고 그 옆에 황후가 단정한 품새로 함께 걸었다.

    그들의 뒤를 아멜리아가 따랐고, 근위대장을 비롯한 황제의 참모진 몇 명도 함께 이동했다.

    병영 복도에서 낯선 이들을 마주쳤지만 아무도 아멜리아를 눈여겨보거나 의식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황제와 황후의 위용에 충성스럽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렇게 이동한 병영 지하의 어느 회의실.

    미리 도착해 있던 제스는 간단한 눈짓으로 아멜리아에게 아는 체를 하고는, 그녀 앞에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 신전에서 도망치던 놈들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루도비코 주교가 그레타 전 왕녀를 떠맡기는 대가로 내놓은 것이라 추정됩니다. 아멜리아 사제께서 확인해 주시면 좋겠군요.”

    주머니를 거꾸로 뒤집자, 한 줌은 될 법한 각양각색의 보석들이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아멜리아는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그 보석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았다.


    “예. 그렇네요. 이건 중앙 신전의 보물이 맞아요. 대주교께서 개인적으로 소장하신 것들도 있겠지만, 이 핑크 다이아 원석과 진주는 신전의 것입니다. 이 청금석은 신전의 사제들이 다 지니는 것이고……. 여기, 제가 가져온 것과 비교해 보시면 더 확실할 겁니다.”

    그러면서 아멜리아는 아주 소중하게 지니고 있던 주머니 하나를 열어 그 안에 든 보석들을 보여주었다.

    그때였다.


    “아멜리아 사제.”

    “예. 폐하.”

    연맹과 신전의 결탁을 밝힐 증거를 대조하느라 정신없던 아멜리아가 고개를 들어보니 문득 자신을 향하는 황제의 눈빛이 싸늘했다.

    그건 단지 황제가 가진 기백을 뛰어넘어, 얼핏 공격적인 기세까지 깃든 눈빛이었다.

    황제 헤르한은 지금껏, 소문대로 냉정하긴 했어도 저 정도로 사납게 저를 노려본 적은 없었다.


    ‘뭐가……. 잘못됐나?’

    둘러보니 황제의 부관들도 비슷한 눈치였다.

    갑자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멜리아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멜리아와 똑같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인 건 리엘라뿐이었다.


    “리엘라. 내 쪽으로 와.”

    심지어 황제가 리엘라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듯 제 옆으로 끌어당기자, 거의 동시에 근위대장이 아멜리아의 양손을 뒤로 틀어 단단히 붙잡았다.

    아멜리아는 혼란을 떨치지 못하고 떨며 물었다.


    “폐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헤르한은 한참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다가, 아멜리아가 꺼내 보인 그녀의 보석 중 하나를 가리켰다.

    에메랄드와 사파이어의 빛이 한데 섞인 빛깔이 신비로운, 타원형의 푸른 보석이었다.


    “아멜리아. 네가 어째서 이걸 가진 것이지?”

    아멜리아의 눈이 커졌다.


    “아, 이건 제 개인 소지품입니다. 신전의 물건이 아닙니다. 증거가 아닌데, 잘못 꺼냈…….”

    아멜리아는 그 보석을 다시 집어넣으려고 했지만 이미 아시온에게 결박당한 상태였다.

    황제는 전과 다르게 더 노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멜리아 사제. 다시 한번 묻겠다. 중요한 문제이니 솔직하게 대답해. 이 목걸이를 어째서 네가 갖고 있지?”

    그제야 얼떨떨하던 리엘라도 테이블 위에 놓인 보석을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억이 오래되어 잠깐 의심스러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물건.


     


    “저거, 행크의 목걸이인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