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 넌 나만 보면 돼 (120/154)


  • #120 넌 나만 보면 돼
    2022.08.21.


    조사는 그 길로 중단되었다.

    집무실로 자리를 이동할 심적 여유는 없었다.

    헤르한은 급한 대로 조사 중이던 병사를 옆 격리실로 옮겨둔 뒤에, 아시온이 가져온 전갈을 확인했다.


    “시, 신전에서…… 출두 명령이라니, 그런 게 왜…….”

    그러는 동안 리엘라는 영문을 몰라 혼란스러웠다.

    신전의 출두 명령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파비안이 황궁에 머물 때 받아본 적이 있었고, 그렇기에 더 두려웠다.

    저것은 신전이 도망친 후손을 제 거미줄로 불러들일 때 쓰는 선전포고 같은 거였으니까.


    “설마 폐하의 정체가 들킨 거예요? 폐하를 수용소로 잡아들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그래요?”

    패닉에 이른 리엘라가 울부짖듯 물었다.

    헤르한은 전갈의 내용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가만히 둔다면 평생 말없이 그대로 굳어 있을 것만 같아서, 리엘라는 헤르한의 손에서 전갈을 대신 빼 들었다.


    “어…….”

    감히 나의 폐하를 빼앗으려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런 전투적인 마음으로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리엘라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헤르한이 굳어버린 이유가 있었다.

    출두 명령은 ‘리엘라 블리니테’에게 내려진 것이었으므로.



    *

    엘슈바이크 제국 황실은 돌연 모든 정무를 중단하고 비상 체제로 접어들었다.

    유례없는 대 회의가 소집되었고, 어느 부처랄 것 없이 황성의 모든 관료가 전부 모여들었다.


    “지방의 군대장들까지 전부 황궁으로 복귀했던데?”

    “갑자기 다들 비장하지 않아? 난데없이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거야?”

    “엥. 그럴 리가 있냐, 이 바보야?”

    “그러면?”

    “국혼이 며칠 안 남았잖아! 그걸 준비하려고 다들 저러는 거지!”

    아, 그러네, 맞네, 우리도 더 부지런히 경사를 준비해야겠네.

    아직 소식을 모르는 외부 궁인들이 그런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며 마지막 여유를 즐길 때.

    궁 안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각국에서 외신이 빗발칩니다. 블리니테 님에게 ‘성녀 판별’에 응하라는 명이 내려진 게 맞냐며, 확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란에서는 결혼식 축하사절을 물리겠다고 합니다.”

    “이제라도 블리니테 님의 혈통과 자질을 확실히 검증하고 모두의 합의에 따라 거취를 정해야 한다는 외교적 여론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신전 발 소식이 전 세계 각국의 지도부로 이미 다 퍼진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신전은 본래 중립 세력으로서,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진행하는 일을 대외적으로 알리기는커녕 국제 사회에 개입하는 일도 없었다.


    “걷잡을 수 없이 소문이 불어나는군요. 마치 누가 작정하고 퍼트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제스의 말에 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속으로 질문을 이어 갔다.


    ‘그 누구라는 건, 역시 연맹이겠지. 그들이 나를 폐하와 떼어놓으려고…….’

    송두리째 동요하는 세상을 보기 위해 굳이 높은 망루에 오를 필요는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곳, 이곳 대 회의실.

    어제까지도 결혼식을 준비하며 리엘라와 이런저런 대담을 나누었던 제국 황실의 관료들도 공황상태에 빠진 것은 매한가지였으니까.


    “폐하!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안투의 후손이……!”

    “블리니테 님께서 성녀였던 것입니까?”

    “폐하는 알고 계셨습니까?”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마구 쏟아지는 그때 헤르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을 다물라는 명령이 없었는데도 모두가 일시에 침묵했다.

    헤르한의 서늘한 목소리는 긴장감 어린 대회의실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리엘라 블리니테는 나의 황후이자 그대들의 주군이고 이 땅의 어머니일 뿐이다. 다른 직함이 더 필요한가?”

    헤르한의 엄명은 이어졌다.


    “긴급연락망을 통해 전 세계에 공식 외신을 전해. 감히 나의 황후를 넘보거나 의심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시간부로 적국으로 간주해 전투태세를 갖출 것이라고.”

    “예.”

    아시온이 대답했다.

    벌써 전쟁을 각오한 듯 결연한 황제의 모습은 가뜩이나 숨 막히는 대회의실을 더 무거운 긴장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런 헤르한의 옆에 서 있으면서 리엘라는 고개 숙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황제가 당부한 것처럼 기죽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리엘라는 알고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자신을 흘긋거리는 관료들의 눈길이 불과 이틀 전과는 다르다는 걸.

    리엘라는 혼란스러운 동시에 마음이 쓰라렸다.

    나는 대체 누구일까. 추앙받는 황후인가. 탐이 나는 성녀인가. 아니면 나라를 흔드는 골칫덩이인가.

    그때 대신 중 누군가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용기를 내서 물었다.


    “폐하. 신전의 출두 명령에는 응하실 것입니까?”

    헤르한의 푸른 눈동자가 살벌하게 떨렸다.

    그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



    “신전으로 갈게요.”

    그날 밤, 리엘라는 헤르한에게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지친 몸을 눕히고 막 잠을 청하려는 때였다.


    “리엘라. 안 돼.”

    헤르한이 바로 몸을 일으켜 리엘라를 붙들었지만 리엘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요? 계속 아닌 척 우겨요? 그냥 버티면서 외면할까요? 그러면 내가 그레타랑 다를 게 뭐예요.”

    헤르한은 눈살에 힘을 주더니 리엘라의 시선을 외면했다.

    입바른 소리는 듣기 싫다는 것이었다.

    리엘라는 다정한 눈길로 그런 헤르한을 설득했다.


    “이미 다 밝혀져서 침묵으로 일관한다고 무마될 것 같지 않아요. 백성들에게까지 알려지는 것도 한순간일 거예요. 그 전에, 차라리 당당하게, 신전에 다녀오는 게 낫지 않을까요?”

    헤르한은 끝끝내 리엘라를 외면한 채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엘라는 아주 조금 웃었다.

    그게 마지못해서 하는 허락이라도, 어쨌든 허락을 뜻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신전에 가서, 그 판별……이라는 걸 받고 나면……. 그러면 저도 수용소로 가게 되나요?”

    “아니. 절대. 그런 일은 없어, 리엘라. 내가 신전을 다 허물어서라도.”

    헤르한이 다시 흥분했다.

    역시 이건 꺼내기 민감한 이야기. 하지만 리엘라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헤르한은 한참 뒤에야 흥분을 가라앉히고, 비교적 차분하게 설명했다.

    신전을 허문다느니, 불태운다느니 하는 말은 꾹 참고.


    “수용소는 엔릴의 후손들을 관리하기 위한 용도야. 엔릴의 후손이라면 몰라도, 안투의 후손을 속박할 의무나 자격은 신전에 없어. 물론 그놈들은 당연히 온갖 증거를 끌어다가 네 소유권을 주장하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신을 모시는 자들인데 그들을 ‘그놈들’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리엘라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라도 웃지 않으면 더 무서울 것 같아서.

    다시 말하면 ‘안투의 후손’에 대한 처리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이었다.

    당연했다.

    연맹이 몰락하고 신전이 능력자들을 다 떠안은 이후로 안투의 후손은 존재한 적도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더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소유권이 지정된 이가 없다는 건, 역으로 누구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얘기.

    어제까지 친교를 표방하던 우방국도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고 저를 넘보는 가운데, 전 세계가 다 달려들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폐하께서 지켜주실 거잖아요.”

    그 말에 헤르한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식을 더 앞당기는 건데.”

    “지금보다 더요?”

    “네가 내 ‘약혼자’인 것보다는 ‘황후’인 쪽이, 널 지킬 명분이 더 서니까.”

    아. 그렇구나.

    리엘라는 헤르한과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 지금 해요.”

    “뭐?”

    헤르한이 황당하다는 듯한 눈을 치떴다.

    그럴수록 리엘라는 더 맑게 웃으면서 내실 안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였다.

    테이블 위에 촛대를 올려 불을 밝히고. 마네킹에 걸어두었던 면사포도 가져오고.


    “이럴 운명이었나 봐요. 마침 서약서가 오늘 아침에 완성됐잖아요?”

    “리엘라. 뭘 하려는 거야?”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따라 일어선 헤르한 앞에, 리엘라는 하얀 면사포를 걸치고 다가갔다.

    리엘라의 흰 손에는 금빛 테가 둘린 서약서가 들려 있었다.

    *

    그로부터 몇 분 뒤, 아시온과 제스가 급하게 본궁으로 뛰어 들어왔다.

    황제의 비상 호출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밤샘 근무가 일상이라지만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호출하는 일은 없었는데.


    “뭘까, 제스? 사고라도 터졌나?”

    “더 터질 사고가 있어?”

    어쨌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내실에 들어섰는데, 이어진 황제의 명령은 황당했다.


    “네? 증인이요?”

    “그래. 혼인 서약에는 증인이 필요하니까. 아시온, 너는 그쪽. 제스는 이쪽에 서.”

    “아, 아니. 폐하……?”

    아시온은 입을 쩍 벌렸다. 장난이라기엔 둘의 태도가 사뭇 진지했다.

    리엘라는 곱게 빗은 머리 위에 면사포를 썼고, 헤르한은 반지까지 꺼내 들고.


    “서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결혼은 유효가 되는 거라면서요. 예식은 나중에 돌아와서 치러도 되고요.”

    “아, 아니. 그렇긴 한데요. 리엘라 님…….”

    “저는 찬성. 이쪽에 서 있으면 됩니까?”

    심지어 제스는 황당해하는 아시온을 가볍게 배신하고 주군의 옆으로 쏙 이동했다.

    아시온이라고 더 버틸 재간은 없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깜짝 결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촛대를 가까이 끌어다 놓고 마주 선 두 사람이 참 애틋하고 경건해 보이기까지 해서.


    “허……. 참…….”

    탄식하던 아시온은 결국 그냥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촛불이 하롱하롱 춤추었다.

    리엘라는 낭랑한 목소리로 서약서를 낭독했고,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손에 반지를 끼웠다.

    미약하지만 영롱한 빛 아래, 금테의 서약서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혔다.


    “리엘라. 넌 이제 나의 황후가 된 거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폐하?”

    “무슨 뜻인데?”

    “이제 폐하는 절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죠.”

    리엘라는 헤르한의 입술에 애틋하게 닿았다가 떨어진 뒤에 말을 이었다.


    “이 세상 전체에 날 욕심내는 사람은 많아도, 날 지킬 자격을 가진 사람은 폐하 한 사람뿐이에요.”

     

    *

    이틀 뒤, 황실에선 신전의 소환령에 응하는 거대한 행렬이 출정했다.

    전장으로의 출정을 방불케 하는 대대적인 행렬이었다.

    의장대와 수백의 군대를 총동원한 전례 없는 호화 행군에, 가장 앞장선 것은 두 대의 깃발이었다.

    하나는 황제를 뜻하는 황금색 사자기.

    또 하나는 황후를 뜻하는 붉은색 장미기였다.

    황제의 행렬이 도착할 날을 맞아 신관과 성기사들은 전부 신전 앞에 도열했다.

    황제를 직접 본다는 생각에 굳어버린 이도 있었고, 곧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덜 떠는 이도 있었다.

    저마다 얼굴은 달랐지만 꼭 짐승 앞에 내던져진 먹잇감처럼 위축된 꼴만은 같았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리엘라 블리니테를 소환한 것은 바로 저들이었으면서.

    이윽고 하늘을 찌를 듯한 두 개의 기가 들어섰다.

    선두의 기사들이 먼저 내려 장소를 정비한 뒤 양옆으로 늘어섰고, 이어서 황실의 위용이 철철 흐르는 금빛 마차가 그 가운데 멈추어 섰다.

    중앙신전의 최고 사제인 루도비코는 그 앞으로 나아갔다.

    공손하게 입을 열되, 머리를 조아리지는 않았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와 신의 은총이신 안투의 후손을 뵙습니다.”

    명백한 도전이었다.

    정해진 대로라면 그는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와 황후 폐하께’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 것이므로.

    하지만 헤르한은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루도비코 대주교. 뒤로 물러나 주겠나?”

    대신 그를 가볍게 무시한 뒤에 마차 안으로 손을 뻗었다.

    헤르한의 에스코트를 받은 리엘라가 마차 밖으로 나오는 순간, 신전의 넓은 뜰을 메운 신관들과 성기사들은 모두 전율했다.


    ‘저분이 바로 살아 있는 유일한 안투의 후손.’

    ‘백 년을 가까이 찾아 헤맸던.’

    제국의 황후이자 대륙의 유일한 구원자.

    그 명성에 걸맞은, 고고하고 순결한 모습의 여인.


     


    “오오…….”

    루도비코 대주교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팔을 뻗었으나 그것을 근위대장 아시온이 날카롭게 쳐냈다.


    “아. 대주교님. 용서하십시오. 실수했습니다.”

    루도비코 대주교가 근위대장의 무례함을 지적할 새도 없이 황제와 여인이 신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례한 근위대장도, 그의 뒤를 따르는 수십의 기사와 시종들도 황제의 뒤를 따랐다.

    판별식은 곧바로 거행되었다.

    굳이 시간을 지체할 필요 없다는 헤르한의 뜻과 루도비코 대주교의 뜻이 맞물렸다.

    일정에 맞추어 도착한 참관인들은 신전의 드넓은 홀을 빼곡하게 메웠다.

    마침내 오른 신전의 단상의 위에서, 헤르한은 리엘라를 아주 굳게 감쌌다.


    “신경 쓸 필요 없어. 겁먹을 필요도, 떨 필요도 없어. 여길 다 피바다로 만드는 한이 있어도 넌 내가 지킬 거니까.”

    거대한 파도 앞에서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헤르한은 이어서 고백했다.

    세상에서 소중한 이에게, 늘 말버릇처럼 하던 말.


    “리엘라. 넌 나만 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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