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 너의 주인이 누구인지 (123/154)


  • #123 너의 주인이 누구인지
    2022.09.01.


    황제의 마차 안.

    신전을 빠져나오는 내내 리엘라의 몸에선 떨림이 멎지 않았다.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를 진정시키듯 어깨를 꼭 감쌌다.

    신전에서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도망친 그레타도 찾아야 하고 신전이 연맹과 결탁했다는 사실도 밝혀내야 했지만, 그건 이제부터 헤르한의 유능한 부관들이 할 일이었다.

    그동안 두 사람은 신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방 영주의 대저택에서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제스 경의 공이 정말 컸어요. 왕녀가 연맹과 내통해서 절 제보한 거란 사실을 조금만 더 늦게 알았으면, 신전을 이렇게 쉽게 벗어나지는 못했을 텐데.”

    리엘라는 헤르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을 이어 갔다.


    “결정적인 증언을 해 준 사람이 있었다면서요?”

    “…….”

    “그 증인, 우리가 직접 만나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아시온 대장이 알아서 수사를 잘할 거라지만…….”

    “그만. 리엘라. 넌 오늘은 쉬어야 해.”

    일축하는 헤르한의 목소리에는 아직 긴장과 걱정이 바짝 깃들어 있었다.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을 애틋하게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나보다 더 쉬어야 할 사람은 당신 같은데.’

    자신을 탐욕 하는 자를 단칼에 처단하랴, 온 세상을 향해 목숨 걸고 선전포고하랴.

    누구보다도 힘들었을 테니까.



    *

    마차는 이내 목적지에 다다랐다.

    호화로운 대저택 앞에는 황제가 올 것을 미리 연락받은 이들이 정돈된 모습으로 늘어서 있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후덕한 인상의 나이 든 백작은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오늘 신전에서 판별식을 무사히 마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황제 폐하와 고귀한 안투신의 후손이자 황후 폐하이신 블리니테 님을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소문이 지나치게 빠르군.”

    헤르한의 대답에서 찬바람이 쌩 불었다.

    온 나라의 관심이 이 일에 쏠려 있었으니 소문이 황제의 마차보다 더 빨리 퍼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건 헤르한에게 절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소, 송구합니다…….”

    자신이 황제를 언짢게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에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던 백작은 다른 쪽으로 말을 돌리기를 택했다.


    “머무시는 동안 부족함이 없이 준비했습니다. 어제까지 내부를 전부 새로 단장해 두었고, 두 분을 모실 이들도 최고의 인재들로만 선별했습니다.”

    그러면서 백작이 가리킨 이들은 언뜻 봐도 족히 쉰 명은 넘어 보이는 하인들.

    리엘라는 당황스러웠다.

    많은 수의 하인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었다. 황궁에는 그보다도 많은 인원이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리엘라가 걱정하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분명 폐하는 저 사람들을 일일이 다 확인하려고 할 텐데.’

    짐작대로, 경직된 표정으로 나아간 헤르한이 맨 앞에 있는 집사장을 격려하는 척하며 그를 검증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렇게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이들을 살필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가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리엘라는 안 되겠다 싶어서 백작의 앞에 나섰다.


    “청소와 식사를 도와줄 인원으로 다섯 정도만 남겨 주세요.”

    “예? 하지만…….”

    “전 사람이 많은 건 불편해서요.”

    백작에게 말한 뒤, 리엘라는 헤르한도 제 뜻을 물리지 못하도록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가능한 조용하게 폐하랑 오붓이 있고 싶어요.”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를 빤히 보다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소진해 가며 하인들을 검증하던 손은, 리엘라의 작고 따뜻한 손에 꼭 잡혀 버린 채.

    *

    백작이 떠난 후, 리엘라는 저택 안에 짐을 풀고 주변을 정리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보니 헤르한이 없었다.


    “폐하? 어디…….”

    헤르한을 찾아 저택 안을 돌아다니던 리엘라는 창밖의 풍경에서 그를 발견했다.

    아까부터 저택 주변을 살피면서 일일이 호위 기사들을 배치하던 그는 아직도 뜰 가운데에 서서 제스와 무언가 얘길 나누고 있었다.

    리엘라는 아예 창틀 근처에 턱을 괴고 앉아 그런 헤르한을 빤히 지켜보았다.


    ‘나한테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자신을 안고서 신전의 높은 단상을 내려올 때부터 이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헤르한은 계속 그렇게 귓가에 속삭여 주었었다.

    이제는 다 끝났다고. 아무것도 무서워할 것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저를 안심시키면서, 정작 남은 두려움과 걱정은 본인의 어깨에 다 떠안은 모양이었다.

    제스를 보내고 침실 안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랬다.

    리엘라는 피로를 못 이기고 일찍 누웠는데도 불구하고, 헤르한은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아 그런 리엘라의 이마를 조금 쓸어 주다가 다시 창가 쪽으로 가서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눕기만 하면 바로 잠들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더 심란하기만 했다.

    평화롭기 위해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옆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엘라는 몸을 일으켜 창가에 선 헤르한에게로 다가갔다.

    리엘라가 뒤로 슬며시 다가가 그의 등을 껴안을 때까지도, 헤르한은 그녀가 일어난 줄 몰랐다.


    “밖에 뭐 재미있는 거라도 있어요?”

     

     
    투정 섞인 물음에 너른 등이 한번 들썩이며 피식 웃음을 뱉어냈다.

    리엘라는 비로소 휴식하는 기분이었다.

    필요했던 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몸. 달콤한 숨소리.


    “내가 폐하에게 너무 어려운 숙제를 내줬나?”

    “숙제?”

    “날 지켜 달라고 한 거.”

    그게 숙제였나.

    난 죽어서도 너만을 지킬 텐데, 그렇게 평생 이어지는 숙제도 있나.

    긴장을 풀라고 한 말이었는데도 헤르한은 바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저택 주변.

    그 중간 중간, 담벼락마다, 현관마다, 뜰마다.

    쥐새끼 한 마리 허투루 들지 못하도록 기사들을 빼곡히 세워 놓고도 헤르한은 마음을 풀지 못하고 바깥을 노려보았다.

    등을 끌어안고 있던 리엘라가 헤르한의 앞으로 끼어 들어와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감싼 건 그때였다.


    “저를 좀 봐 달라는 뜻이었는데.”

    날렵한 턱을 쥔 손이 부드럽게 그의 시선을 끌어내렸다.

    헤르한은 그제야 살짝 고개를 숙여 리엘라와 눈을 맞추었다.

    리엘라는 투정을 부리듯 미간에 힘을 주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데 당신은 계속 어딜 보느냐고.


    “숙제.”

    “…….”

    “다 끝났어요.”

    내내 힘이 바짝 들어가 있던 헤르한의 눈매가 비로소 편안히 풀어졌다.


    “저에게 하신 약속, 다 지키셨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느른한 시선이 리엘라를 향했다.

    분노와 고통. 걱정. 강한 결심과 불안.

    온갖 어지러운 감정들이 종일 요동쳤을 푸른 눈동자가 지금은 리엘라 하나만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리엘라는 그게 참 감사했다.

    이 순간, 저 아름다운 눈을 가득 메울 수 있는 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

    리엘라는 까치발을 들고 헤르한의 고개를 더 아래로 끌어당겨서 그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피로한 눈두덩이 위, 뭉근한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느낌에 헤르한은 미소를 지었다.

    내내 경직된 채 창턱을 쥐고 있던 그의 손아귀가 힘을 풀고 리엘라의 허리를 감았다.


    “여기 호위는 이제 저 분들에게 맡겨요. 다 믿음직한 사람들이잖아요.”

    “마음 편히 널 맡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야.”

    “애초에 그런 사람이 있긴 해요?”

    이번엔 리엘라가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대답은 들을 것도 없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용맹한 기사를 데려온다고 해도 헤르한은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욕심도 많고, 걱정도 많은 사람이니까.


    “폐하 말고는 없잖아요. 절 맡길 수 있는 사람.”

    리엘라가 반듯하게 선 채로 고개를 들어서 빤히 그를 응시했다.

    달빛이 반짝이는 창문 앞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리엘라의 눈동자는 불꽃을 품은 듯했다.

    수줍으면서도 당당하게, 조심스러우면서도 머뭇거림 없이.

    그렇게 리엘라는 헤르한에게 다가가 입술을 포갰다.

    헤르한은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선 채로, 리엘라가 움직이는 만큼씩만 파고들 틈을 주었다.

    짧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서서히 포개지며 부드럽게 서로를 느끼는 입맞춤이었다.

    사이마다 오가는 호흡이 너무 달아서 헤르한의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리엘라가 천천히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헤르한이 흘려 낸 숨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리엘라는 다시 헤르한의 눈을 바라보았다.

    함께 나눈 숨결에 붉어진 입술이 달빛에 번들거리면서 고백했다.


    “폐하가 나의 주인이에요.”

    그 말에 헤르한은 잠시 정지했다.

    그건 언젠가, 자신이 리엘라에게 했던 고백이었다.


    “네가 나의 주인이야.”

     
    리엘라가 너무 대단해서. 그 존재만으로도 벅차서 차마 어쩌지 못하고 기꺼이 너의 종이 되겠노라 결심했던 그날.

    그런데.


    “뭐라고?”

    “……들으셨잖아요.”

    “못 들었어.”

    “아닌데.”

    리엘라는 사랑스러운 눈을 깜빡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전보다 천천히, 또렷하게.


    “폐하가 나의 유일한 주인이에요.”

    헤르한은 바로 리엘라를 안아 들었고, 리엘라는 기꺼이 그에게 매달렸다.

    성큼성큼 너른 보폭으로 움직인 헤르한은 리엘라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 역시 그 위로 쏟아졌다.

    빳빳한 새 이불이 사박사박 소리를 냈다.

    막 단장을 마친 침실 안, 모든 가구가 새 것이었고, 방 안에 감도는 향유 냄새도 처음 맡는 것이었다.

    ‘집’을 떠나와 먼 공간.

    공기의 질감조차 낯선 이곳에서 리엘라가 유일하게 익숙한 것은 자신을 품는 뜨거운 몸이었다.


    “폐하…….”

    헤르한은 아주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이 연약한 여신을 안았다.

    그러다가 문득 눈이 마주쳤을 때는 벅찬 감정이 솟구쳤다.


    ‘내가 널 가졌다니.’

    심지어 그는 오늘 그 사실을 온 세상에 외쳤다.

    그때 자신을 향하던 사람들의 눈빛이 헤르한은 계속 잊히질 않았다.

    네가 과연 이 엄청난 보물을 독차지할 자격이 있느냐고, 어찌 그렇게 탐욕스러우냐고, 의심하고 원망하던 눈길들.

    신전의 단상에서 내려온 후, 헤르한이 더 불안하고 조바심을 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피로 겁박하고 권력으로 억지를 썼지만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리엘라는 역시나 너무 위대한 존재이고, 그런 여인을 과연 자신이 차지할 수 있는 것인가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괴로워 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말해 줘. 리엘라.”

    헤르한은 끊임없이 거친 숨결 사이로 물었다.


    “너의 주인이 누구라고?”

    성나게 몰아붙이는 힘에 리엘라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리엘라.”

    헤르한의 독촉은 끈질기고 집요했다.

    리엘라는 그의 몸에 꽉 매달리며 대답했다.


    “나의 주인은, ……헤르한 당신뿐이에요.”

    온몸의 피가 끓고 주체할 수 없는 격정이 치솟았다.

    그저 서로를 가졌을 뿐인 두 사람은, 온 세상의 주인이 된 것처럼 하나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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