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 생색도 낼 줄 모르는 황후라서 (126/154)


#126 생색도 낼 줄 모르는 황후라서
2022.09.11.


그 후 리엘라와 헤르한은 신전에 조사 인원을 몇 남겨 두고 먼저 황궁으로 돌아왔다.

황제는 장대했던 출정에 비해 조용하고 엄숙하게 복귀했다.

헤르한은 파비안의 유해를 먼저 황궁으로 보내 수습하도록 했다.

그들이 황실에 도착했을 땐, 황궁 사원의 제단 위에 파비안을 위한 작은 촛불 하나가 놓여 있었다.

리엘라는 제단을 향해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헤르한은 사원의 입구에 서서 그런 리엘라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봐 주었다.

밝은 불빛만으로 적막한 사원 안을 가로지르는 리엘라는 꼭 잠든 영혼들을 위로하고 인도하는 여신 같았다.


“파비안. 이젠 혼자서 마음껏 여행 해. 하늘도 날고 불도 내뿜으면서. 나 없이, 네 마음껏.”

영롱하게 빛나는 촛대 앞에, 리엘라는 동화책 한 권과 작은 사탕 상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잘 가.”

비로소 평화로운 목소리였다.

리엘라는 오는 길 내내, 헤르한의 품 안에서 마음껏 울었고 후련할 만큼 슬퍼했다.

헤르한은 파비안이 떠나는 순간까지 여신의 가호를 받는다며 질투했다.

그렇게 툴툴거리면서도, 그는 굳이 신전 바깥 차가운 북쪽 숲 어딘가에 쓸쓸히 버려졌어야 할 파비안을 이곳까지 데려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도록 한 것이었다.

제단에서 묵념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니, 먼 입구에 햇살을 등지고 선 헤르한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리엘라는 생각했다.


‘파비안이 홀가분하게 떠나갔다면, 그건 내 덕이 아니라 내 곁에 있어 준 당신 덕분일 거예요.’

리엘라는 힘겹게 내디뎠던 길을 아주 씩씩하고 담담하게 되돌아왔다.


“인사 다 했어요.”

“그래.”

헤르한은 손등으로 리엘라의 흰 볼을 쓸었다.

며칠이나 눈물로 거칠기만 하던 볼이 어느새 다시 새 살처럼 보드라운 것이 참 기특했다.


“전 먼저 나가 있을게요. 햇볕 좀 쬐고 싶어요.”

헤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엘라가 성전 밖 쏟아지는 햇살 아래로 나아가 개운하게 심호흡을 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는 제단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파비안이 가는 길엔 감사한 줄 알아야 할 텐데.”

“알 겁니다. 폐하가 이렇게 인정 넘치시는 분이라는 것을요.”

“아니. 내가 아니라 리엘라에게 감사한 줄 알아야 한다고.”

아. 어련히요.

아시온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 속에서 헤르한은 한참 동안 제 푸른 시선을 촛대 앞, 리엘라가 두고 간 선물에 고정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마음은 네 놈이 받기엔 너무 커.’

그래도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눈 감고 모른 척 해주지, 되뇌며 헤르한은 파비안과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그건 리엘라가 모르는, 그들만의 마지막이었다.


 

***



“할 말이 있습니다.”

“네가 감히?”

판별식이 끝난 직후. 잠시 휴식하기 위해 리엘라와 막 신전을 떠나기 전이었다.

헤르한은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 리엘라를 마차 안에 앉혀놓고 나와서 제스와 은밀히 어떤 곳으로 향했다.

거기엔 파비안이 있었다.

그레타와 연맹에 관한 내용을 증언했다는 그는 생사가 위태로운 꼴로 누워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애원한다고 리엘라를 만나게 해 줄 거란 기대는 마라.”

헤르한이 싸늘하게 단언하는데도 파비안은 태연했다.

애초에 그런 건 꿈도 꾸지 않았다는 듯이.


“리엘라가 아니라, 폐하께 드릴 말씀입니다.”

“겁도 없군.”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시지.

헤르한은 팔짱을 끼고서 파비안을 섬뜩하게 내려다보았다.

만일 그가 하겠다는 말이 앞으로 리엘라를 잘 부탁한다든지 하는 같잖은 말이라면 저 가느다란 숨통을 당장 끊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 의사에게 들었습니다. 행크의 목걸이를 찾고 계시다고요. 그게 이번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파비안의 질문은 의외였다.


“이번 사건과는 상관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것을…….”

파비안에게 친절히 답을 알려 주어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입을 연 것은 왜일까.

죽어가는 그를 향한 동정심이었을까.

아니면 리엘라를 가진 이로서의 우월감을 뽐내고 싶었나.


“그 목걸이는 리엘라의 가족이 남긴 유품이었다. 나는 리엘라의 가족을 찾고 있다.”

아.

사막의 바닥처럼 마른 입술이 벌어지고 가느다란 탄식이 새어 나왔다.

파비안은 한동안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것인지. 아니면 통증에 괴로워하는 것인지.


“그 목걸이에 대해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참 숨을 고르던 그는 시간이 꽤 흐른 후에야 감정을 가라앉힌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아는 것을 설명했다.


“그때 리엘라가 너무 슬퍼했습니다. 행크가 동료들을 위해 아끼는 물건을 팔았다고 생각했으니까. 전 리엘라를 달래 주고 싶어서 마을의 상점가를 뒤졌습니다. 거기서 행크의 목걸이를 사간 상인을 겨우 찾았는데, 그땐 이미 또 다른 사람에게 목걸이를 넘겨 버린 뒤라더군요.”

파비안의 말 사이마다 고통에 찬 신음이 섞여 나왔다.

헤르한은 그가 무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을 그만 두라 명하지 않았다.


“‘파를란테 백작’라고 했습니다.”

“파를란테 백작?”

“그 지역에서 가장 부유했던 집안이었습니다. 숲속에, 커다란 이끼 담장이 있는 저택에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숲속, 커다란 이끼 담장이 있는 저택’

알 것 같았다.

행크의 기억 속, 어린 리엘라가 어떤 소년을 만났던 저택.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이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을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언제 어떻게 다시 돌아와서 행크의 목걸이를 사 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면 단서는 충분했다.

헤르한이 제스에게 눈짓하자, 제스는 ‘파를란테’라는 이름을 메모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의 일일 텐데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군. 행크도 그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던데.”

“칭찬이십니까?”

“의심이다.”

헤르한의 시선은 냉담한데 파비안은 쓰게 웃기만 했다.


“행크나 리엘라는 기억 못 해도, 저는 기억합니다. 왜냐면 그 집의 도련님이 리엘라를 좋아했으니까.”

쿨럭쿨럭.

파비안이 기침을 하니 배에 칭칭 감은 붕대 틈으로 핏빛이 비쳤다.

하지만 헤르한의 관심이 날카롭게 꽂힌 건 파비안의 창백한 안색이나 회한에 젖은 표정 따위가 아니었다.


“카일 파를란테.”

마치 유언을 전하듯.

곧 꺼져 버릴 불꽃처럼 줄곧 파르라니 떨던 파비안은, 그 순간만큼은 강한 눈빛으로 헤르한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리엘라가 그 도련님과 말동무를 해주고 온 날이면 나는 늘 화가 났습니다. 리엘라가 그 집에서 벌어다 주는 것들을 버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데 결국 지금도 똑같은 꼴이네요. 내가 지금까지 누구 덕에 살았던 건지도 모르고…….”

“나보고 네 놈의 추억 팔이나 들으라는 건가.”

헤르한은 그쯤에서 싸늘하게 돌아섰다.


“어쨌든, 리엘라에겐 가족이 있었던 거군요. 리엘라는 버려진 게 아니었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야…….”

후회인지 안도인지 모를 파비안의 흐느낌은 더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헤르한에게 있어 그는 그저, 리엘라를 마지막까지 아프게 만드는 참 빌어먹을 남자이므로.

***

카일 파를란테.

어린 리엘라가 손을 잡아주곤 했던 그 어린 소년도 엔릴의 후손이었을까.

헤르한은 심기가 어지러웠다.

안투의 현신이 나타났다는 말에 신전 수용소에선 까딱하면 폭동이 일어날 뻔했었다.

전 세계의 눈이 모두, 돌아온 성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고 있었다.

신전에서의 선전포고가 제대로 먹혀 들어간 덕에 대놓고 야욕을 드러내던 것들은 일단 고개를 숙였지만,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때를 노리는 것들이 마치 하이에나 떼처럼 사방에 득시글거렸다.

헤르한이 한때 했던 걱정과도 같았다.

마침내 존재가 드러난 리엘라를 온 세상이 탐내는 것.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날이 오면 불안함에 미쳐 버릴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차분하고 머리가 맑아졌다.

당신이 나의 유일한 주인이노라, 리엘라가 끊임없이 고백해 주었기 때문인지.


“폐하. 저 어떻게 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마치 제 하늘인 양 올려다보는 이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해낼 수 있겠다는 의지가 솟구쳤다.


“황궁에 돌아온 후부터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리엘라는 제 앞에 다가온 헤르한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고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저, 사람들한테 미움을 샀나 봐요.”

“뭐라고?”

“아무도 저랑 눈을 마주치질 않아요. 말도 잘 섞지 않으려는 것 같고. 제가 폐를 끼쳐서 그럴까요? 아니면 안투의 후손이라는 게, 좀 무섭게 보이나?”

그렇다고 내가 마녀처럼 자기들을 잡아먹는 건 아닌데.

사랑스러운 투덜거림이었다.

리엘라는 쓰게 웃으면서도 나름대로 씩씩한 얼굴이었다.

따돌림 당하고 있노라 고백하는 사람치고는 아주 의젓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헤르한이 웃자 리엘라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 이겨낼 거니까요. 결국엔 인정받을 거고, 결국엔 폐하의 옆을 지킬 거니까. 잠깐 미움을 사는 거 정도는 견뎌낼 수 있어요.”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머리칼을 쓸며 답해 주었다.

리엘라의 붉은 머리카락은 따스한 가을볕을 가득 머금고서 헤르한의 손 틈새로 탐스럽게 감겨들었다.


“견딜 필요 없어.”

“전 괜찮…….”

“아니. 정말로, 네가 견뎌야 할 게 없다는 뜻이야.”

헤르한이 리엘라를 데리고 이끈 곳은 본궁의 대회의실이었다.

상석의 주인이 비었는데도 대회의실을 가득 메운 대신들은 저마다 시끌벅적했다.

누구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허공에 삿대질까지 해가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리엘라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신들의 말을 듣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정신이 나간 것 아니오? 어딜 감히 우리 황후 폐하께?”

“옳소. 며칠 전까지는 국혼 축하 사절까지 물리겠다면서 배짱을 부리던 것들이 아니오? 그런데 이제 와서 황후 폐하의 단독 알현을 신청하다니? 백 년은 이르오.”

“백 년이 웬 말입니까? 한번이라도 블리니테 님을 넘봤던 것들은 아예 우리 영토에 발을 들이는 것을 금지시켜야 합니다. 이번 결혼식 참석 명단에서도 제외해 버립시다.”

“이렇게 된 김에 성의 경비도 보강해야겠습니다. 국혼 전까지 최대한 군대를 더 동원해서…….”

미움을 산 게 아니었다.

마녀 보듯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놈들이 우리 황후를 넘볼까 봐 다들 나보다 더 혈안이 되어 있어서, 너를 미워할 시간 같은 건 없을 걸.”

헤르한이 리엘라의 등허리를 단단히 감아 안았다.
 

 


“하지만 이상해요. 저 대신, 아까 저랑 마주쳤을 땐 절 무시하는 것 같았는데…….”

“죄 지은 만큼 자중하라고 명했어.”

“네?”

“저자들도 감히 널 의심하고 네게 언성을 높였으니, 안투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고 신의 가호를 나누어 받고 싶거든 당분간 네 앞에서 고개도 들지 말고 눈도 함부로 쳐다보지 말라고 했어.”

아니, 그건 아니잖아.

리엘라는 뒤를 돌아 헤르한을 보려고 했지만 허리를 채어 잡은 그의 손길이 지나치게 단단했다.


“전 노여워한 적 없어요. 가호 같은 것도 베풀 줄 모르는데!”

“맞아. 하지만 저들은 그걸 모르잖아.”

“성녀는 저인데 생색은 폐하가 내시면 어떻게 해요?”

“대신이라도 하는 거야. 나의 황후는 생색도 낼 줄 모르는 황후라서.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르고, 미움을 샀다느니 엉뚱한 생각이나 하잖아.”

입을 쀼루퉁하게 내밀고 헤르한의 품안에서 버둥거리던 리엘라는 그 순간 저항을 멈추었다.

하긴.

계속 저항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품도 아니었지만.


“잊지 마. 리엘라. 앞으로는 사랑만 받기에도 바쁠 거야.”

헤르한의 목소리가 달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