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 그날, 예기치 않은 사고 (124/154)


#124 그날, 예기치 않은 사고
2022.09.04.


똑똑.

잠결에 언뜻 노크 소리를 들었을 때, 리엘라는 여전히 헤르한의 품 안이었다.

꿈인가?

몽롱한 눈을 든 리엘라는 그저 제 보금자리처럼 편안한 가슴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그때 또, 전보다 또렷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깼어? 밖에 손님이 와 있거든.”

혼잣말이었는데 다정한 대답이 들려왔다.

헤르한은 진작 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올 손님이 있어요?”

눈을 비비고 일어난 리엘라는 가운을 집으려다가, 제대로 의복을 갖추기 시작했다.

손님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으니까.


“이것도 입어. 필요할 것 같으니.”

리엘라를 따라 일어난 헤르한이 건넨 것은 두툼한 외투였다.

사랑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 리엘라는 이내 결연한 태도로 헤르한과 함께 침실을 나섰다.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오자, 1층 응접실에서 둘을 기다리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시온과 제스.

그리고.


“당신이 아멜리아 사제로군요. 제스 경에게 말씀 들었어요.”

“살아 있는 안투의 현신을 뵙습니다.”

검은 망토 위로 긴 금발을 늘어트린, 푸른 눈의 여사제 아멜리아였다.

*



“신전 내부에 저희를 도와줄 분이 있으시리라곤 생각 못 했어요. 그런데 왜 저희를 돕는 거죠?”

높게 뜬 달도 사위를 다 밝히지 못하는 어두운 밤.

낮게 숨을 죽인 이들의 걸음이 사박사박 달빛을 가로질렀다.

길을 앞장서던 아멜리아 사제는 살짝 고개를 돌려 제 뒤를 따르던 리엘라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참 눈길이 가는 사람이었다.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 아니면 그저 안투의 후손이라서?

아멜리아는 괜한 상념을 떨쳐 버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저는 신전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 로마노 대주교께 목숨을 빚지고 그때부터 이 중앙신전에서 신을 모시며 살았어요.”

“로마노 대주교?”

“전임 대주교야.”

신전의 일은 잘 알지 못하는 리엘라를 위해 헤르한이 나지막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헤르한의 손을 더 꼭 잡았다.

두려움에 떨지 않고 이 밤길을 걸어 나갈 수 있는 건 다 그의 손길 덕택이었다.


“로마노 주교께서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후 최고 사제의 권한을 지금의 루도비코 주교께서 이어 받으셨습니다. 신전이 연맹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입니다.”

“루도비코 주교가 원흉이라. 그렇다면 꽤 오래 전이군. 20년도 더 된 일이니.”

“예. 대략 그럴 겁니다. 폐하.”

아멜리아 사제의 대답은 차분했다.


“연맹의 실체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지?”

“송구합니다. 그 점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루도비코 대주교님하고만 은밀히 소통하는지라.”

모두가 잠시 침묵하며 묵묵히 걸었다.

그때 리엘라가 심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질문의 형태이긴 했지만 탄식에 가까운 말이었다.


“연맹은 왜 이번 일에 그레타 왕녀를 이용한 걸까요. 이렇게 발목이 잡힐 것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을 겁니다. 사실은 그날, 예기치 않은 사고가 있었어요.”

“사고요?”

리엘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자기뿐이라는 걸 눈치 챘다.

제스도 아시온도. 그리고 헤르한까지도 이미 무언가를 아는 듯 그저 딱딱하기만 한 얼굴.


“이쪽입니다. 자세한 얘기는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내 멈춰선 아멜리아 사제가 가리킨 곳엔 작은 오두막이 한 채 있었다.

아까 전에 제스와 제국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증인’을 이곳, 신전 밖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당사자라니요? 아멜리아 사제께서 그레타 왕녀와 연맹에 대해 증언해 주신 것 아니었어요? 증인이 따로 있었나요?”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대신 모두는 리엘라가 문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심지어는 헤르한까지도.

그 순간 리엘라에게 무거운 깨달음이 몰려왔다.

중앙 신전에서 머물고 있으면서, 그레타의 행적에 대해 알고, 그걸 제국 측에 전해 줄 사람이 또 있다면 그건.


“……파비안이로군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의 침묵이 이어졌다.

리엘라는 문손잡이를 향해 뻗었던 손을 힘없이 아래로 내렸다.


“안 들어갈래요.”

“리엘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요. 파비안이랑은 이미…….”

파비안과는 이미 이별했으니까.

노을이 지던 황궁 앞, 신전으로 떠나던 파비안을 배웅했던 그날에.


“만나지 않을래요. 꼭 봐야 하는 거라면 나중에요. 네?”

때아닌 투정이었다.

성숙하지 못한 행동이고, 애를 써준 아멜리아 사제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헤르한이라면 그 투정을 반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의 얼굴이 가장 어두웠다.

리엘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헤르한이 자신을 이렇게 안타까운 눈길로 보면서 이를 악무는 것인지.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건 안 돼. 리엘라. 네가 말하는 내일이 오지 않으면 난 평생 네 원망을 들으며 살아야 할 테니까.”

왜 헤르한이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제 손을 잡아끄는 것인지.

그렇게 억지로 이끌리듯 들어간 방안을 가득 메운 죽음의 냄새는 대체 무엇이며, 왜 그 가운데에 파비안이 송장처럼 누워 있는 것인지도.

리엘라는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아. 리엘라…….”

그나마 파비안이 죽은 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해야 하나.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네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아니면 파비안이 아직 죽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슬퍼해야 하나.


“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파비안?”

“미안해. 리엘라.”

 

 
괴롭게 들썩이는 가슴 언저리에 속에서부터 진득하게 배어난 피가 붉었다.

파비안은 흐느낄 힘도 없는지 그저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그래도 이번엔 널 지켜보려고 했는데. 마지막에. 그거 하나만은 해보려고 했는데.”

 

***

그레타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던 바로 그날, 중앙 신전에선 곧장 비상 회의가 열렸다.


“수배범이잖습니까? 당연히 황실에 신고를 해야지요!”

“심지어 곧 제국의 황후 폐하가 되실 분이 안투의 후손이라니. 어처구니없는 궤변입니다.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젊은 사제들은 당장 신고를 준비하는데, 몇몇 신관들이 반대 주장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만약 왕녀의 말이 진짜면 어떻게 할 겁니까? 정말 안투의 후손께서 살아 존재한다면?”

결국 이 사안은 곧 대주교에게까지 보고되었다.

젊은 사제들은 관련된 일에서 손을 떼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신전 전체에 대주교의 엄중한 지시가 내려왔다.

신전에 그레타가 찾아왔던 것을 절대 비밀에 부치라는 명령이었다.

*

그레타는 당당했다.

수배범이라고 잡혀갈 것이었다면 진작 감옥행이었으리라.

하지만 감옥 대신 이 신전에서 가장 높은 사제의 으리으리한 집무실에 불려왔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분명히 승기를 쥐었음을 보여주는 꼴이었다.


“제보에 대한 조건이 뭡니까?”

“간단해요. 날 보호해 줘요.”

“글쎄요. 그대처럼 유명한 범죄자의 편을 들어주기엔 우리 쪽도 면이 서질 않는데.”

“허세 떨지 말아요. 날 바로 고발하지 않고 이렇게 간을 보고 있다는 거 자체가 이미 역적인 꼴 아닌가?”

그레타가 주제넘은 도발을 했지만 루도비코 대주교는 당황하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레타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중앙 신전의 최고 사제라고 해서 고결한 척 콧대만 높은 인간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탐욕스럽기는 바깥세상의 사람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자였다.


“좋습니다. 이제부터 그대의 신변은 우리 신전이 비밀리에 보호하지요. 더 원하는 건 없습니까?”

“리엘라만 확실히 황제에게서 떼어 내면 돼요. 가능한 많이 괴롭혀주면 더 좋고.”

“우린 안투의 후손을 모시려는 것이지,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명분이야 뭐든.”

참 순수할 정도의 악랄함에 루도비코 주교는 혀를 내둘렀다.

어쨌든 이것으로 거래가 성립되었다 싶을 때 그레타가 어울리지 않게 미적거렸다.

불현듯 떠오른 것이었는지, 아니면 사실 처음부터 가장 꺼내고 싶었던 얘기는 따로 있었던 것인지.


“파비안 클레르……라고. 몇 달 전 여기 수용소로 온 남자가 있을 건데.”

루도비코 주교는 웃음을 참았다.

파비안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커플이 신전을 조금 떠들썩하게 만들었어야지.

사실 루도비코는 왕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잠깐 만나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자신이 요청하기보다 한발 앞서 베풀어진 동정에 그레타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래주면 고맙고요.”

젊은 것들의 사랑 놀음이라니. 아직 좋을 때군.

루도비코는 대강 웃는 척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극적으로 헤어진 옛 연인이 잠깐 재회해 봤자 무슨 일이 일어나겠거니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일어나고 말았다.

루도비코도 예상하지 못했고, 왕녀가 도착하기도 전부터 이 모든 그림을 그리고 지시한 ‘그분’ 께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일’이.

*



‘지금쯤 좋은 시간 보내고 있으려나. 마지막 자유일 테니 마음껏 누리라고. 왕녀.’

루도비코 대주교는 기분이 좋았다.

어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모든 일이 다 계획대로 풀리는지.


‘이제 신전은 영웅이 될 거고, 안투의 후손도 당당하게 손에 넣게 될 거야.’

그레타에게는 당신을 보호해 주겠노라고 했지만 사실 그건 거짓말이었다.

주교는 그레타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그녀를 제국 황실에 넘길 생각이었다.

온 세상을 떨게 만든 흉악범을 신전이 잡았노라고. 그리고 그 체포 과정에서 리엘라 블리니테가 안투의 후손이라는 정황을 포착했으니 중앙 신전의 도리로서 꼭 진위를 판별해야겠노라고.

명분과 실리를 다 꾀하는 천재적인 계획이었다.


‘대체 카일 님은 어떻게 이 모든 걸 다 계획하신 것인지.’

꼭 신처럼 전능한 분이었다.


‘왕녀를 보내겠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반신반의했는데 말이야.’

늘 그랬듯 카일의 예고는 이번에도 맞아떨어졌다.

왕녀를 정말 예고한 날짜에 정확히 보내질 않나, 신전의 명예를 드높이면서 성녀를 차지할 방법까지 친절히 알려 주질 않나.

이대로라면 신전은 세상에서 가장 막강하고 명예로운 권력 집단으로 거듭날 것이었다.

연맹의 뜻을 고분고분 따르며 평생 능력자들의 뒤치다꺼리나 해온 세월을 드디어 보상받는 것이었다.


‘이런 날엔 축배를 들어야지.’

루도비코 주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껴두었던 술을 꺼내 들었다.


“대, 대주교님!”

바로 그때 노크도 없이 신관 하나가 들이닥쳤다.

그레타 왕녀에게 딸려 보냈던 신관이었다.


“무슨…….”

“난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럼 진정시키면 될 거 아닌가?”

“그, 그게! 일단은 와 보셔야겠습니다!”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인상을 쓰던 루도비코 주교는 그 신관의 손과 가슴에 언뜻 피가 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더 물을 것도 없이 당장 접견실로 이동한 주교는 경악해서 몸이 굳어 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레타의 복부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레타를 공격한 자.

넋이 나간 얼굴로 신관들에게 사지가 붙들린 채 피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이는, 파비안 클레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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