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당신을 찾아가는 수밖에
(130/154)
130 당신을 찾아가는 수밖에
(130/154)
#130 당신을 찾아가는 수밖에
2022.09.25.
*
엘슈바이크 제국의 황성 바하보르덴.
그중에서도 수백, 아니 수천의 인파가 빼곡히 모여들었을 중앙 광장.
귀 따갑게 소리를 질러대는 이들의 틈에 선 카일은 타는 듯이 강렬한 눈으로 광장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어이 리엘라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 당신은 날 알아보는구나.’
카일은 벅찼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카일은 제 영혼이 리엘라와 연결된 것을 분명히 느꼈다.
‘죽을 것 같았는데.’
카일은 가쁜 숨을 토해냈다.
‘눈만 마주쳤는데도 살 것만 같아.’
사지를 넘어 이곳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리엘라. 당신의 힘은 얼마나 강한 것인지.’
어릴 때 함께 시간을 보냈을 때보다, 또 전에 황궁 연회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리엘라의 힘은 더 강해져 있었다.
꼭 활짝 만개한 꽃 같았다.
시선을 잡아끌 만큼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향기가 사방에 진동했다.
물론 그 향기를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자신과 단상 위의 저 오만한 황제뿐이겠지만.
‘헤르한.’
카일은, 곧장 리엘라를 끌어안고 주변을 경계하는 황제를 노려보다가 몸을 숙이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마차를 타고 바하보르덴의 외곽으로 이동한 그는 아무 여관에나 들어가 몸을 눕혔다.
지쳤지만 한 번 더 능력을 쓸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생겨났다.
먼발치에서나마 리엘라를 본 덕분이었다.
‘딱 한 번. 그럼 누구를 이용해야 할까.’
황제 헤르한의 협박에 냅다 깨갱거리고 입장을 바꾸어 버린 아란의 국왕?
아니면 연맹이 수세에 몰리니 도망친 간부 놈?
가장 발목을 잡는 자는 루도비코 대주교이지만 그는 중앙 신전의 결계가 보호하고 있어 조종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선은 역시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레타 왕녀, 그리고 왕녀를 데리고 있는 떨거지 놈들이었다.
‘한 번에 전부 다 같이 처리해야겠네.’
카일은 침대 위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잘 가. 왕녀. 당신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카드였어.’
*
핌과 데렉은 쉼 없이 투덜거렸다.
급하게 마련한 도피처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짜증나는 건 팔자에도 없는 병자를 떠맡은 상황이었다.
“미치려면 곱게 미치든 할 것이지! 저년이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말까지 잃어버렸잖아!”
“그냥 확 죽여 버리자니까? 어?”
핌은 괜히 데렉에게 짜증을 확 부리다가 이내 침을 탁 뱉어 버렸다.
검은 머리의 왕녀.
아니, 이젠 왕녀도 아닌 그냥 미친 여자.
대체 살면서 무슨 업보를 쌓았는지, 옛 연인이라던 이에게 칼을 맞은 그레타는 그 이후로 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
미친 듯이 깔깔거리며 발악을 하질 않나, 또는 그냥 혼이 빠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서 바닥에 뻗어 버리질 않나.
“그래도 어떻게 해? 우리한테 굳이 신전 밖으로 데려가라는 명령이 온 걸 보면 어쨌든 계획상 필요한 사람이라는 거 아니겠어?”
인정이라곤 없는 그들이 저 짜증나는 여자를 굳이 치료하고, 달래고, 둘러매서 여기까지 도망쳐 온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알 바냐? 언제는 우리가 상부의 뜻을 알고서 움직였어? 그냥 까라면 깠지.”
“일단 숨어 있으면 이동할 곳을 알려 준다더니, 이놈의 새끼들은 연락도 없고. 퉷.”
상부의 지시를 받아 오겠다며 먼저 떠났던 동료는 어째서인지 며칠째 연락 두절이었다.
저만 살자고 튀어버린 것이었다.
신전 쪽에 빌붙어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것도 만만하지 않았다.
루도비코 주교는 당분간 신전 근처에는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말라면서, 대신 그들이 멀리 도망쳐서 임시로 버틸 수 있는 돈과 패물을 조금 내어 주고 그들을 내쫓았다.
“제기랄.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된 건지.”
핌과 데렉은 욕지거리를 주고받으면서 그나마 남은 돈으로 사 온 술을 들이켰다.
산중의 해는 빨리 졌다.
짜증에 한 잔, 신세 한탄에 또 한 잔하다 보니 그들은 어느새 거나하게 취한 뒤였다.
“야. 핌.”
“왜?”
그때 데렉이 동료 핌을 발끝으로 건들거렸다.
모닥불을 안주 삼아 또 한 모금을 들이켜던 핌은 동료가 킬킬거리며 가리키는 곳을 흘긋거렸다.
맨 흙바닥 위에 아무렇지 않게 팽개쳐 둔 그레타가 한 번씩 숨을 헐떡이는 것이 보였다.
대충 처치해 둔 상처가 결국 곪아 터졌는지 괴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가 안 건드려도 금방 숨 끊어질 거 같지 않냐?”
“그러게.”
두 사내는 동정의 빛이라곤 없는 눈으로 큭큭 거리다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내일은 아침 일찍 시체나 치워야겠네. 아 귀찮아. 이만 자자.”
둘은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털어먹은 술병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
그레타는 그렇게 축축한 땅바닥 위에 던져진 채로 새까만 밤하늘만 바라보았다.
지금 보는 것이 어쩌면 마지막 하늘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 의식이 서서히 흐려졌다.
눈물은 사치였다.
그레타는 자신이 그런 낭만이나 떨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완전히 무거운 눈꺼풀이 감긴 후.
그레타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다시 몸을 일으켰다.
상처가 주는 저항은 컸지만 고개를 살짝 숙인 그레타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두 발로 우뚝 섰다.
덧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무감한 얼굴이었다.
그레타는 뚜벅뚜벅 걸어 오두막 문을 열었다.
두 사내는 그레타가 일어난 사실은 알지도 못하고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고 있었다.
그레타는 술 냄새를 풍기는 그들의 틈으로 절뚝거리며 간신히 들어가 작은 짐 가방을 뒤졌다.
거기서 루도비코 주교가 내준 보석을 꺼낸 뒤에 손에 들고 다시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타닥타닥.
오두막 바깥은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으로 적막했다.
휑한 바람이 부는 것 외엔 이따금 수풀 뒤가 부스럭거릴 뿐이었다.
근처에 산짐승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크게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 오두막이 불타 버리면 모두가 함께 저세상으로 가게 될 테니까.
“…….”
모닥불 앞에 다가간 그레타는 붉게 타오르는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긴 불쏘시개 장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장작을 사내들이 자는 오두막 안에 힘껏 던져 넣었다. 무리해서 몸을 쓴 탓인지 상처가 더 벌어졌지만 그레타는 마치 시체처럼 인상 하나 쓰지 않았다.
쌀쌀한 가을밤, 나름대로 보온을 한답시고 사내들이 끌어안은 지푸라기에 화르르 불이 옮겨 붙는 소리가 꽤 경쾌했다.
‘잔챙이들은 저렇게 처리하면 됐고, 이제 다음.’
그레타는 사내들의 짐 가방에서 꺼냈던 보석을 모닥불 안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자기 몸 역시, 불더미 위에 던지려는 그 찰나.
“그만!”
산짐승이 숨어서 몸을 흔든다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난데없는 검은 인영이 튀어나왔다.
그레타의 팔다리에 하나씩 달라붙어 사지를 결박하는 이들 말고, 주변을 포위하고, 불타는 오두막 안에서 살아 보겠다고 허우적대는 사내들을 끌어내는 이들까지.
수십 명은 될 법한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 이런.’
그레타는 짧게 탄식했다.
바닥에 꿇린 그녀 앞에 서늘한 구둣발 소리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다시 만났군.”
가죽 구두에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가 서슬 퍼런 안광을 빛냈다.
참.
이 남자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이걸 반갑다고 해야 하나.”
그레타 앞에 가까이 선 남자, 헤르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대를 ‘그레타’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자신이 마주한 이가 그레타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어떻게 할까요, 폐하?”
그레타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아시온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를 덧붙였다.
“연맹의 하수인으로 보이는 사내 둘이 그레타 전 왕녀를 데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 왕녀는 부상이 심한 듯 보였고, 사내들도 정처를 모르는 듯 숲속의 오두막을 전전하고 있답니다. 명령하시면 지금 당장 체포하겠습니다. 에릭이 대기 중이니 즉결 처분도 가능합니다.”
“아니. 근처에서 기척을 숨기고 기다리라고 전해라.”
당장 그레타를 처단할 생각에 흥분한 아시온에 비해 헤르한은 몹시도 차분했다.
“그레타는 생포해야 한다. 그녀의 기억 속에 분명히 연맹에 관한 아주 중요한 단서가 있을 거야.”
“하지만 마냥 기다리다가 그레타가 시온 공작이나 그 병사와 같은 수로 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직접 가야겠네요.”
그때 대답한 건 리엘라였다.
“만약 그레타가 조종당하고 있다면 그걸 풀 사람은 저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리엘라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너무나 끔찍한데, 그레타를 향해서는 이제 그 끔찍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직접 보고 싶어요. 어떤 꼴인지.”
바들바들 떨리는 연약한 주먹 위에 헤르한의 커다란 손이 얹혔다.
리엘라는 숨을 고르면서 마지막 결말을 내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
그레타를 우르르 에워싼 병사들 앞에서 리엘라가 붉은 머리카락을 요요히 휘날리며 걸어 나왔다.
내내 초점 없이 요지부동이던 그레타는 그제야 몸을 떨었다.
정확히는, 그레타의 몸 안에 깃든 카일의 영혼이 떨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당신의 수는 뻔히 다 알았어요. 몇 번이나 같은 수에 당하면 웃기잖아요.”
리엘라의 목소리가 낭랑했다.
카일이 기억하는 어릴 때와 같았다.
한없이 연약한 주제에, 내가 널 도와주겠다며 열심히 애를 쓰던 그 목소리.
“그레타는 이제 돌려받을게요.”
그런 리엘라가 카일의 영혼 앞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 여자는 여기서 이렇게 쉽게 죽어 버리면 안 되거든요.”
카일은 눈을 들어 리엘라를 빤히 보았다.
리엘라는 거기에 당당하게 응수했다.
카넬 때는 알아보지 못했고, 시온 공작 때는 짐작도 하지 못했고, 병사의 앞에서는 영문을 몰라 헤맸으면서.
“좀 창피하지 않아요?”
리엘라는 이제 허물어지기 직전인 육신 안에 갇힌 카일에게 경고를 할 줄도 알았다.
“매번 이렇게 남의 뒤에 숨어서 싸울 줄밖에 몰라요? 다음엔 이렇게 비겁한 식 말고, 진짜 모습을 드러내 보는 게 어때요?”
그 말을 끝으로 리엘라는 손을 뻗어 그레타의 턱을 쥐었다.
심연의 굴처럼 짙은 암흑뿐이던 그레타의 동공은 이내 한번 크게 요동치더니 일순간 빛을 되찾았다.
부릅뜬 그레타의 눈동자에 가득 담긴 것은 붉은빛이었다.
리엘라가 내뿜는 빛인지, 아니면 그레타가 머금은 피눈물인지.
“너…….”
“그래요. 왕녀님. 이제 다시 왔나요?”
그레타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정신이 돌아온 만큼 육신의 고통도 다시 돌아왔으나, 그레타는 그보다 파비안이 찢어버린 영혼이 아프고 아팠다.
그리고, 그런 파비안이 자신의 영혼을 찢어가면서 지키려고 했던 이 여자를 보는 게 아팠다.
“왕녀님. 이젠 우리 악연도 그만 매듭을 지어요.”
*
카일은 몸을 반으로 접으며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동시에 사납고 요란한 구역질이 치밀었다.
누군가가 쥐어짜는 듯 고통스러운 목구멍을 타고 새까맣게 닳아버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카일은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신히 능력을 한 번 사용할 힘을 회복했을 뿐, 또 안투의 힘으로 쫓겨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다음엔 진짜 모습을 드러내보는 게 어때요?”
카넬은 손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괴로워했다.
심장이 타는 듯한데, 이게 몸의 고통 때문인지 리엘라를 향한 집착이 끓어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당신은 여전히 먼저 날 불러 주는군. 그래. 그렇게 말해 준다면.’
살기 위해서라도, 당장 당신을 찾아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