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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시가행진 (129/154)


  • #129 시가행진
    2022.09.22.


    아주 이른 아침, 본궁을 에워싸고 때아닌 인파가 가득했다.

    특히 본궁 내부로 입장이 가능한 시녀들은 내실 문 앞까지 우르르 몰려들어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흐아아암.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그때 그런 그녀들 앞으로 보란 듯이 기지개를 켜며 나타난 건 리엘라였다.

    밤을 새워 수척한 얼굴로 울상이던 시녀들은 리엘라의 등장에 전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어머나? 어떻게?”

    단번에 사방에서 울먹이던 소리들이 잦아들었다.

    내실 복도에서 응접실까지 가득 메운 이들이 놀라서 보는 건 막 잠에서 깨어난 리엘라와, 그런 리엘라가 열고 나온 침실 안쪽이었다.


    “블리니테 님! 무사하셨던 건가요?”

    “침실에서 나오시네요? 안에 계셨나요? 어, 어떻게 된 거죠?”

    리엘라는 여유롭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내가 내 침실에서 나오지, 어디서 나와요?”

    “그, 그게 아니라. 분명히 침실이 비어 있었는데?”

    “맞아요. 리엘라 님이 밤사이 행방불명되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고요!”

    “네? 내가요?”

    리엘라는 최대한 황당하고 놀란 척 시치미를 뗐다.

    사방이 어수선한 탓인지, 저도 모르게 찔끔 놀라 어깨를 떤 것은 아무도 못 본 모양이었다.

    참 다행이었다.


    “이상한 소문이 다 퍼졌었네요? 난 그냥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잔 것뿐인데. 루가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예. 분명 루 양이 그러긴 했는데……!”

    얼떨떨한 시녀의 해명으로 리엘라는 이 상황의 전말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시녀 중 한 명이 새벽녘에 실수로 침실 문을 연 모양이었다.

    그 시녀가 목격한 건, 일찍 침상에 들었다는 리엘라가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쿠션과 베개들이었다.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허겁지겁 돌아온 루가 그 시녀를 밖으로 끌어내며 잘못 본 거라고 우겨봤지만 그게 먹힐 리가 없었다.

    소동을 알아챈 델쿠르 백작까지 가세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런 상황이라 할 수 없이 델쿠르 백작에게도 비밀 통로의 존재와 리엘라 님의 거취를 알렸습니다. 안 그랬으면 백작이 황궁의 병사들을 다 동원해서 밤새 리엘라 님 수색 작전을 벌일 뻔했다니까요.”

     
    급하게 호수궁으로 달려온 아시온은 리엘라가 급하게 채비하는 동안 계속 문밖에서 진땀을 흘려댔다.


    “뒤늦게 델쿠르 백작이 수습을 도와주긴 했지만 시녀들의 입을 막는 것까지는 무리였습니다. 리엘라 님이 갑자기 사라졌다느니, 납치를 당한 것 아니냐느니, 하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는데. 와. 아니라고 해명하고 돌아서면 또 저쪽에서 엉뚱한 얘기가 퍼지고 있고…….”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네.’

    리엘라는 아직 졸음을 떨치지 못해 하품하는 척하면서 살짝 뒤로 돌아 가슴을 쓸었다.


    “다들 시끄럽군. 밤새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면서?”

    때마침 정복을 잘 갖추어 입은 헤르한도 내실 정문을 향해 들어섰다.

    아무 일도 모르는 척, 호수궁에서 밤새 근무를 하고 이제야 퇴근하는 척하면서.


    “아, 폐하, 그게 아니라……. 아닙니다. 저희가 괜한 소동을 일으킨 모양입니다.”

    “송구합니다. 황궁에 가득 들어찬 귀빈들이 다 하이에나처럼 리엘라 님만 노리고 있으니 정말 그놈들……, 아니 그분들이 리엘라 님을 밤새 어찌 한 줄로만 알고 너무 걱정되어서요.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틈도 없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심장이 꿍 울렸다.

    헤르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더한 소문을 일축하기 위해서라도 엄한 말로 시녀들을 꾸중하려던 헤르한은 그냥 입을 다물고 대신 리엘라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우리 앞으로는 밀회도 삼가야겠어요.’

    헤르한은 픽 웃으며 리엘라의 애틋하고 멋쩍은 미소에 고개를 끄덕였다.


     

    *



    “이번 소동이 상기하는 바는 아주 큽니다.”

    상황이 일단락된 후.

    집무실에 둘러앉은 이들 가운데 제스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시온은 그 뜻을 알겠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은 침실에서 똑바로 자자, 그거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멍청한 새…….”

    순진무구한 대답에 제스는 차마 욕도 끝까지 뱉지 못했다.

    헤르한과 리엘라. 두 분 폐하를 모셨을 뿐만 아니라, 델쿠르 백작과 어린 시녀 루까지 앉혀 놓은 자리였다.

    제스는 분을 삭이고 심호흡을 한 뒤에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다들 내색 안 하고 있지만 외줄 타듯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는 겁니다. 리엘라 님의 안위에 대해서.”

    아시온을 뺀 나머지가 모두 그 말에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엘라 블리니테’라는 여자가 황제의 정혼자라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갑자기 세상에 현존하는 유일한 안투의 후손이라고 하질 않나.

    황제는 전쟁이라도 벌일 듯이 살벌하게 선전포고하고 결혼 준비를 하는데, 거기에 끼어보겠답시고 전 세계 각국의 수장들이 한데 모여드는 유례없는 상황.

    그 모든 과정에서 리엘라는 늘 한발 물러서 있었다.

    특히 신전에서 돌아온 뒤는 더욱 그랬다.


    “다들 리엘라 님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맞아요.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도요. 저도 잠깐만 방심하면 맨날 여기저기 끌려 다니는걸요. 리엘라 님은 어떤 분이시냐고, 언제쯤 볼 수 있느냐고요.”

    루가 작지만 야무진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제스는 그쯤에서 자신이 준비한 대책을 꺼내 들었다.

    바로 황제와 황후의 ‘시가행진’이었다.


    “기각.”

    물론 헤르한은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반기부터 들었다.


    “아까 시녀들 말 못 들었나? 이 황궁 안에만 해도 하이에나들이 득시글거리는데 나더러 무방비하게 그 앞에 내 보물을 꺼내 보이라고?”

    대놓고 리엘라를 보물이라 칭하는 황제의 말투는, 이제는 아무도 문제 삼을 생각은 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방비야 당연히 엄중하게 하면 그만이고요. 그냥 꺼내 보이라는 게 아니라 자랑하시라는 겁니다.”

    제스의 말에 차분하게 동조한 건 델쿠르 백작이었다.


    “황성 귀족들도 리엘라 님의 얼굴을 한 번 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리엘라 님에 대한 접견 요청서를 쌓아 놓을 서고가 따로 필요할 정도이지요. 확실히, 시가행진 한 번이면 어느 정도 민심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될 것도 같습니다. 폐하.”

    “글쎄. 시기가.”

    뒤에 생략된 말은 물론 ‘좋지 않다’라는 말이었다.

    그레타를 아직 잡지 못했고, 어딘가에 연맹이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

    그런 와중에 백성들에 대한 리엘라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큰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


    “좋지 않으니까 더욱 만민 앞에 내보이시죠.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보물을 가졌는지.”

    제스가 말하자 여태껏 잠잠히 듣고 있던 리엘라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방금 그 말은 좀 그러네요. 제스 경. 난 폐하만의 보물이지, 제스 경의 보물은 아닌데요?”

    그 농담에 아시온은 너털웃음을 짓고, 제스는 ‘윽’ 하고 안면을 구기며 이를 갈았다.

    리엘라는 마음껏 웃다가 헤르한의 손을 잡았다.


    “어쨌든 전 좋아요. 폐하 옆에 당당히 있는 거, 이젠 뽐내고 싶기도 하고.”

     

    *

    그렇게 황제와 예비 황후의 바하보르덴 시가지 행진 일정이 잡혔다.


    “황족의 시가행진이라는 게 자주 있는 일인가요?”

    “역사상 허세가 높기로 유명했던 렌티스 2세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황성을 행진했다고 하지요. 그 정도로 자주는 필요 없지만, 민중의 관심과 인기를 끌기에 가장 손쉬운 수단인 것은 맞습니다.”

    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입 데이트랍시고 헤르한과 황성 거리를 거닌 적도 있었고, 시가행진과 비슷한 것을 리오타 왕국의 왕성에서 한 적도 있었지만.


    ‘떨리긴 떨리네……. 별 탈 없겠지?’

    별 탈이 있을 턱이 없었다.

    황궁의 전 군대가 리엘라의 마차를 호위할 병력으로 편성되었고, 행진이 예정된 경로를 따라 도시 경비도 살벌할 정도로 강화되었으니까.

    도시 전체는 황제가 기획한 뜻밖의 이벤트에 축제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근처의 도시들이 연일 황성인 바하보르덴으로 꽃을 사다 날랐고, 도시 경비대에게 웃돈을 쥐어가며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이들의 싸움도 벌어졌다.

    여태껏 꼭꼭 숨겨온 리엘라를 만민 앞에 드러내 보이는 자리이니만큼 황실의 모든 인력이 대비에 힘을 쓰는데도 헤르한은 당일, 마차가 출발하는 그 순간까지 긴장을 떨치지 못했다.


    “이제라도 취소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긁어 부스럼인 것 같아.”

    “우린 리오타 왕국도 다녀왔고, 신전도 다녀왔잖아요. 이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결혼식도 하게 될 텐데. 그 어려운 걸 다 해놓고, 이게 그렇게 걱정되세요?”

    “네가 내 입장이 돼 봐.”

    헤르한이 이런 식으로 투덜거릴 때마다 리엘라는 그가 못내 사랑스러웠다.


    “글쎄요. 과연 어떤 입장이시기에 출발 직전에 기마 행진도 마차 행진으로 바꾸고, 행진 시간도 10분으로 줄이고. 예정 경로도 죄다 엎어서 황성 광장에 잠깐 나갔다가 오는 것으로 싹 바꾸셨나요?”

    리엘라의 도발에도 별 대꾸를 하지 못할 정도로 헤르한의 경계가 짙었지만, 그게 무색할 정도로 시가행진은 안정적이고 순조로웠다.


    ‘와아아아아.’

    예상 못한 것이 있다면, 젊은 황제 부부를 향한 시민들의 환호와 함성이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이라는 것 정도.

    황성 광장 안을 가득 메운 인파는 하나같이 웃는 낯과 기대에 찬 얼굴들이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하나뿐인 신의 후손!”

    “리엘라 블리니테 님! 우리 엘슈바이크의 영원한 신의 은총을!”

    기쁨에 찬 부르짖음에 리엘라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왠지 속이 울렁거릴 정도인데, 정작 헤르한은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봐. 다들 널 노리잖아.”

    “어휴. 얼마나 집착이 심해지셨는지. 이제는 제 백성도 적으로 보이시나 봅니다.”

    리엘라는 혀를 내두르는 아시온을 보며 웃었다.


    “단상 아래로 너무 가까이 가지 마. 리엘라.”

    “알겠어요.”

    어차피 광장의 단상 위아래로는 무장한 호위 기사들이 몇 겹이었다.

    누구 하나가 미쳐서 난입한다고 해도 절대 리엘라의 털끝 하나 건들 수 없는 구조였다.

    리엘라는 그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아쉬울 뿐이었다.

    한명이라도 더 많은 나의 백성. 나의 편.

    나를 보는 것이 대단한 기쁨이라도 되는 양 행복해하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라도 더.

    그때.


     


    “……카일?”

    저도 모르게 리엘라가 아주 작게 머금은 말 한마디에 헤르한의 척추가 뻣뻣해졌다.

    헤르한은 곧바로 리엘라의 허리를 낚아채듯 잡았지만 리엘라는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 얼굴이었다.


    “리엘라. 방금 뭐라고 했어?”

    “네? 제가 뭐라고 했어요?”

    “‘카일’이라고 했잖아.”

    “제가요? 아…….”

    리엘라는 다시 군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뭔가 익숙한 얼굴을 봐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반사적으로 말이 나왔나 봐요. 분명히 저기쯤에 있었던 것 같은데?”

    다시 근방을 샅샅이 보았지만 아까 눈에 들어왔던 그 얼굴은 없었다.

    헤르한은 사색이 된 채 당장 행진을 중단했다.

    리엘라는 당황한 채 헤르한의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리엘라. 네가 광장에서 봤다는 사람. ‘카일 파를란테’인가?”

    “네?”

    카일 파를란테. 카일 파를란테.

    리엘라는 그 이름을 가만히 곱씹다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이름이었어요. 그걸 폐하가 어떻게 아세요?”

    “…….”

    “그러고 보니 이제 떠올라요. 어제 물어보셨던 것 있잖아요. 그 도련님. 그 도련님의 이름이 카일이었어요.”

    “그자가 광장에 있었다고?”

    “글쎄요. 십 년도 더 되었으니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기는…….”

    “일단 돌아가자. 리엘라.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황궁으로 돌아가자마자 헤르한은 아시온을 호출했다.

    당장 광장 출입객의 명단을 전부 추려서 가져오라고 명할 생각이었는데, 호위의 선봉을 맡았어야 할 아시온은 어째선지 자리를 비우고 한참 뒤에야 급하게 나타났다.


    “아시온! 어딜 갔었지?”

    헤르한은 언성이 높았다.

    아시온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면서도 경직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아시온. 오늘 광장 출입객이…….”

    “폐하. 그보다 먼저 드릴 보고가 있습니다.”

    아시온은 어울리지 않게 주군의 말을 끊고 보고를 이었다.


    “중앙 신전 쪽에 남아 있던 수색대로부터 긴급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그레타 페오도르나를 찾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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