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달빛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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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달빛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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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달빛의 맛
2022.09.18.
저문 하늘의 서편이 푸르게 물들어가기 시작할 무렵.
호수궁의 정문으로 한 이국의 남자가 쭈뼛거리며 들어섰다.
“슈텐 공국 사절단의 대표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폐하를 뵐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폐하께서 오늘 예정이었던 저희 사절과의 만찬을 미룬다고 하셨는데 정확한 시간 고지가 없으셔서 일정을 여쭙고자 합니다.”
그런 남자 앞, 미동도 없이 문을 지키고 서서 싸늘한 축객령을 전하는 이는 이엘이었다.
“돌아가 계시면 제가 폐하께 뜻을 여쭙고 따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바로 답변을 들으면 좋을 듯한데…….”
이엘이 찌릿하며 눈을 흘기자 사절단 대표라는 이는 어쩔 줄 몰라 민망하게 웃었다.
“아하하. 죄송합니다. 저희 대공께서 워낙 폐하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계시는 터라…….”
“폐하께서는 수배 중인 흉악범에 관한 문제로 긴급회의 중이십니다. 황제를 암살하려던 범인을 잡는 일보다 만찬 일정이 더 중요하다면, 당장 귀공께서 직접 들어가 약속을 잡으시겠습니까?”
“아, 아니, 아닙니다!”
사절단 대표는 손사래를 치며 차마 호수궁 정문의 턱을 넘지 못하고 돌아섰다.
이엘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식으로 쫓아낸 이가 지금이 처음은 아니었다. 벌써 둘이 왔다가 갔고, 앞으로 몇이 더 올지 모를 일.
말하자면, 밤새 이 문을 지키고 서서 방문객을 쫓아내야 한다는 소리였다.
‘정신 차려 보니 나도 참 우스운 처지가 되었군.’
이엘은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차마 호수궁 안쪽을 돌아보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는 가능한 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엘이 담담하게 내쉬는 숨은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
하얗고 푹신한 시트 위, 엎질러진 물처럼 리엘라의 긴 머리카락이 물결친 채 퍼져 있었다.
“폐하……!”
헤르한의 쉼 없는 입맞춤에 리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그에게 안긴 밤이 이제는 수도 없는데도 마치 늘 처음처럼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리고 조마조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헤르한의 몸은 조각 같았다.
달빛을 등지고 있기 때문일까.
적당히 그늘진 몸에 굴곡이 오늘따라 더 잘 보였다.
어떤 느낌일까. 달빛이 내려앉은 당신의 몸에 닿는 느낌은.
리엘라는 가느다란 손끝으로 흰빛이 내려앉은 곳을 따라 헤르한의 몸을 훑었다.
넓고 단단한 어깨. 쇄골 위 옴폭 들어간 부분. 그 아래 도드라진 단단한 뼈를 만지다가 내려가면 탄탄한 가슴이 있었다.
“폐하. 아름다워요.”
그러자 헤르한이 아예 상체를 일으켜서 몸을 더 훤히 드러냈다.
네가 족할 때까지 어디 한 번 마음껏 만지라는 것처럼.
헤르한이 리엘라를 빤히 보며 고개를 까딱일 때마다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헤르한의 눈썹 위에서 들썩거렸다.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의 몸을 구석구석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흰 손가락이 그의 딱딱한 복근에 이르렀을때, 헤르한이 그 손을 세게 감싸 쥐었다.
그는 리엘라의 손을 끌어당기고는 그 손바닥에 농염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네가 더 아름다워. 리엘라.”
헤르한은 리엘라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채로 말했다.
손바닥 가운데의 말캉한 느낌이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그 찌릿한 느낌에 리엘라가 몸을 웅크리면서 이불자락을 끌어당기자, 헤르한이 그걸 바로 낚아채서 옆으로 치워버렸다.
“아앗. 폐하!”
“숨어 버리면 안 되지. 내 모습은 마음껏 다 봐 놓고. 혼자만?”
그래도 리엘라가 이불을 끌어 올리려고 하자 헤르한이 깍지를 껴 그 손을 결박했다.
졸지에 죄인처럼 양팔이 붙잡힌 리엘라는 어쩔 줄 모르고 수줍게 얼굴을 들었다.
“이제는 내 차례야.”
“폐, 폐하…….”
“네가 아까 나의 어딜 만졌던가. 어깨? 가슴?”
“……!”
리엘라는 뭐라도 변명을 하려다가 헉 숨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헤르한이 붉은 입술로 리엘라의 목덜미를 한 입 크게 머금은 것이었다.
“저는 손으로 만졌을 뿐인데 폐하는 왜……!”
사이좋게 순서를 지키자면서.
말만 번드르르하지 헤르한은 늘 욕심이 지나쳤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헤르한을 호수궁으로 부른 것은 자신인데 결국은 또 이렇게 잡혀 버리다니.
또 이렇게, 그가 이끄는 대로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라니.
“……미워.”
리엘라가 눈을 질끈 감고 읊조린 말에 헤르한이 내뱉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널 아주 많이 원하는 걸 어쩌겠어.”
그 말을 증명하듯, 헤르한은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몸을 숙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리엘라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참을 수 없이 널 원해. 너의 모든 걸 다 원해. 리엘라.”
육중한 힘이 리엘라를 짓눌러왔다.
그런 헤르한에게 한참 매달려 있다가 겨우 눈을 떠 보면 헤르한의 어깨 너머로 고요한 호수 표면이 보였다.
전에도 본 적이 있는 풍경이었다.
어째서 이 순간이 이다지도 짜릿하고 아득한가 했더니, 바로 그 때문인 모양이었다.
여기. 바로 이 자리가, 헤르한에게 처음 안겼던 바로 그곳이어서.
살짝 열감기를 앓아 유난히 몸이 뜨거웠던 날이었다.
건강검진을 이유로 침실 안에 갇혀 있다시피 했던 헤르한이 비밀 통로를 통해서 갑자기 들이닥쳤던 날.
생각해보면 꼭 오늘의 자신과도 같았다.
그때 헤르한이 예고 없이 자신을 찾아왔던 것처럼, 오늘은 자신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헤르한의 품으로 파고들었으니까.
리엘라는 그땐 복잡한 건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에게 어떤 힘이 있는지.
오로지 그냥 헤르한이 죽고 사는 것만을 걱정하며 그에게 안겼던 그 날 밤, 리엘라는 본능적으로 알았었다. 자신은 이렇게 완성되리라는 것을.
리엘라는 이제 헤르한의 황후가 되어 있었다.
그의 구원자가 되어 있었고 주인이 되어 있었다.
많은 게 달라졌지만, 그에게만 절대적인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은 무더웠던 호수궁의 여름밤과 다를 것이 없었다.
*
달빛이 환했다.
오늘따라 달밤이 뜬 하늘이 구름 없이 맑아서일 수도, 호수궁에서의 밤은 오랜만이라 그럴 수도.
아니면 함께 숨결을 나누며 보내는 밤은 으레 이렇게 밝았던가.
리엘라는 옆으로 누워서 창밖의 호수를 바라보았다.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뒤에서 하얀 등을 꼭 끌어안은 채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피곤하다고 생각했던 밤인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헤르한과 이렇게 꼭 맞붙어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잠으로 흐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폐하는 좀 주무셔야 할 텐데. 내일도 바쁘실 테니까.”
“아니. 잠드는 것보다 이러고 있는 편이 더 좋지.”
“저랑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으니까요?”
“아닌데?”
고개를 갸웃거릴 것도 없었다. 헤르한의 노곤한 목소리엔 이미 장난기가 가득했으니까.
“네 정화의 힘을 받아서 좋다는 거였는데?”
역시나.
리엘라는 발끈해서 뒤를 돌았다.
조금 전까지 창 너머로 달빛에 빛나는 호수를 보고 있던 눈에 이제는 헤르한이 가득 담겼다.
아름답고, 푸르고, 반짝인다는 건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농담이야. 리엘라.”
“와. 자꾸 그러면 정화의 힘, 하나도 안 줄까 보다.”
“그렇게 할 수나 있고?”
헤르한은 벌떡 일어난 리엘라를 다시 끌어 잡아서 자기 품에 가두며 말했다.
리엘라는 달큼한 냄새가 나는 몸 안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투정을 부렸다.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둥근 어깨를 그대로 깨물어 버렸다. 일부러 벌이라도 주겠다는 것처럼.
“아앗!”
뜨거운 입맞춤이 동그란 어깨뼈 바로 아래 내려앉았다.
헤르한이 지나간 살결마다 붉은 꽃이 피었다.
내일도 드레스를 수십 벌은 갈아입어야 할 텐데.
리엘라는 그렇게 생각할 뿐, 헤르한을 뿌리치지는 못하고 그저 익숙하게 눈을 감기만 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갑자기 헤르한이 살짝 뒤로 물러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네가 정화해 준 다른 사람이 있어. 나 말고.”
“파비안이요?”
“아니.”
그 이름은 더 듣기도 싫다는 듯이 인상을 쓴 헤르한은, 이내 그것보다 더 깊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을 꺼냈다.
“네가 아주 어릴 때. 행크를 따라 어떤 저택에 몇 번 갔었지? 웬 도련님이랑 친구를 해준답시고.”
“도련님이요? 친구? 글쎄요. 행크의 기억을 통해서 보신 거예요? 잘 모르겠는데.”
“너랑 키가 엇비슷한 남자아이였어. 키는 대충 이쯤. 머리색은 연한 하늘빛이고.”
“흠. 알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헤르한의 설명대로라면 열 살 남짓할 때의 일일 텐데, 기억이 분명할 리가 없었다.
“둘이 손을 잡고 있었어.”
“제가요? 그 아이랑?”
그렇구나, 하고 실없이 하는 대답에 헤르한이 황당하다는 듯이 살짝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또 조각 같은 그의 몸이 드러났다.
리엘라를 원하고 있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헤르한은 일단 성질은 다 내고 봐야겠다는 듯이 분한 얼굴이었다.
“‘그렇구나’라니. 그게 아니잖아?”
“아닐 건 또 뭐예요. 열 살 때 일이잖아요. 설마 그때의 일을 질투하시는 거예요?”
“손을 잡고 있었다니까? 그 귀여운 손을?”
고운 조약돌같이 예쁘고 통통한.
자기는 잡아본 적도 없는, 어린 리엘라의 그 작은 손을.
“그래서요? 그 도련님도 엔릴의 후손이었던 거예요?”
“내 생각에는 그렇…….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리엘라.”
“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을 구하고 다녔나 봐요. 제가.”
저 잘했죠?
일부러 헤르한을 놀리듯 도발하는 말에 헤르한이 이를 악물었다.
이젠 다시 나를 안아 주겠지, 리엘라는 생각했고 그 예감이 적중했다.
“이리 와. 오늘은 한숨도 못 잘 줄 알아.”
이를 갈던 헤르한이 다시 리엘라를 끌어당겼다.
아까 맺힌 땀이 다 식지도 않은 때였다.
헤르한이 리엘라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떼어 냈다.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의 품 안으로 파고들면서 손끝으로 헤르한의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그 귀여운 손 말고, 이렇게 폐하를 유혹하는 예쁜 손은 어때요?”
*
“폐하…….”
똑똑.
똑똑.
“폐하…….”
똑똑.
똑똑똑.
“폐하? 으아아. 제발…….”
똑똑똑똑똑.
정신 사나운 노크에 리엘라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땐 이미 창안으로 드는 햇살이 밝았다.
얼마나 긴 밤이었던 걸까.
아니.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을 때까지도 헤르한의 품 안이었던가.
리엘라는 몽롱한 목소리로 문밖을 향해 대답했다.
“아시온 대장?”
“으아아! 예! 드디어 일어나셨습니까?”
“네. 드디어 일어나긴 했는데…….”
조금 더 자고 싶은데.
그냥 이대로 며칠 더 있고 싶기도 하고.
리엘라는 아시온이 문밖에서 울든 말든, 아직 옆에 곤히 잠든 헤르한의 가슴을 베개 삼아 다시 이마를 파묻었다.
그때 아시온이 문밖에서 울분을 터트렸다.
“빨리 폐하 좀 깨워주십시오! 그리고 리엘라 님은 어서 비밀 통로로 본궁으로 돌아가십시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기나 합니까?”
아시온이 울든 말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목소리를 듣고 보니 그는 정말 우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