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참 못나고 안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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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참 못나고 안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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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참 못나고 안됐어
2022.10.02.
황제의 군대가 돌아오자마자 황궁에선 그레타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유형 중인 타란 2세를 비롯해 리오타 왕국의 옛 왕가가 피고인 측으로 출두 요청을 받았지만,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단신만을 보내왔다.
[그레타는 이미 가문에서 파문한 바, 더 이상 페오도르나 가문의 일원이 아니므로 피고 측 참석에 응할 의무가 없다. 또한 페오도르나 일가는 죄인 그레타의 처분에 대하여 어떤 변호도 하지 않을 것이며, 엘슈바이크 제국의 국법에 따른 엄중한 처벌로 죄인이 다스려지길 바란다.]
세계의 여론도 같았다.
연맹에 얽힌 이든 아닌 이든 할 것 없이, 세계의 각국은 하루빨리 이 문제를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황실로는 죄인의 처형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그중에는 중앙신전의 루도비코 대주교가 보낸 성명서도 있었다.
[황실을 위협하고 중앙 신전의 명예를 더럽힌 극악무도한 죄인 그레타 페오도르나에 대한 엄한 처벌이 속히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웃긴 놈들. 이 일에서 빨리 손 털고 싶다, 그거 아닙니까? 신이고 나발이고, 저 노인네만 생각하면 영 괘씸해서, 왕녀를 더 오래오래 살려 놔야 하나 고민될 지경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신이고 나발이고’라니.
아시온은 제스의 말에 통쾌해하면서도 주변의 눈치를 살살 보았다.
정확히는 어딘가에 있을 ‘신’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제스는 어쩌다 리엘라와 눈을 마주치고는 뜨끔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황후 폐하를 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내 얘기 맞잖아요. 제스 경이 날 그렇게 대단하게 여기는 줄은 몰랐는데.”
“아니라니까요? 거들먹거리지 마십시오.”
“위대한 안투의 현신으로서 은총이라도 베풀까요?”
리엘라가 제스를 향해 장난스럽게 뻗는 손을 도중에 낚아챈 건 헤르한이었다.
헤르한은 거머쥔 손을 제 가슴께로 끌어당기면서 리엘라를 다정히 흘겨보았다.
어딜 그렇게 허투루 다른 남자의 몸을 만지려고 하냐는 듯이.
“신전 쪽은 신경 꺼. 그쪽을 잡을 증거는 따로 챙겨 놓았으니까. 아멜리아 사제 쪽에 연락을 취해 봐.”
“알겠습니다.”
제스는 멋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재판정의 대신들은 모두 뜻을 한데로 모았다.
법적 근거가 충분하니, 최종 결정권은 황제와 리엘라에게 주고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 뜻을 담은 마지막 교지를 드디어 완성했다.
“……공개 처형이군요.”
완성된 교지를 받아 든 아시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농담이나마 오가던 집무실 안이 숙연해졌다.
모두가 예상했던 결말이라고 해서 그 무게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의안이 통과되는 대로 처형식을 준비해.”
“장소가 비어 있는데요. 황궁에서 거행합니까?”
“아니. 바하보르덴 시민 광장에서. 보여 주어야 할 사람이 많으니까.”
헤르한의 눈이 결연히 빛났다.
리엘라의 손은 아직도 제 가슴 앞쪽에 꽉 쥔 채였다.
*
그날 저녁.
내내 쥐 한 마리의 기척도 없던 음습한 지하 감옥 안에 빛이 들었다.
‘리엘라네.’
그레타는 고개를 들지 않고도 알 것만 같았다.
차분하고 다소곳한 발소리. 그 발소리가 몰고 오는 은은한 향기와 맑은 기척.
그레타는 이젠 그딴 것만으로 리엘라를 알아보는 자기 자신이 몸서리쳐지게 싫었다.
“병사. 철창을 열어줄래요?”
“황후 폐하.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내가 더 세요.”
나직한 농담에 조금 당황한 병사는 이내 리엘라의 명에 고분고분 따랐다.
위험하다고 만류했으나, 사실 그럴 것은 없었다.
그레타는 두 팔과 두 다리에 쇠사슬을 달고 있는 데다가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을 만큼 나약해져 있었다.
진작 숨이 끊어졌어도 놀랍지 않을 그녀가 여태 숨 쉬고 있는 건, 어떻게든 그녀를 만민이 보는 처형대 위에 올려놓겠다는 제스의 의지 덕이었다.
어두운 공간이 서늘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적막함을 깬 건 리엘라의 목소리였다.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말이에요. 리오타 왕궁의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리엘라의 목소리는 온화하고 낭랑해서 그레타의 신경을 더 긁었다.
“난 그때 왕녀님이 보고 싶었어요. 묻고 싶은 게 많았거든요. 그런데 왕녀님은 끝까지 내 앞에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았죠. 내 친구도, 동료들도, 다 마찬가지였고.”
“…….”
“난 알거든요. 아무도 없는 감옥에 홀로 갇혀 있는 게 얼마나 외롭고 무서운 건지. 지금쯤 왕녀님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나 무서울까 봐 네가 내 면회라도 와 줬다는 거야?”
그레타는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도, 왕국도. 이 땅의 백성이든 저 땅의 백성이든 할 것 없이 전부 다 자길 버렸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자길 찾아와 주는 이가 바로 리엘라라니.
정말 배가 찢어지도록 웃을 일이었다.
“하. 고마워서 어쩌지? 맞아. 왜 안 오나 했어. 마지막까지 고고한 척, 혼자만 순결한 척해야, 리엘라 블리니테지. 안 그래?”
그레타가 한껏 비아냥거린 말은 싸늘한 정적 속에 곤두박질쳤다.
리엘라가 크게 호흡을 골랐다.
깊은 날숨 끝에 나온 리엘라의 대답은 이전과 다르게 아주 차갑고 낮았다.
“그래. 재밌네. 고고한 척.”
리엘라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패악에 리엘라가 꿈쩍도 하지 않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꼴사납게 몸부림을 치면서 악을 쓰는 건 늘 저뿐이었고.
“감히 네까짓 게……!”
이제는 그 꼴사나운 몸부림조차 제대로 칠 수 없는 처지.
‘타악!’
뺨이라도 한 대 칠 수 있으면 이 분이 풀릴까.
그런 마음에 휘두른 팔은 리엘라에게 닿지도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황후 폐하!”
철창 밖에 있던 병사가 한달음에 들어왔지만 그 전에 리엘라가 그레타의 손목을 낚아채는 것이 더 빨랐다.
리엘라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리엘라가 그레타보다 더 셌다. 손아귀의 힘도, 손에 쥔 보이지 않는 힘도.
“그레타. 아무리 그래도 내게 직접 손찌검까지 하려던 적은 없었는데.”
그런데 어쩌다 이 지경, 이 꼴까지 된 거야?
꼭 그런 비난이 들리는 것만 같아서 그레타의 눈은 더 시퍼레졌다.
“그게 뭐? 처형일을 받아 놓으면 내가 고분고분해질 줄 알았어? 마지막이라고 울면서 빌기라도 할 줄 알았니? 모르나 본데. 신전에 가서 널 팔아먹은 거, 연맹 놈들은 자기들이 날 보낸 거라고 했지만 그건 분명한 내 의지였어. 내가 내 발로 간 거라고!”
리엘라는 그 말에 뭐라 대꾸하는 대신 굳게 쥐고 있던 그레타의 손을 아래로 세게 팽개쳤다.
“나도 당신의 뺨을 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왜? 너는 너무 고상한 영혼이라 남을 때릴 수도 없나?
“내 손은 폐하를 지키는 데만 쓰기로 해서. 그레타, 당신과는 달리 누구의 뺨을 치는 일 같은 건 안 해.”
“네가 뭘 해? 네가 무슨, 폐하를 지킨다고?”
그레타는 비웃음을 터트렸다가 서서히 입꼬리를 내렸다.
리엘라가 자신을 무척이나 한심하고도 가엾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단지 더러운 죄인이 된 저의 꼬라지를 비웃는 것이 아니었다.
그레타는 그제야 깨달았다.
마지막까지 나만 모르는 것이 있었구나.
‘네가 황제를 지킨다고……?’
안투의 후손인 네가 지키겠다는 사람.
‘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황제가 엔릴의 후손이었던 건가.’
그래서 황제는 늘 자신보다 한발 앞서 있었던 것인가.
그래서 파비안의 정체를 알고도 그렇게 태연했나.
그래서 너희 둘은, 그렇게 날 때부터 한 조각인 것처럼 딱 붙어서 언제나 아등바등하는 나를 안쓰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던 건가.
그레타는 팔 한쪽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리엘라가 팽개치는 대로 휘둘렸다.
리엘라는 간신히 서서 비틀거리는 그레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 어딘가에 힘을 가했다.
“아윽!”
덧나다 못해 이젠 살이 썩은 내까지 풍기기 시작하는 복부의 상처.
바로 파비안에게 찔린 부분이었다.
“……참 아팠겠어. 그렇게 사랑했다는 파비안이 당신에게 준 게 이런 것뿐이니.”
담담한 리엘라의 말과 달리 영혼을 찢는 고통에 그레타의 정신은 아찔한 나락으로 떨어졌다.
꼭 파비안에게 찔렸던 그날처럼.
“으……. 우욱……!”
리엘라는 피와 고름이 묻어나는 것도 겁내지 않고 고운 손으로 그 상처를 만지며 다시 그레타의 고통을 상기시켰다.
뺨을 치는 것보다, 목을 베는 것보다, 더 잔인한 복수였다.
“가는 길엔 확실히 알아 둬. 당신은 아비로부터 버림받은 딸이고,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한 왕녀고.”
그레타는 끔찍한 고통에 몸을 반으로 접었다.
“당신이 정인이라 믿고 싶었던 남자에게 끝내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던 여자였어.”
리엘라는 선고를 이어갔다.
“그렇게 죽이고 싶어 했던 내게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패배자일 뿐이고, 이제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초래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뿐이야.”
지독한 패배감이 구역질처럼 올라왔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참으니 점차 눈시울이 붉어져 갔다.
“누가 후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좀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을 텐데.”
“…….”
“그레타 페오도르나.”
“…….”
“참 못나고, 안됐어.”
내 할 말은 끝났노라,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라, 리엘라는 그렇게 한참을 그레타 앞에 서 있어 주었다.
침묵만이 길었고 이윽고 오랜 시간의 할 말을 다한 리엘라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레타는 제 앞에서 붉은 물결이 멀어지는 것을 빤히 보다가 아주 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리엘라.”
죽어가는 새의 날갯짓만큼 작은 소리에 리엘라가 그 자리에 멈췄다.
“파비안은 어떻게 됐지?”
먼발치에서 리엘라가 잠시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상처가 깊었어. 당신이 도망치고 난 후에 방치된 시간이 길어서, 노력했지만 살릴 수는 없었지. 내가 마지막을 지켜줬고, 여기로 데려와 남쪽에 묻어 주었어.”
그레타는 울지 않았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파비안과 자신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죽인 셈이었다.
“너의 처형대는 광장에 북쪽 방향으로 놓일 거야.”
리엘라가 덧붙였다.
그건 죽어서도 넌 절대 파비안과 같은 방향을 보지는 못하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
*
바하보르덴의 중앙 광장 한가운데.
불과 일주일 전, 황제와 리엘라가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행진했던 바로 그곳.
꽃비가 내리고 축제의 웃음이 흐르던 그곳에 이제는 높은 처형대가 설치되었다.
그날은 하필 새벽부터 하늘이 우중충했다.
비장한 표정의 병사들이 죄인을 끌고 나올 무렵에는 추적추적 비까지 쏟아졌지만, 광장에 빼곡하게 모인 사람들은 누구 하나 우산이나 모자를 쓰지 않았다.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천벌 받아 마땅한 죄인의 마지막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그레타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꼴로 비틀거리며 끌려 나왔다.
분명 한때는 반짝반짝 빛이 났던,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을 그녀가 지금은 가죽이 벗겨진 짐승보다도 처참한 몰골이었다.
황실의 일꾼과 대신들. 귀족과 평민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레타의 볼품없이 망가진 모양을 눈에 담았다.
“그레타 페오도르나.”
잿빛 수염을 길게 늘인 원로는 긴 판결문을 읽었다.
그레타의 죄명은 끝도 없었다.
“현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시기 전 왕국에서 암살을 시도한 죄. 그 죄를 블리니테 황후님께 누명 씌워 처형하려 하고 범죄를 은닉하려 한 죄. 처형이 실패하자 독살하려 한 죄. 이후 제국 황실의 시녀를 매수해 블리니테 황후님의 납치극을 사주한 죄. 황제 폐하의 독살을 재차 사주한 죄. 공범이었던 시녀 로리엘 이그드니스를 살해한 후 도주한 죄. 전범인 연맹 세력과 결탁해 안투의 후손이신 황후님의 안위를 위협한 죄…….”
원로의 낭독이 길어질수록 좌중에선 탄식과 비명이 짙어졌다.
하도 안된 몰골에 그레타를 동정할 뻔했던 이들이 제 입을 때리며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여기저기서 분노에 찬 원성이 터져 나왔다.
당장 목을 베라고.
당장 그녀의 사지를 찢어, 짐승의 밥으로 던지라고.
“……하여, 제국 법령과 리오타 왕국의 동의, 국제회의의 인가에 따라 죄인 그레타 페오도르나를 교수형에 처한다.”
최종 판결이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환호하는 동시에 분노했다.
굵은 빗줄기가 휘몰아쳤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스스로 내 버린 그레타는 조용히 교수대 위에 올랐다.
타앙.
마침내 작은 마녀의 두 발이 허공에 던져졌다.
마지막까지 처절했던 발질은 결국 그 어디도 디딜 데를 찾지 못하고 아무 것도 아닌 몸짓으로 굳어갔다.
허무하게 끝을 맺은 그레타의 악독함에, 누구는 몸을 떨고 누구는 탄성을 터트렸다.
기쁨과 슬픔. 안도와 두려움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한데 섞여 맴돌았다.
그때, 광장 안의 누군가가 비정한 탄식을 뚫고 외쳤다.
“황제 폐하가 승리했다. 황후 폐하를 지켜냈다!”
한 사람의 외침은 곧 두 사람의 것이 되고 열 사람의 것이 되어 광장 전체에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