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 물빛이 아른거리는 곳 (127/154)


  • #127 물빛이 아른거리는 곳
    2022.09.15.


    헤르한의 말이 맞았다.


    ‘사랑만 받기에도 바쁠 거라더니.’

    황궁으로 돌아온 이후, 리엘라의 일상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정신없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가올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지경인데.


    “새나 양.”

    “꺅! 네! 넵! 블리니테 님! 지금 저를 부르신 거지요? 뭔가 필요하신 거라도?”

    “아니, 난 그냥 물 한 컵만 달라고…….”

    평소 가족처럼 편하게 지내던 시녀들이 갑자기 눈만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도 펄쩍 뛰어오르면서 부담스럽게 굴지를 않나.


    “오늘 블리니테 님 머리는 제가 만지면 안 될까요? 네?”

    “왜요? 오늘 당번은 엘리 양이잖아요.”

    “제 동생이 내일모레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치르거든요. 정말 중요한 시험이라서 안투 신의 은총이 꼭 필요해요!”

    “어머. 안 돼요. 저도 곧 조카가 태어날 예정이라 신의 은총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시녀들이 서로 신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면서 저들끼리 리엘라를 모시는 일을 두고 다툼을 벌이기도 부지기수였다.


    “난 은총 같은 거 베풀 줄 모르는데. 특별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에이! 엄청난 정화의 힘으로 폐하를 지켜 주시잖아요.”

    “루, 쉿!”

    전과 다를 바 없이 구는 건 그나마 리엘라와 헤르한의 능력을 전부터 알고 있었던 루 정도.

    하지만 루 하나에게만 의지해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각국에서 보낸 결혼 축하 사절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호화로운 마차 행렬 수십 대가 황궁 안으로 들어서는데, 그들 전부가 황궁 안에 짐을 풀기도 전부터 눈에 불을 켜고 리엘라를 만나려 든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리엘라는 헤르한으로부터 가능한 내실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당부를 들었다.


    “손님들이 얼마나 많이 왔길래…….”

    리엘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발코니를 향해 난 커튼을 슬쩍 들춰 보았다가 기겁했다.

    얼핏 발코니 아래가 까마득한 인파로 바글바글한 것 같았는데, 잘못 본 걸까?

    설마 저게 다 자신을 기다리는 손님들이라고?


    “커튼은 전부 쳐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블리니테 님.”

    보좌관인 델쿠르 백작은 그저 차분하게 내실 안 모든 창을 닫고 이중 삼중으로 경호를 점검할 뿐이었다.


    “이틀 동안 햇빛도 제대로 못 봤어요. 조금 답답한데…….”

    “…….”

    “산책은 사치겠죠?”

    “예.”

    ‘그래도…….’ 하면서 투정을 부려 볼 여유도 없이 의상실 쪽의 시녀들이 또 우르르 들이닥쳤다.

    결혼식은 한 번 하는데 필요한 드레스는 어째서 수십 벌인 것인지.

    리엘라는 머리가 핑핑 돌았다.

    어떤 슬픔이나 긴장에 젖어 있을 새도 없이 시간이 흐른다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뭔가가 부족해.’

    리엘라는 내실 응접실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 틈에서 얕은 한숨을 쉬었다.

    문득 열린 문 틈새로 들여다보이는 침실 안이 어쩐지 온기 없이 적막해 보였다.

    리엘라는 턱을 괴고 고민하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바짝 들었다.


    “델쿠르 백작.”

    “예. 블리니테 님.”

    “이엘 경을 불러와 주겠어요?”

    “예?”

    델쿠르 백작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리엘라가 애처로운 모습으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기에 몰래 황제를 보러 갈 방도라도 연구하는 건가 했더니.


    “리오타 대사관의 이엘 바이스를 말씀하시는 것이 맞습니까?”

    “네. 그를 좀 불러와 줘요. 당장.”

     

     

    *

    황궁은 불야성이었다.

    대연회 홀에선 세상에서 가장 성대할 황제의 결혼식 준비가, 대회의실에선 끊임없는 정무 회의가 이어졌고, 거대한 성문은 입을 닫을 새도 없이 새로운 손님들을 궁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건 곧 하나뿐인 성녀를 황후로 맞이할 엘슈바이크 황실의 위상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건 또다시 말해, 황제 헤르한이 며칠째 쉬지 못하고 야근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방금 알텐의 사절단까지 만나고 왔으니 이제 잠시 회의실에 들르셔야 합니다. 이후엔 슈텐 공국의 사절단과 저녁 만찬이 있습니다.”

    “슈텐이 벌써 도착했나?”

    “예. 폐하. 슈텐에선 대공이 직접 사절을 이끌고 왔습니다. 하여, 오늘 만찬회 때 꼭 블리니테 님을 함께 알현하고 싶다는 간곡한 청이…….”

    “유감스럽지만 예외는 없다고 전해. 이번에도 나 혼자 참석할 테니 그렇게 준비하고.”

    “……예. 알겠습니다.”

    뜻을 전한 헤르한은 바로 또 바쁜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에서 쪽잠을 자고 일어나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한 게 조금 전 같은데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잠깐 상념에 젖은 헤르한은 조금 걸음을 늦추고 뒤쪽을 향해 살짝 눈짓했다.

    그러자 헤르한의 뒤를 따르던 보좌진들이 전부 몇 발 뒤로 물러섰다.

    말소리가 흐르지 않도록 일부러 광장의 분수대 쪽으로 이동한 헤르한의 옆구리에 따라붙은 건 제스뿐이었다.


    “목걸이는?”

    “제국의 상단을 전부 동원해서 추려낸 건 일단 이 정도입니다.”

    헤르한은 제스가 내민 책자를 그 자리에서 펼쳐 보았다.

    두꺼운 카탈로그에 모양과 빛깔이 조금씩 다른 푸른 목걸이 그림이 수십 개였지만, 그 어디에도 정확히 헤르한이 찾는 물건은 없었다.


    “브레니케 공작에게도 답신이 왔습니다. 현재 리오타 왕국의 백작가 중엔 ‘파를란테’라는 이름이 없다고 합니다.”

    “목걸이도, 목걸이를 가져간 놈도, 전부 오리무중이군.”

    “예. 아무래도 왕국 쪽으로 사람을 더 보내서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리고 신전 쪽 조사는…….”

    헤르한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하다가 말았다.

    광장 건너편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리 하루에도 수십 번 온갖 보고가 올라오는 상황이라지만, 헤르한은 지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의 낯이 그리 익숙지도 않았고 반갑지도 않았다.


    “이엘 바이스.”

    “폐하를 뵙습니다.”

    쏴아아.

    때마침 분수가 물을 뿜는 소리만이 둘 사이의 정적을 가로질렀다.

    헤르한은 제 앞에 선 이엘에게로 한발 가까이 다가갔다.

    제스와 얘기를 나눌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더 은밀하고 싸늘한 그의 목소리가 이엘의 정수리로 날아가 꽂혔다.


    “무슨 일이지? 연맹에 대한 단서라도 떠올랐나?”

    그게 아니고서는 네가 먼저 날 찾아올 일은 없을 텐데.


    “대사님의…….”

    이엘은 스스로 말을 끊고 잠깐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고쳐서 했다.


    “블리니테 님의 전언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걸 왜 네가?”

    델쿠르 보좌관도 있고, 본궁의 시종들만 해도 한 무더기는 있는데.

    헤르한은 인상을 한껏 썼다.

    이엘의 턱 아래, 주홍글씨처럼 남은 긴 흉터를 바라보는 헤르한의 시선이 매서웠다.


    “송구합니다. 블리니테 님께서 은밀히 요청하신 일이라.”

    그러니까 네가 왜 리엘라의 은밀한 청을 받느냐고.

    당장 언성을 높이려던 헤르한은, 이어지는 이엘의 말에 일그러뜨린 미간을 서서히 폈다.

    이엘이 말을 다 마쳤을 무렵에는 이미 그가 괘씸하고 싫은 마음 따위를 전부 잊은 채였다.


    “……그렇군. 리엘라가.”

    헤르한은 그저 눈을 반짝였다.

    옆에서 이엘의 말을 함께 들은 제스가 이 상황이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지만, 헤르한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몸을 돌려 뒤에 물러나 있던 보좌진을 향해 걸어가 말했다.


    “오후 일정을 조정하겠다. 회의는 취소하고 슈텐 공국과의 만찬은 내일로 미루는 것으로 하지.”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리오타 왕국의 수배범인 그레타 페오도르나의 처리에 관해 시급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 말에 보좌진들 쪽에 서 있던 아시온이 당황한 눈을 들어 보였다.

    그레타 왕녀의 일에 관해 자기가 모르는 일이 생겼다고?


    “아무래도 오늘은 리오타 대사관에서 밤새 긴급한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군. 아시온 대장은 날 따라오고 나머지는 필요한 일이 생기면 부를 테니 해산하도록.”

    이른 저녁.

    헤르한의 보좌진들은 그렇게 노을이 진 광장 분수대 앞에서 때 아닌 퇴근을 당했다.

    아시온은 심각한 얼굴로 주군을 뒤따라가다가 제스에게 붙잡혔다.


    “왜 잡아? 빨리 가 봐야지. 그레타 왕녀 쪽에 급한 일이 생겼다잖아?”

    “없어. 그런 거. 담당인 네가 모르는데 그런 일이 있겠냐?”

    “그럼? 폐하께서 나보고 따라오라고 하셨는…….”

    “그건 그냥 보좌진들 들으라고 한 소리고.”

    아시온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주군이 빠른 걸음으로 내닫는 곳.


    “아.”

    거긴 리오타 대사관이기 이전에 황후궁이라고 불리던, 또 그에 걸맞은 아주 ‘은밀한’ 어떤 비밀을 지닌 곳이었음을.

    *



    “블리니테 님이 호수궁 안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밀 통로로 이동하셔서, 저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헤르한은 이엘이 전한 말을 곱씹으며 호수궁 안으로 들어섰다.

    이엘이 미리 손을 써둔 것인지 대사관 직원들은 보이지 않았고, 내실 근처에 남겨둔 호위 인력을 제외하고는 호수궁 전체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불도 켜두지 않은 내실.

    그나마 미약한 촛불 빛 하나가 새어 나오고 있는 침실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니, 그 안에 리엘라가 있었다.

    침대에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려 잠든 채로.


    ‘귀엽긴.’

    헤르한은 비스듬히 선 자세 그대로 한참 리엘라를 바라보았다.

    창밖, 노을을 머금은 물빛이 반짝이면서 리엘라를 어르고 있었다.

    ‘평화’라는 것에 형태가 있다면 필시 이런 모양, 이런 빛깔이리라.

    헤르한은 비로소 선대의 어느 황제가 왜 굳이 번듯한 본궁을 두고 이곳에 별관을 지어 놓았는지 알 것 같았다.

    쌔근쌔근한 숨소리.

    그 숨결에 옆 머리카락이 조금 팔랑거리는 것이나, 동그랗게 웅크린 어깨가 작게 오르내리는 것이 헤르한의 가슴을 따뜻하게 데웠다.


    “아. 폐하…….”

    말 없는 인기척에 리엘라가 깨어난 건 그때였다.


     


    “언제 오셨어요? 지금 몇 시예요? 깜빡 잠들어 버렸나 봐요.”

    리엘라는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더니, 여전히 자신을 보고 선 헤르한을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온종일 본궁에만 갇혀 있느라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은 거예요. 시녀들은 끝도 없이 드레스를 들고 오지, 밖으로는 산책하러 나갈 수도 없지, 그런데 여기로 이어지는 통로가 떠올랐……!”

    재잘거리는 리엘라의 얼굴 위로 헤르한의 그림자가 허리를 숙였다.

    난데없이 포개어진 헤르한의 입술은 시원해서 좋았다.

    꼭 서늘하고도 청명한 바깥바람을 쐬는 기분이라서.

    내내 덥고 답답한 실내에서 웅크리고만 있던 리엘라는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듯 팔을 뻗어 헤르한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제 좀 살겠군.”

    긴 입맞춤 뒤, 헤르한은 살짝 입술을 떼고 말했다.

    리엘라는 그의 목을 감은 팔을 풀지 않은 채로 물었다.


    “폐하도 답답했어요? 폐하는 계속 밖에 계셨잖아요.”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리엘라는 헤르한의 말이 맞는다는 걸 깨달았다.

    본궁이나 호수궁이나, 안에 갇혀 있는 건 매한가지인데 지금은 이다지도 속이 탁 트이는 것을 보면.

    부족한 건 역시 햇살이나 바람이 아니라 이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맞아요. 나도 이제 좀 살겠다.”

    그래서 리엘라는 헤르한이 하는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내어 말했다.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행동이 귀여웠는지 리엘라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은 채로 웃었다.

    쿡쿡. 나른한 웃음을 머금었던 입술은 이내 다시 제 자리를 더듬어 찾아갔다.

    입술을 포갠 두 사람의 몸은 함께 물빛이 아른거리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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