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아무것도 아닌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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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아무것도 아닌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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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아무것도 아닌 여자
2022.09.29.
“살려만……. 살려만 주십시오!”
핌의 비굴한 애원이 울려 퍼졌다.
엘슈바이크 제국 북부 변방, 깊은 숲의 대저택.
험준한 지형에 거느리는 인구도 거의 없다시피 하는 이 지역의 영주는, 황제가 이 볼 것 없는 땅에 친히 방문하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눈치 빠른 영주는 작은 민가로부터도 멀찍이 떨어진 저택으로 황제를 안내했고, 황제는 굳은 표정으로 병사들을 이끌고서 저택 안에 입성했다.
황제가 잡아 온 ‘죄인’들 역시 그렇게 저택의 지하실 안에 밀어 넣어졌다.
“모든 것에 협조하겠습니다.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목숨만……. 예?”
밀실에 갇힌 핌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비는데 왜 다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거냐고!?’
술기운을 떨치고 난 후 자신이 황제의 군대에 붙잡혔다는 상황을 인지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에겐 심문도, 추궁도 없었다.
‘내가 연맹의 조직원인 걸 모르나? 아니면 아직 내 쪽까지 순서가 안 온 건가?’
하다못해 이름도 묻지 않고 침묵 속에 자신을 감시하는 눈길들에 핌이 돌아 버리기 직전.
드디어 밀실의 문이 열리고 빛의 틈새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화, 황제? 설마 황제가 직접!?’
그저 검은 실루엣이 다가올 뿐인데도 그 위압감이 핌의 숨통을 조였다.
오금이 저리고 눈물이 찔끔 고였다.
제 말로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연맹 따위에는 절대 붙지 않는 건데.
“화, 황제 폐하……. 모든 걸 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연맹에 관해 아는 정보를 전부 드리겠습니다. 시키시는 건 뭐든 따르고 앞으로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할…….”
“조용히.”
“…….”
난생처음 듣는 황제의 싸늘한 육성에 핌은 단단히 얼어붙었다.
그래도 살려면 이대로 정신을 놓고 있어선 안 되었다.
쓸모를 증명하려면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다시 입을 열려는데.
“별 볼 일 없군. 치워.”
“예.”
핌의 턱을 틀어쥐고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는가 싶던 황제가, 이내 그를 뿌리치고 돌아서는 것이었다.
“폐하, 폐, 폐하!”
핌은 격식을 갖춘 말로 황제를 부르는 법은 몰랐지만, 이대로 황제가 떠나 버리면 자신은 꼼짝없이 죽을 거란 것은 알았다.
“저, 정보를! 제가 엄청난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분명 폐하께 도움이 될…….”
“아는 것 없잖아.”
“예, 예?”
멀어지는 듯하던 황제의 그림자가 다시 핌의 시야를 덮었다.
빛을 등지고 그를 노려보는 황제에게서는 오로지 푸른 안광이 빛났다.
“네놈이 한 일이라곤 신전의 대주교와 말씨름을 조금 하다가 영문도 모르고 그레타를 데리고 도망친 것뿐이지. 당장 연맹 간부의 이름 하나도 댈 수 없으면서 무슨 수로 네 목숨값을 벌겠다는 것이지?”
“그, 그것은…….”
황제의 입술은 반듯했다.
가소로운 웃음조차 아깝다는 듯 냉담하기만 한 황제의 표정에 핌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핌은 넋이 나가 중얼거렸으나 황제는 대답하지 않고 떠났다.
다시 문이 닫혔고 핌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처형인의 기척이 느껴졌다.
*
“역시 저놈들에게선 건질 게 없었군요. 왕녀를 바로 확인하시겠습니까?”
“그래야겠지.”
헤르한은 속 안에서 진득하게 끓던 한숨을 내쉬었다.
“살려 놓으라고 하시니 목숨 줄은 붙여 놓았습니다.”
제스가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가니 그레타가 의자에 묶여 있었다.
그레타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어서 언뜻 보면 시체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저래 보여도 의식은 있습니다. 폐하께서 힘을 쓰시는 데는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헤르한은 터벅터벅 걸어 그레타의 앞으로 다가갔다.
검은 머리통을 향해 가는 걸음은 무거웠다.
이건 정말 하기 싫었던 숙제인지라.
“……끔찍하군. 이런 여자의 기억과 감정을 모조리 봐야만 한다니.”
헤르한은 그레타의 턱을 손끝으로 추어올려 그녀의 초점 없는 까만 동공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텅 빈 눈동자 안에서 그레타의 모든 것을 읽었다.
그레타의 투기심. 그레타의 욕망. 그레타의 절망.
마침내 파비안에게 찔린 순간 완전히 사멸해버린 그녀의 영혼까지도.
하나같이 일그러지기만 한 그레타의 사념들은 사람의 키만큼 자란 잡초처럼 헤르한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헤르한은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내고 헤친 후에야 한 구석에 파묻혀 있는 ‘진실’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이 내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와 주길 바라.”
“끝까지 모르나 보네. 내가 대단한 사람인 게 아니라, 내가 가지려고 하는 게 대단한 거란 걸.”
“내 능력은 글쎄……. 재미있는 꿈을 꾸는 능력?”
그레타의 기억 속에서 발견한 사내를 마주한 때, 헤르한의 몸에서는 피가 끓었다.
‘너구나. 바로 네놈이구나.’
마침내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헤르한의 온 감각이 예리하게 각성했다.
바로 그때, 그레타가 사내의 방 서랍 안에서 찾아낸 푸른 목걸이가 보였다.
먹잇감의 목덜미만을 노리며 발톱을 갈던 헤르한은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어붙었다.
“이름은 없어. 그냥 도련님이라고 불러요.”
‘도련님.’
난잡하게 늘어져 있던 퍼즐의 정중앙, 모든 이야기를 잇는 조각이 짜 맞추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랬던 거였나.’
믿기 어렵지만 그리 놀랍지만도 않은 일이었다.
행크의 기억 속, 어린 리엘라의 손을 붙잡고 꼭 매달려 있던 한 소년.
그 소년이 아직 살아 있다면 필시 저런 얼굴이리라.
‘카일 파를란테.’
헤르한은 들끓는 심정으로 그 이름을 읊조렸다.
그레타가 쿨럭쿨럭 기침을 해대며 헤르한의 집중을 흩트린 건 그때였다.
“……노려보기만 하면, 뭐가 돼?”
그레타가 마른 목소리로 묻는 말에 헤르한은 정신을 현실로 되돌렸다.
되찾은 시야 안에서, 그레타는 여전히 멍한 눈을 들어 헤르한을 빤히 보고 있었다.
“내 머리채라도 잡고 흔들면서 물어야 할 것 아냐? 리엘라를 노리는 놈들이 누구냐고?”
헤르한은 그만 그레타에게서 손을 뗐다.
턱을 쥔 손을 놓으니 그레타의 고개가 맥없이 고꾸라졌다.
그레타는 스스로 고개를 가누지도 못하면서 시선을 떨군 채로 큭큭 웃었다.
“다들 불쌍해서 어째. 나만 잡으면 끝날 줄 알았더니 다른 적이 또 있는 줄은 몰랐겠지. 내가 협조 좀 해 줘? 도와줄까? 응?”
“도움 필요 없어요.”
그때 리엘라가 안으로 들어오며 헤르한이 해야 할 대답을 가로챘다.
리엘라는 곧장 헤르한의 손을 잡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이 헤르한의 안색을 다정하게 살폈다. ‘그레타에 대한 조사는 다 끝났나요?’ 하고 묻듯이.
리엘라는 이내 단단하게 입술을 물더니 둘의 사이를 가로 막고 섰다.
꼭 자신으로부터 헤르한을 보호하기라도 하는 듯한 움직임에, 그레타는 가소로운 표정으로 입을 비죽였다.
“내 도움이 필요 없다고? 정말 괜찮겠어? 리엘라. 널 노리는 놈들이 있다니까?”
내내 송장처럼 멍하던 그레타가 드디어 눈에 이채를 띠기 시작했다.
리엘라를 향한 증오.
그게 영혼의 뿌리까지 죽어 버린 그레타에게 유일한 삶의 열망으로 남은 모양이었지만.
“네. 필요 없어요.”
“하지만 내 증언이 없으면 너흰 적의 정체도 알지 못하…….”
“왕녀님은 본인이 되게 중요한 사람인 줄 아시나 봐요. 별로 아닌데.”
“…….”
“왕녀님은 그저 수배범일 뿐이에요. 죄를 짓고 도망치다 잡혀 온 것뿐이고. 아무것도 아닌 그저 범죄자일 뿐인 당신이 지금 누굴 돕는다는 건가요?”
리엘라는 그레타가 더 덤벼들 여지도 주지 않고 헤르한과 함께 떠나 버렸다.
*
“어때요? 저 좀 백마 탄 왕자님 같았어요?”
낯선 침실이었다.
신전에서 일을 치르고 황실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또다시 어느 객지의 방.
헤르한과 함께 있으니 두려운 것은 없지만, 그래도 쉽게 잠들지는 못할 밤이었다.
리엘라는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헤르한을 꾸역꾸역 눕혀 놓고 정작 자신은 눕지 못했다.
“같이 눕지. 백마 탄 왕자님.”
“전 폐하가 잠드는 것 보고 누울래요.”
“네가 안아 줘야 잠들지.”
리엘라는 걱정스레 헤르한을 내려다보다가 침대에 살포시 걸터앉았다.
헤르한은 리엘라가 앉은 쪽으로 누웠던 몸을 틀었다.
리엘라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괴니, 이내 다정한 손길이 그의 이마 위에 내려앉아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마음을 편안히 하는 향기가 헤르한의 코끝에 감돌았다.
헤르한은 괜히 고개를 이리저리 틀어가며 리엘라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리엘라는 제 배에 닿는 더운 숨이 간지럽고 어색한 듯 헛기침하다가 물었다.
“이마가 뜨거워요. 폐하. 많이 힘들었어요?”
“응. 꽤.”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허세를 부릴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작은 여인의 품 안에서 칭얼거리는 기분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달콤하고 편안했다.
“중요한 단서를 찾았어.”
“연맹의 정체라도 알아냈어요?”
“……비슷해.”
“와. 폐하는 정말 못 하는 게 없네. 어떻게 이런 대단한 사람이 내 사람이 됐을까?”
‘카일 파를란테’라는 이름이 목에 걸려 괴롭던 헤르한은, 그 순간 아무렇지 않게 웃어 버렸다.
“내가 해야 할 소릴.”
눈을 들어 리엘라를 바라보니, 리엘라의 눈길이 제법 아득했다.
“그러면 그레타 왕녀는 이제 정말 쓸모를 다했군요.”
“그래. 황궁으로 돌아가자마자 법대로 처리할 거야.”
‘법대로’
황족 시해의 음모를 몇 차례나 꾸몄으니 선처의 여지도 없이 처형.
“하지만 혹시 네가 싫다면…….”
“싫다면 어쩌려고요. 국법보다 내 뜻이 우선인가요?”
“당연하지.”
리엘라는 헤르한이 이런 식으로 제 농담에 진지하게 응수하는 것이 좋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네요.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황후가 되지 않으려면.”
리엘라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달빛을 품은 머리카락을 계속 만졌다.
얇은 슬립 차림이었다.
헤르한이 말을 할 때마다 그의 귓바퀴나 턱의 움직임, 그가 내뱉는 숨까지 맨 살갗 위를 어르는 것 같아 아찔했다.
그래서 리엘라는 내내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조금도 뒤척이지 않으려고 허리에 바짝 힘을 주고, 그저 손끝으로 헤르한의 머리카락만 뱅글뱅글 감았다.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손을 감쌌다.
섬세한 악기를 연주하듯, 아니면 일부러 애를 태우듯, 손끝으로 손등을 톡톡 건들며 조금씩 올라오더니 이내 리엘라의 흰 손가락 틈새를 파고들어 꽉 깍지를 끼였다.
“정화 중.”
헤르한은 리엘라의 손을 끌고 제 입가로 가져가, 보드라운 손바닥 안에 한참 입술을 파묻고 숨을 쉬었다.
뭘 하는 거냐고 리엘라가 핀잔을 줄까 봐 한발 앞서서 핑계를 대기까지.
리엘라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고, 그 덕에 목석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느른하게 풀어졌다.
리엘라는 아차 싶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리엘라가 긴장을 풀기만을 기다렸던 헤르한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리엘라가 헤르한의 몸 아래였다.
*
북부 저택의 손님들은 다음날 일찍 황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다.
사슬을 다시 감고 마차에 실리는 그 순간까지, 그레타는 자신이 죽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레타는 아직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이 자신이라고 확신했다.
황제가 여기까지 직접 와서 자길 잡아놓고 아무 추궁도 하지 않는 것이나 리엘라가 제 도움이 필요 없다고 단칼에 잘라 말한 것도 모두 신경전의 일부라고 여겼다.
‘일부러 센 척. 겁을 줘서 내가 진실을 불게 만들려는 거겠지.’
게다가 그걸 다 떠나서, 여론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와 리엘라의 결혼식이 코앞이지 않은가.
국가적인 경사를 앞두고서는 신의 노여움을 살까 봐 나무 한 그루도 섣불리 베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죄인 처형이라는 건 있을 수도 없고, 그나마 있던 죄인도 사면해주는 판국.
그러니 자신이 황궁에 잡혀가는 사실도 당연히 모두 쉬쉬할 거로 생각했는데.
“그 뻔뻔한 낯짝을 보여라!”
“살인자! 마녀!”
재판까지 목숨을 연명시키는 약에 취해 기절할 듯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가, 우레 같은 소란에 벌떡 깨어보니 어느덧 황성이었다.
마차가 사납게 흔들리고 뭔가 계속 날아와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분노에 찬 고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게 자기를 향해 몰려든 제국민들의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레타는 멍했다.
그쯤, 마차가 멈추었다.
밖에서 병사들이 몇 마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그레타가 앉은 쪽의 마차 문이 활짝 열렸다.
그레타는 눈을 부릅뜰 힘도 없어 느리게 호흡했다.
“마차에서 내려라. 죄인은 여기서부터 황궁까지 걸어오라는 황명이시다.”
그레타는 거칠게 끌어 내려졌다.
비틀거리던 피투성이 두 발이 중심을 잡고 서기가 무섭게, 무언가가 날아와 그레타의 머리를 때렸다.
‘따악!’
아릿한 통증과 함께 끈적거리는 것이 썩은 내를 풀풀 풍기며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썩은 달걀. 오물. 돌멩이와 욕설, 삿대질.
황실에서 당장 저 마녀를 처단하지 않으면 자기가 직접 베어 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사내의 외침과, 리오타의 백성이었던 어느 여인의 악에 찬 부름까지.
그레타를 향해 황성이 통째로 울부짖었다.
그 안에서 그레타는 끝까지 무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