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 블리니테 황후 폐하 (133/154)


#133 블리니테 황후 폐하
2022.10.06.



*

사방이 캄캄했다.


‘이상하네. 아직 아침이 안 됐나. 몇 시지?’

리엘라가 뒤척이며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단단한 팔이 다시 리엘라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잠결에 제대로 눈꺼풀을 들어올리기도 전.

아직 몽롱한 와중에 헤르한이 리엘라의 품으로 파고들더니 마구 입맞춤을 퍼부었다.


“으응……. 폐하.”

간지러운 느낌에 앙탈을 부리며 고개를 틀어 보았지만 그럴수록 리엘라를 구속하는 헤르한의 몸만 더 단단해져 갔다.

웃음을 참으며 헤르한의 이름을 불러도 보고, 저 역시 손끝을 세워 헤르한의 맨 옆구리를 간질여도 보고.


“몇 시예요? 네?”

말을 걸어도 봤지만 전부 소용없었다.

리엘라는 결국 저항하기를 멈추고, 헤르한의 몸을 밀어내던 손으로 대신 그의 두 볼을 감쌌다.

기꺼이 당신의 뜻에 화답하겠다며 그윽하게 바라봐주니 헤르한은 그제야 격하게 덤비던 것을 겨우 진정하고 눈을 맞추었다.

아직 시야가 어두운 가운데, 위에서 리엘라를 내려다보는 헤르한의 눈빛이 검은 바다처럼 깊고 강렬했다.

리엘라는 점점 다가오는 그에게 입을 맞추어 줄 것처럼 시간을 끌다가 일부러 그의 애를 태우듯 옆으로 슬쩍 빠져 나왔다.


“리엘라!”

막 잠결을 떨친 리엘라에 비해, 헤르한은 눈빛도 목소리도 또렷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어제도 그러더니.


“폐하. 또 일부러 안 깨우셨죠? 지금이 도대체 몇 시인데…….”

며칠 전부터 헤르한은 침실 안에 시계를 모조리 치워 버렸다.

리엘라는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커튼을 살짝 열어젖혔다가, 해가 중천에 뜬 하늘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늘도 지각이네요.”

“그래. 오늘도 지각이야.”

그 말은 어제랑 별다를 것도 없으니 아무 문제없다는 뜻이지.

헤르한이 여유롭게 거들먹거렸다.


“폐하!”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에게 잔소리를 한바탕 퍼부으려다가 흠칫 놀라 말문을 닫았다.

이불을 걷어 낸 헤르한이 몸을 드러내며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는 것이었다.

위로 길게 뻗은 팔이나 팔뚝에 도드라진 핏줄과 근육.

또 군살 없이 매끈하고 탄탄한 가슴을 보란 듯이 내보이는 모양새에, 리엘라는 눈을 둘 곳이 없어 뒤를 돌았다.


“아직도 나랑 내외할 게 있어?”

“아니거든요. 일부러 그렇게 보여주는 속셈이 훤해서 안 보는 거지.”

그러자 헤르한이 리엘라의 뒤로 돌아와 등을 껴안았다.


“그 훤한 속셈, 모르는 척 좀 받아주면 좋겠는데.”

헤르한은 집요했다.

침대에서 그렇게 씨름하고서도 지치지 않았는지.

리엘라는 제 배꼽 위를 배회하던 손이 조금씩 살을 더듬어 올라오는 것에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하마터면 그 손길에 녹아서 또 말려들 뻔했지만, 리엘라는 겨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제 가슴께까지 올라온 헤르한의 손을 탁 잡았다.


“오늘은 정말 안 돼요.”

영 아쉬운 듯 헤르한이 끙 신음했다.

그래도 리엘라는 굴하지 않고 최대한 단호한 표정을 내보였다.


“오늘 접견 일정이 있으시잖아요.”

“별로 중요한 건 아니야.”

“제스 경이 어젯밤까지 챙기는 걸 보니 중요한 일정 같던데. 오후에 화공을 같이 만나 주기로 한 건요?”

“아. 그건…….”

헤르한의 말문이 막혔다.

이래저래 변명거리를 찾아보려 했으나 더는 둘러댈 핑계가 없는 모양이었다.

리엘라는 미소 지으며 아직 미련을 떨치지 못한 헤르한의 손등을 톡톡 어루만져 주었다.


“평화를 누리는 것도 좋다지만 할 일은 해야죠.”

 

 

*

그레타의 공개 처형이 있고 난 뒤로 벌써 며칠이었다.

바하보르덴의 중앙 광장이 울부짖은 그날부터 며칠간은 계속 비가 왔다.

가을장마였다.

어두침침한 하늘 탓인지, 갑자기 싸늘해진 공기 탓인지.

리엘라는 그 후로 얼마간 이유 없이 잠을 설쳤다.

헤르한이 일을 줄이고 리엘라의 옆에 나앉은 건 그때부터였다.


“누가 보면 제가 황제 폐하 출근도 못 하게 매일 붙잡고 칭얼거리는 줄 알잖아요. 대체 왜 일어나시고도 절 안 깨우시는 거예요? 일부러 햇살도 안 들게 암막 커튼 꽁꽁 치고.”


“다들 이해할 걸. 신혼엔 원래 이러잖아.”

 
또 능글거리며 농담했지만, 실은 묵묵히 곁에 있어 주려는 헤르한의 마음이 뻔했다.

리엘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기꺼이 그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헤르한의 너른 품 안에 파고든 채로, 눅눅히 습기에 젖은 날들을 지나 보냈다.

겨울잠을 자는 다람쥐처럼.

며칠 뒤 장마가 끝나고 전에 없이 더 청명한 하늘이 열렸다.

엘슈바이크의 늦가을은 눈부실 정도로 맑고 환했다.

비로소 만물이 농익어서 색색의 제 빛깔을 찾아가는 때에, 이제는 리엘라도 환하게 피어나서 당당하게 제 걸음을 걸었다.

리엘라 님. 블리니테 님. 또는 안투의 현신이 어쩌고 하는 체계 없던 호칭들이 전부 ‘황후 폐하’로 통일되었다.

안달하다 못해 때때로는 무례할 정도로 리엘라에게 성화를 부리던 손님들도 이제는 격과 예를 갖추어 접견 순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많은 관심이 리엘라를 향할 망정, 함부로 리엘라의 앞을 가로막는 이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지난 일들로 말미암아 세상은 이제 리엘라가 얼마나 함부로 해선 안 되는 고귀한 존재인지를 똑똑히 본 것이었다.


“델쿠르 백작. 페오도르나 일가 쪽에선 연락이 왔나요?”

“예. 황후 폐하. 죄인의 유해를 거두어 가라는 폐하의 명을 분명히 전했으나……. 답이 여태 없는 것을 보면 끝내 응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죽어서도 외면만 당하는군요. 그 여자는.”

리엘라는 씁쓸한 표정으로 쾌청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시녀 하나가 다가와 때를 알렸다.


“황후 폐하. 화공이 도착했습니다. 이제는 슬슬 채비하시는 것이 좋겠어요.”

그러자 델쿠르 백작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이제 두 분 폐하의 초상이 황궁 중앙 홀에 걸릴 날도 머지않았군요.”

델쿠르 백작은 늘 침착하고 태연하던 모습답지 않게 감상에 젖은 듯이 보였다.


“그럼 준비하십시오. 황후 폐하. 예복은 이쪽에 준비해 둔 것으로 갖추시면 됩니다. 저는 바깥에서 화공과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애써 표정을 감추려는지 델쿠르 백작이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물러났다.

리엘라는 옆에 있던 루에게 슬쩍 물었다.


“델쿠르 백작, 방금 좀 북받친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네? 황후 폐하? 뭐라고요? 흐읍……!”

따로 델쿠르 백작에 관해 물을 것도 없었다.

루는 이미 코끝까지 빨개진 얼굴에 손수건을 마구 문지르고 있었으므로.


“아니, 루, 왜…….”

“송구합니다. 흐윽! 이제 황후 폐하의 초상화가 번듯하게 걸릴 생각을 하니까 제가 다 감격스럽고 눈물이 나고 그래요. 황제 폐하와 나란히 계시는 모습이라니, 얼마나 아름답고 눈부실까요. 흐엉-!”

리엘라는 난감하고도 애틋한 마음에 피식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

같은 시간, 황제의 집무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서류는 이것으로 정리하면 되겠군요.”

검토와 서명을 모두 마친 서류가 탁탁 정리되는 모습을 보면서 헤르한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도착하자마자 예산안 문서부터 내밀다니. 공작답군.”

“송구합니다. 할 일은 먼저 해 두어야 속이 편한 체질이라 그렇습니다.”

“전혀 송구할 일이 아니다. 이런 성정임을 알았기에 공작에게 리오타 왕국을 맡긴 것이기도 하고.”

헤르한의 치하 아닌 치하에 브레니케 공작이 인자하게 웃었다.

브레니케 공작이 제국 황실에 도착한 건 어제저녁이었다.

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황제가 벌써 침상에 들었다기에 알현을 미루었는데, 황제는 오늘 아침마저 지각을 하고는 참 당당한 얼굴이었다.


“신혼이 그리도 바쁘시면서 저는 왜 여기까지 부르신 겁니까?”

“신혼이 그리 바빠서 불렀어.”

“리오타 왕국을 맡기신 것으로도 모자라 제국 정무까지 맡기시려고 그러십니까?”

브레니케 공작은 농담을 한 것인데 헤르한의 눈은 진지하게 번뜩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에 도움을 청하고자 한다.”

브레니케 공작은 곧장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명하십시오. 폐하.”

“공작이 찾아 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

“일전에 조사를 명하신 파를란테 백작가……, 말씀이시지요?”

사실 브레니케 공작도 뭔가 예상은 하고 있었다.

황제의 국혼일이 예정보다 연기되었다.

미리 도착해 있던 해외 사절들도 귀국하거나 임시로 거처를 옮기는 판국에, 황제가 저를 제국까지 불러들인 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카일 파를란테. 아직 붙잡지 못한 연맹의 뒷배이고, 리엘라의 친부모가 남긴 유품을 빼돌린 자이기도 하지.”

“예?”

하지만 이런 얘기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터라.

브레니케 공작은 한참 얼떨떨한 얼굴로 생각을 정리하다가 황제의 뜻을 되물었다.


“블리니테 황후 폐하의 가족을 찾아주고자 함이십니까?”

“그렇다.”

“국혼일을 미루신 건 그 때문이셨군요.”

헤르한은 침묵으로써 대답했다.

정작 리엘라는 신전의 일 때문에, 그레타의 일 때문에, 또 초상화를 준비해야 하는 일 때문에 결혼식이 미뤄진 줄 알고 있지만.


“아직 황후에게 살아 있는 혈육이 있다면, 결혼식에 꼭 불러주고 싶다.”

브레니케 공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빙긋 웃었다.

그녀의 입가, 옅은 주름이 참 따스한 온정을 담고서 미소를 만들었다.


“이 세상에 블리니테 황후 폐하보다 더 사랑받고 계시는 분이 있을까 싶군요.”

 

*



‘폐하는 왜 이렇게 안 오실까?’

리엘라는 허리에 힘을 바짝 주었다.

화공의 지도에 따라서 우아한 자세와 표정을 열심히 유지했지만, 사실 머릿속에선 온갖 지루한 상념이 들끓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하지? 몇 주는 걸리는 작업이라던데. 설마 초상화가 다 완성될 때까지 매일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지루해.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그때 화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딴생각으로 리엘라의 집중이 흐트러진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모양이었다.


“블리니테 황후 폐하. 고개를 조금 더 들어주시겠습니까?”

“아. 이렇게요?”

“예. 지금 정말 좋습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화공이 말하니 옆에 늘어선 시녀들이 앵무새처럼 말을 따라 했다.

아름다우십니다. 눈이 부십니다. 품위가 넘치십니다.

전이라면 쑥스러워서 몸이 배배 꼬일 말들인데도 이제는 익숙했다.

정확히, 익숙하다 못해 심드렁한 이유는 역시 헤르한이 곁에 없기 때문이었다.


‘폐하도 같이 있어 주신다고 하셨으면서. 지각쟁이.’

리엘라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입술을 쀼루퉁 내밀지 않으려 애썼다.

그랬다가는 또 화공에게 지적 받을지도 모르니까.


‘아침에 지각한 것 때문에 일정이 늦어지신 건가? 오늘 접견한다는 대상은 누구지? 시녀를 보내서 폐하가 언제 오시나 여쭈어볼까?’

문이 열리고 황제가 안으로 들어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당장 화공이 붓을 내려놓고 몸을 숙이려는데, 헤르한은 살짝 손을 들어 그의 인사를 물렸다.

신경 쓰지 말고 맡은 일에 집중하라는 뜻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시선이 온통 환한 조명 아래 있는 눈부신 리엘라에게 사로잡혀 버린 탓이 더 컸다.


‘왜 이제 와요?’

리엘라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 그대로 헤르한에게 투정 어린 눈길을 쏘아 보냈다.

헤르한은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예쁘네.’

이맛살에 더 힘을 주고 다시 눈총을 쏘아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늦었잖아요. 바보. 왜 이제 오냐구!’

‘정말 예뻐.’

휴. 말을 말아야지.

리엘라는 혀를 내두르는 척했지만, 사실 헤르한이 와 준 것에 이미 마음이 풀려 누그러졌다.

그때, 헤르한이 여전히 리엘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만 살짝 숙여 화공에게 물었다.


“화공. 내 황후의 아름다움이 그 화폭에 다 담길 것 같나?”

“아, 폐하. 그,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자니 화공으로서의 제 실력을 보증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그렇다고 가능하다고 말하자니 황후 폐하의 아름다움을 깎아내리는 것이 되고.

화공은 진퇴양난의 짓궂은 질문에 진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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