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별까지도 질투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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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별까지도 질투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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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별까지도 질투하겠어요
2022.10.09.
화공의 스케치가 끝나갈 때쯤 헤르한은 웬일로 오늘 저녁을 손님과 함께하겠느냐고 물었다.
“손님이요? 누구인데요?”
“네가 좋아할 거야.”
헤르한의 말이 맞았다.
리엘라는 만찬장에 반듯하게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이를 알아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브레니케 공작!”
“안투의 현신이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예를 갖춘 인사를 주고받기가 무섭게 리엘라는 공작의 손을 맞잡았다.
“잘 지냈나요? 왕국은 안녕하고요? 그러니까, 리오타의 백성들은…….”
많은 말들이 리엘라의 목구멍을 비집어 나오지 못하고 툭 걸렸다.
그중 가장 큰 것은 리오타의 백성들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이었다.
그레타는 엄벌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함께 괴로워했을 백성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니까.
“폐하께서 걱정하실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왕국의 백성들 모두 비로소 법도가 바로 서고 황후 폐하께서 평화를 되찾으신 것에 기뻐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야.
여태 가슴을 꽉 조이고 있던 매듭 하나가 풀린 기분이었다.
“식사 후엔 함께 산책을 하시겠어요? 제가 황궁을 안내해 드릴게요.”
만찬 후, 리엘라는 브레니케 공작과 함께 황궁 정원을 산책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그새 더 의젓해지신 것 같군요.”
“그런가요? 오늘 온종일 초상화를 그린다고 기합이 들어 있어서 그런지.”
“그것 때문이 아니라도.”
브레니케 공작은 발을 멈추고 리엘라를 바라보았다.
노을을 가득 담은 참 온화한 눈빛이었다.
“황후 폐하에게서 빛이 납니다.”
붓질하는 화공에게서.
머리를 빗겨 주고 거울을 비추어 주던 시녀들에게서 종일 들으면서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말인데도.
리엘라는 왠지 가슴이 벅찼다.
비로소 황후의 권위를 인정받는 것만 같아서.
리엘라는 공작의 온정을 꼭 닮은 눈망울로 고개를 반듯이 펴고 대답했다.
“고마워요.”
리엘라는 화폭에 황후의 기품을 담아야 한다면서 내내 꾸며냈던 표정보다 더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환하게 웃었다.
*
“넌 가끔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
가운을 걸치고 막 잠자리에 들기 전, 헤르한이 하는 말은 난데없었다.
리엘라는 영문을 몰라 멀뚱거리다가 그게 브레니케 공작을 두고 한 말인 것을 깨달았다.
“네? 푸흡! 푸하하하.”
밖에서 대기하던 시녀들이 안에서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인기척을 낼 만큼 리엘라의 웃음소리가 컸다.
그래도 헤르한은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억울한 표정이었다.
“세상에. 폐하는 그러다가 제가 밤하늘에 올려다보는 별까지도 질투하겠어요.”
“몰랐나? 그쪽은 질투한 지 이미 오래됐는데.”
“네? 폐하!”
리엘라는 다시 웃다가 헤르한의 몸 위에서 그의 목에 팔을 걸쳤다.
헤르한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표정을 풀지도 않으면서, 손은 아주 자연스레 리엘라의 허리를 받쳤다.
“오랜만에 뵈었으니 반가워서 그런 거잖아요. 브레니케 공작은 제 고향 분이고, 또 제가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고, 꼭 어머니 같아서……. 참. 내가 이런 걸 왜 설명하고 있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질투할 대상이 따로 있지.
리엘라는 진지하게 해명하는 자기 자신도 웃겼다.
“사랑할 만한 좋은 사람들이 곁에 많다는 건 고마운 일이잖아요. 전 많은 사람들을 좋아해요.”
“많은 사람, 누구?”
헤르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루도 좋아하고 새나 양도 좋고. 델쿠르 백작도 좋고 아시온 대장도. 아. 그리고 제스 경은…….”
인심 써서 제스까지도 ‘좋아하는 사람들’에 포함시켜 주려는 그 찰나에, 재잘대던 붉은 입술 위를 헤르한의 붉은 입술이 덮었다.
시작은 장난 같은 입맞춤이었다.
장난을 치는 사람과, 그 장난에 뻔뻔히 응수하는 사람의 귀여운 ‘대결’ 같은 것.
하지만 점차 호흡이 깊게 얽혀 들면서 두 사람의 얼굴엔 장난기 대신 붉은 열기와 정염만 피어올랐다.
날이 싸늘한데도 몸은 속에서부터 후끈거렸다.
리엘라는 헤르한을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얇은 가운 덕에 헤르한의 성난 몸이 꿈틀대는 것이 전부 느껴졌다.
“내가 질투해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닌 건가?”
“아앗! 폐하…….”
리엘라가 부끄러워하건 말건 헤르한의 짙은 눈길이 리엘라를 구석구석 훑었다.
버릴 곳이 하나도 없이 다 동그랗고, 부드럽고, 예쁜 그녀를.
“이건 오로지 내 눈에만 담고 싶은데.”
“그, 그런 당연한 소릴……!”
리엘라는 아침에 헤르한이 아직도 내외할 게 남아 있냐고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적당히 둘러댔지만, 사실은 헤르한의 말이 맞았다.
리엘라는 아직도 그가 부끄러웠다.
그에게 자신을 내보이는 것도 부끄러웠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 이글거리는 저 눈동자와 눈을 맞추는 것이 부끄럽고, 그에게 깊이 안길 때마다 정신이 까무룩 해지는 것도 부끄러웠다.
그런 그가 붉은 입술로 제 몸에 입을 맞추어 줄 때면 꼭 그 부위가 불에 데는 것만 같았다.
바로 지금처럼.
“폐, 폐하……. 거긴 간지러워요.”
“그냥 간지러운 게 아닐걸.”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제가 아무리 여러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폐하뿐이라고요.”
리엘라의 매끄러운 등이 달빛을 걸치고 빛났다.
리엘라의 어깨를 만지던 헤르한의 손끝이 조급함을 꾹 억누른 채, 그 흰 등을 따라 훑어 내려갔다.
리엘라는 소름이 돋아 저도 모르게 몸을 오므리며 헤르한에게 기댔다.
그의 가슴팍에 이렇게 뜨거워진 이마를 기대는 것은, 이제부터는 당신이 나를 뜻하는 대로 해도 좋다는 의미였다.
“브레니케 공작에게 미안하지만 안 되겠네.”
헤르한의 목소리는 펄펄 끓었다.
“내일도 지각할 거야. 그러기로 지금 미리 정했고, 이건 황제의 뜻이니 너도 못 말려.”
*
밤새 헤르한에게 괴롭힘을 당한 리엘라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헤르한은 바로 옆에서 턱을 괴고 그런 리엘라를 지켜보았다.
나른하게 늘어져 쌔근거리는 그녀는 꼭 걸작의 여신상처럼 아름다웠다.
마음 같아선 그 모습을 닳도록 지켜보고 싶었지만 밤기운이 너무 싸늘했다.
땀을 많이 흘리기도 했고.
헤르한은 침대 아래 널브러진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슬립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더 두꺼운 새 가운을 들고 와서 리엘라에게 입혀 주었다.
날이 밝자마자 헤르한은 일찍 침실을 나섰다.
시녀들에겐 리엘라가 알아서 일어나기 전까지 절대 깨우지 말고 내실의 커튼도 열지 말라고 해두었다.
“폐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황후 폐하는 어디…….”
오전 정기 검진을 왔던 제스는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선 침실 문을 열지도 않고 바로 몸을 돌렸다.
늘 못 볼 꼴만 본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매일 아침 출근 도장을 찍는 걸 보면, 그래도 그는 제 임무 하나는 똑똑히 해내는 부관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쪽은 됐고 이리로 따라와. 브레니케 공작도 호출하고.”
헤르한은 그런 제스를 불러 세웠다.
“리엘라가 깨기 전에 조사 보고를 듣도록 하지.”
“예.”
*
“그렇지 않아도 파를란테 일가를 더 조사해보던 참이었습니다.”
브레니케 공작이 말했다.
이미 전에 황제가 조사를 명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파를란테’라는 이름에 대해선 유념하고 있던 터였다.
그녀는 파를란테가 황실의 정적(政敵)쯤 되는 집안인가 의심했었다.
조사해 보니, 확실히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은 일가였다.
“백작가가 아니라 남작이었습니다. 50년쯤 전에 왕궁 재정에 큰 금액을 기부하고 받은 임시 작위인데, 그마저도 얼마 안 가 박탈당했던 것 같습니다.”
“작위를 박탈당해?”
“네. 왕실의 눈이 닿지 않는 지방에서 고위 귀족을 사칭하며 온갖 자금을 끌어다 쓰고 장물을 거래했다더군요.”
“쉽게 말해 사기꾼이라는 거군요.”
제스가 한마디로 정의했다.
헤르한은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행크의 기억을 통해 잠깐 보았을 때도 파를란테 일가는 수상한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니까.
“작위를 박탈당한 이후로도 계속 사기 행각을 벌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체포하려고 왕실에서 병사를 보냈던 기록이 있는데…….”
브레니케 공작이 내민 문건은 허리가 뚝 잘려져 있었다.
출정한 병사가 소득 없이 왕궁으로 복귀한 기록만 남아 있고, 그 사유나 파를란테 일가의 행방 등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는 것이었다.
“이게 언제의 일이지?”
파를란테 일가의 행적이 뚝 끊긴 것.
“서류상 14년 전입니다.”
어린 리엘라가 어린 카일 파를란테를 만났던 것도 바로 그쯤.
그게 그 일가의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그 뒤로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렇게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던 어린 카일 파를란테가 어쩌다가 연맹을 이끌게 된 것인지.
그는 언제부터 리엘라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인지.
의문이 남은 부분은 많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폐하. 황후 폐하께…….”
“말해야겠지.”
가장 중요한 것은 리엘라의 안위였다.
“매번 이렇게 남의 뒤에 숨어서 싸울 줄밖에 몰라요? 다음엔 이렇게 비겁한 식 말고, 진짜 모습을 드러내 보는 게 어때요?”
카일은 벌써 수차례 황실에 꼭두각시를 보내왔고, 리엘라는 그에게 비겁하다고 도발까지 한 상태였다.
“황궁 경비는 어느 때보다도 엄중합니다. 황궁 안에 계시는 한, 황후 폐하께 위해가 갈 일은 절대 없습니다.”
아시온이 자신감을 내비쳤지만, 헤르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리엘라에게 말해야 해. 오늘 내가 직접 말하겠다. 그러니 너희는 아는 척 마. 카일이 가져간 목걸이나 가족의 유품 얘기는 특히 조심하고.”
*
헤르한이 침실로 돌아왔을 때, 사랑스런 리엘라는 아직도 침대 안에 파묻혀 푹 자는 상태였다.
‘나보고 늘 늦잠이 어쩌고 지각이 어쩌고 잔소리하면서.’
정작 헤르한은 늦잠을 잔 적이 없었다.
리엘라가 일어날 때까지 옆에서 리엘라의 평화를 지켰을 뿐.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헤르한은 아직 고요함 속에서 평화로운 리엘라의 이마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 자체로 순결하고 아름다워서 절대 깨우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헤르한이 카일 파를란테에 대한 얘기를 여태 미룬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지만.
‘오늘은 말해야겠지. 리엘라. 네가 좋아한다는 그 많은 사람 중에 어린 날의 그 소년은 없길 바라.’
헤르한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리엘라가 깨어났다.
리엘라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순간, 커튼을 열어젖힌 것처럼 헤르한의 세상이 환해졌다.
한 사람의 눈길 하나가 이런 경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폐하, 오늘도 또 지각…….”
“풉. 아니거든.”
아직 꿈결을 헤매는 주제에 눈을 뜨자마자 하는 게 잔소리라니.
헤르한은 잠기운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부드러운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그러네. 폐하. 예쁘게 옷 입었네.”
“응. 이른 회의가 있었어.”
“잘 끝났어요?”
헤르한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리엘라. 네게 할 얘기가 있는데.”
헤르한은 자신을 바라보는 리엘라의 맑은 눈동자가 마냥 좋았다.
그레타 일을 떨쳐낸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주 조금만 더 미뤄도 될까?
“……배고프네.”
“할 얘기라는 게, 배고프다는 말?”
“그래. 일어나. 리엘라. 같이 식사하자.”
그 뒤로도 헤르한은 계속 리엘라의 옆에서 시시콜콜한 일상을 보냈다.
오후엔 어제 왔던 화공이 다시 와서 리엘라의 초상화를 덧그렸고, 헤르한은 또 그 옆에 붙어서 어제와 다르지만 같은 질문으로 화공을 괴롭혔다.
“화공. 내 황후의 사랑스러움을 그대의 붓질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