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안녕, 잘 가
(125/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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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안녕, 잘 가
2022.09.08.
*
“파비안. 그걸로 날 찌르려고?”
그레타가 비아냥거렸다.
파비안에게 또 이런 식으로 말을 하기는 싫었다.
그를 잃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혼자 방안에서 미친 척 리엘라의 말투를 흉내내본 적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조곤조곤 말했다면, 이런 식으로 다정한 눈길이었다면, 그러면 파비안이 날 조금은 더 사랑했을까 하는 생각에.
다 어처구니없는 망상이었다.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리엘라처럼 될 수는 없었고, 파비안은 결국 그런 자신을 향해 유리 파편을 쥐고 있지 않나.
“고작 그런 걸로 날 죽일 생각이야? 네가 감히 나한테 그럴 수나 있어? 어?”
“이렇게 해야만 왕녀님을 막을 수 있다면요.”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레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네 앞에 다시 나타난 건 실수였을까.’
그레타는 쓰게 웃었다.
‘나는 그냥 네가 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레타 앞에 끌려온 파비안은 표정 없는 목각 인형 같았다.
그레타는 그가 마냥 반갑게 웃어 주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싸늘할 줄도 몰랐다.
어쩐지 말이 밉게 나온 건 그래서였다.
좋지 않은 타이밍이라는 걸 알면서도 리엘라에 대한 진실을 터트려 버린 것도 그래서였고.
그런 리엘라를 너에게 돌려주려고 자신이 여기에 온 거라는 말을 해 버린 것도 그래서였다.
가뜩이나 충격에 말을 잃은 파비안이 그레타의 그 말뜻을 깨달은 건 한참 뒤였다.
파비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발 그만 두세요, 리엘라를 내버려 두세요, 이제 충분하잖아요.
파들파들 떠는 목소리로 설득도 해보고 애원도 했지만 그리 정성스럽지는 않았다. 그럴 정신도 없거니와, 몇 마디 말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한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파비안은 유리잔을 깨서 그 파편을 꽉 움켜쥐었다.
파비안의 손아귀에서 진득한 피가 배어나는 것을 보고서야 그레타는 조금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정말 파비안이 자길 찌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넌 그런 남자잖아.’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 버린 자신에게 모질게 굴어 본 것이라곤 그냥 등을 돌려 멀어진 게 전부인 바보.
그런 바보가 자신을 찌를 수는 없다.
그래도 한때는 사랑했던 여자인데.
아니, 설령 그게 진심이 아니었더라도 사랑한 시늉이라도 했던 여자인데.
‘설마 네가 나한테 그럴 수는 없어.’
파비안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레타를 안아 주었다.
그레타는 또 몸을 떨었다.
이렇게 다시 파비안의 품에 안기는 상상을 얼마나 많이 했었는지.
“파비…….”
되찾은 파비안의 품 안에서 그의 이름을 애틋하게 부르려고 했는데, 왜인지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파비안이 꽉 쥔 파편이 자신의 배에 꽂혀 있다는 건 뒤늦게 알았다.
파비안은 그레타보다 자신이 더 괴로운 듯이 흐느꼈다.
“저도 곧 따라갈게요. 왕녀님.”
그 파비안의 목소리가 그레타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영혼이 찢기는 아픔이 너무 커서 그레타는 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낄 수가 없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
“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이냔 말이야!”
루도비코 주교는 한발 늦었다.
접견실 근처에 있던 연맹 측 사내들이 파비안을 빠르게 제압했지만 그레타는 이미 정신을 잃은 뒤였다.
파비안은 사내들에게 잡힌 채로 몸부림을 쳤다.
이성을 잃은 그의 저항이 거칠어질수록 그의 몸에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무슨 짓을 한 거요? 이 자는 왜 이렇게 곤죽이 되어 있어?”
“우리가 그런 게 아니오! 놈이 스스로 이랬다니까? 죽으려고 작정 한 것 같아!”
“멍청하긴! 그 사내놈 하나를 어쩌지도 못했소?”
루도비코 주교는 초조하고 분한 마음에 이를 악물었다.
능력자 하나 따위, 어떻게 되든 큰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바로 왕녀였다. 그 여잔 황실에 인질로 넘겨야 하는데.
“그 사내놈 하나도 어쩌지 못하고 뭘 한 거요? 왕녀를 먼저 챙겼어야지! 이래서는 그쪽이고 우리 쪽이고 죄다 계획이 어그러지게 생겼잖소?”
“뭐? 왜 우리 탓을 해? 애초에 우리 연맹의 역할은 왕녀를 신전에 넘기는 것까지였어. 그 이후는 당신이 맡기로 한 거였잖아!”
루도비코 주교와 연맹의 사내들이 서로를 탓하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아……. 당신들 다 한통속이야? ……연맹? ……신전? 뭐, 이리 이상한 애들이 많아.”
파르라니 미약하면서도 소름끼치는 킬킬거림이 들린 건 그때였다.
그레타였다.
순간 정적이 일었다.
‘주, 죽은 게 아니었나?’
루도비코 주교의 전신에 소름이 바짝 돋았다.
왕녀가 살아난 걸 기뻐해야 하나 했다가, 이내 그녀가 신전과 연맹의 속셈을 모두 알아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낭패였다.
천하의 카일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상황을 전달 받은 그는 한참 뒤에야 루도비코 주교에게 답신을 보내왔다.
왕녀는 그곳에 있는 연맹 하수인 편에 내보내서 신전에 머물렀던 흔적을 지우고, 황실이 후에 정보의 출처에 대해 묻거든 익명의 제보를 받았다고 둘러대라는 것이었다.
파비안은 신전 측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명도 덧붙여 있었다.
루도비코 주교는 그의 처리를 아멜리아 사제에게 떠넘겼다.
“당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그런데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곧 죽겠군요. 아니, 이미 죽었어야 맞는 것 같은데.”
파비안을 떠안은 밀실 안에서, 아멜리아는 그를 죽이라고 부여받은 검을 내려놓고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아직 그렇게 버티면서 살아 있죠? 뭐가 그렇게 사무쳐서 울고 있는 거예요?”
***
“연맹이 왕녀에게 그렇게 공을 들여놓고도 제대로 써먹지 못한 건 그래서였군요. 온 세상의 머리 꼭대기 위에 있는 것처럼 떵떵거리더니 그런 실수를.”
“예상 못 한 변수가 있었던 거죠.”
아시온에게 대답한 아멜리아 사제의 시선이 물끄러미 오두막 안쪽을 향했다.
허름한 침대. 거기에 누워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있는 파비안.
리엘라는 그런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눈은 절대로 맞춰 주지 않은 채 시선은 꼿꼿하게 빈 벽을 바라보면서도, 어쨌든 파비안의 눈길이 닿는 곳에 머물러 주고 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우린 최악의 수를 피해 가기는 했는데…….”
정작 자기는 그 대가를 목숨으로 치르게 되었으니.
아시온이 안타까운 눈초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순조롭게 흐를 뻔했던 연맹의 계획을 흔들어서 빈틈을 만들어 준 건 바로 파비안이었다.
그레타나 연맹 측 하수인들에 대한 목격 증언도, 그들이 루도비코 주교와 나눈 대화의 내용도 전부 파비안의 증언을 토대로 알 수 있었다.
“여기, 파비안 클레르의 증언을 제가 기록해서 전부 정리한 겁니다. 수사에 도움이 되실 거예요.”
“예. 참고하겠습니다.”
“사실 그동안 몇 번이나 위기가 있었어요. 처음엔 죽을 궁리만 하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악착같이 버티더군요. 이 작업을 마치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아멜리아 사제의 눈길이 다시 안쪽을 향했다.
‘……아니면 리엘라 님을 꼭 다시 만나려고 그랬는지.’
굳이 소리를 내서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들었을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차 싶었다.
혹시 황제 폐하가 방금 자신의 말을 언짢게 듣지는 않았을까?
“폐하, 송구합니다. 제가 주제넘은 말을…….”
아멜리아 사제는 뒤늦게 사과를 하다가 깨달았다.
황제는 어차피 자신의 말을 하나도 듣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황제의 푸른 눈동자는 걱정과 안타까움을 한가득 담고서 저쪽에 있는 리엘라에게 꽂혀 있었다.
일부러 리엘라를 배려한답시고 몇 발 떨어져 있긴 했지만, 마음이 절로 향하는 것은 차마 거둘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폐하. 그렇게 걱정 되시면 곁에 가 보셔도…….”
“됐어.”
헤르한은 내친김에 아예 오두막 바깥으로 나갔다.
헤르한에게 참견 아닌 참견을 했던 아시온도, 곧 파비안이 마지막에 이르리란 것을 직감한 제스와 아멜리아도, 모두 자리를 피했다.
이제 안에 남은 것은 리엘라와 파비안, 단 둘뿐이었다.
“리엘라. 난 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일 줄 알았어.”
“…….”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
“리엘라.”
“…….”
“계속, 그렇게, 목소리도 안 들려 줄 거야?”
리엘라는 계속 입을 다문 채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손을 잡아 주지도 않았다.
그래도 파비안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제 눈길이 닿는 곳에 리엘라가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분수에 넘치는 일이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딱 한 가지, 아직도 다 떨쳐 내지 못 한 후회가 있다면.
“왜 난 너를 더 일찍 알아보지 못했을까.”
황제와 자신의 다른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리엘라를 사랑한 건 같지만, 그는 리엘라를 알아보았는데 자신은 리엘라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리엘라의 곁에 더 오래 있었던 것은 자신인데.
더 많은 생명을 빌어 산 것도 자신인데.
“생각해보니 나는 참…….”
“…….”
“네 목소리를 들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네.”
그때서야 꼿꼿이 벽만 보고 있던 리엘라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추어 주었다.
원망이 가득한 눈이 이렇게 맑고 예쁠 수 있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또 그 예쁜 눈을 바라보면서 생을 끝낼 수 있다는 건, 더 감사한 일이었다.
“숭고한 척, 영웅인 척 하지 마. 파비안. 넌 그냥 이기적인 사람일 뿐이야.”
“……응.”
“날 위해서 희생했다고도 생각하지 마. 넌 그렇게 떳떳하게 눈 감을 자격 없어. 끝까지 난 아무것도 못 하게, 그냥 남겨지게 만들었잖아.”
“……맞아. 미안해.”
“미안하단 말도 그만해!”
“…….”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
“절대 용서 안 할 거라고.”
“…….”
“이젠 대답도…….”
대답도 하지 않고.
그렇게 끝까지 멋대로 가 버리는구나. 너는.
거칠게 요동치던 파비안의 호흡이 언제 가라앉았는지 고요했다.
좁은 공간 안에서 함께 뛰던 심장 하나가 멎어 버린 그 순간.
그 무거운 공기와 적막을, 리엘라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뛰쳐나왔다.
“폐하.”
삐거덕.
낡은 문을 밀고 비틀거리며 나오는 리엘라를 헤르한이 단번에 안았다.
제스와 아멜리아 사제는 굳은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고, 아시온 역시 멀찍이 자리를 피했다.
“잘 가란 말을 못 했어요. 아니, 안 했어요.”
파비안 앞에서 내내 냉담한 모습을 유지하던 리엘라는 헤르한의 너른 품 안에서 쓰러져 내렸다.
“내가 자기 손을 잡아 주길 뻔히 바랐으면서.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손잡아 달라는 말도 못 하더라고요. 저는 그걸 알면서도 끝까지 모른 척했어요.”
헤르한은 조용히 리엘라의 등을 쓸었다.
참 작고 여린 등이 감당하기 어려운 설움에 떨고 있었다.
“괜찮아. 리엘라. 더 안 참아도 돼. 울어도 되고.”
“…….”
“이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내 품에 안겨 있을 때는 뭐든 다 괜찮아.”
이상했다.
절대로 무너지지 말아야지 생각했고, 울지 않으려고 숨도 참아 가면서 버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줄게.”
리엘라는 눈을 감고 헤르한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내내 필사적으로 꾹 쥐고 있었던 손에 힘을 푸니, 여태껏 틀어 막혔던 온갖 감정들이 비로소 눈물과 함께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달빛 아래, 서러운 울음이 드세게 퍼져 나갔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바보 같았던 누군가의 영혼이 그 울음에 위로 받으며 떠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