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리엘라가 대단해 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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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리엘라가 대단해 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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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리엘라가 대단해 봤자
2022.08.14.
조종하던 몸에서 억지로 튕겨 나오는 기분은 다시 겪어도 참 뭣 같다.
그래도 하나 좋은 점이라면, 리엘라에게 잠깐이라도 닿을 수 있었다는 것일까.
달걀로 바위를 치는 시도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모험을 시도한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한 번이라도 리엘라를 더 가까이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커헉!”
그때 카일의 목구멍을 타고 뜨거운 피가 왈칵 치밀었다.
심장이 갈가리 찢기며 타들어 가는 듯했다.
카일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능력을 쓰는 것 자체도 무리가 되지만, 능력을 쓰는 도중에 억지로 쫓겨나는 것은 몸을 더 심하게 망가뜨렸다.
예전에 황제의 의사를 조종하다가 튕겨 나왔을 때 짐작했던 것을 이번에 확신했다.
‘가까이서 얼굴 한 번 보는 대가치고는 좀 비싼 거 아닌가?’
카일은 자신이 토해낸 검붉은 피를 보며 씁쓸하게 웃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절대 비싸지 않다.
무려 ‘리엘라 블리니테’에 대한 값이니까.
이보다 더한 제물이 있어야 한대도 기꺼이 바쳐야지.
“컥! ……으윽!”
그 굳센 다짐에 반응하듯 카일의 속이 다시 뒤틀렸다.
‘쾅쾅쾅!’
“이봐? 괜찮아?”
카일의 기침 소리를 들은 그레타가 바깥에서 문을 두드렸지만 카일은 무시했다.
이번엔 조금 전보다 통증이 더 강했다. 꼭 이 지긋지긋한 운명에 끝장이라도 보겠다는 듯이.
‘아직은 죽을 수 없지.’
카일은 손에 묻은 피를 손수건에 문질러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틀비틀 힘겹게 움직여 서랍을 열었는데, 약이 있어야 할 칸이 전부 비어 있었다.
“이봐. 괜찮냐니까?”
때마침 그레타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어차피 방 열쇠를 갖고 있으면서, 끝까지 모르는 척.
카일은 피 묻은 입가를 문지르며 달칵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선 그레타는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던 것과는 달리 한껏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카일을 보았다.
“도련님. 많이 아파 보이네?”
그레타는 카일의 옷이 피로 물든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참 잘됐다는 듯이 한껏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은 입꼬리가, 기어이 카일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도련님. 혹시 이거 찾고 있었어?”
그레타가 싱그럽게 웃으며 내보인 건 카일의 서랍에서 훔쳐낸 약이었다.
***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나요?”
“아, 아뇨. 블리니테 님. 저는……. 저는 그냥 병영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라모슈라는 병사는 갈색 머리에 선한 눈동자를 가진 사내였다.
리엘라와 황제를 보고는 곧장 이마를 흙바닥에 내리찧을 정도로 충성심도 깊어 보였다.
‘허튼짓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역시…….’
리엘라는 안타까운 눈으로 병사를 바라보았다.
리엘라 대신 병사를 추궁한 건 아시온이었다.
“어제 본궁에 들렀던 것은 기억하나?”
“예? 저는 어제 본궁에 간 적은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본인이 유서를 남긴 것은 당연히 기억 못 하겠군.”
“제, 제가요? 유서를요!? 아, 아닙니다. 제가 왜!”
그제야 병사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검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나, 그 검으로 자결하려다 제압된 사실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일단 체포해. 황궁으로 돌아가 다시 조사하지.”
헤르한은 그렇게 명령한 뒤에 리엘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썩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수상한 거동을 보이는 자가 나타났고, 그자가 리엘라의 코앞까지 접근했다.
“손, 이리 줘. 리엘라.”
“네.”
무엇보다 그자의 얼굴을 리엘라가 만져주고 나서야 적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다.
저 고운 손으로 직접.
저 손에 그 어떤 더러운 것도 닿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한 게 고작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제길.’
당연히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리엘라의 손을 꼭 쥐고 놓지 않는데도 헤르한의 가슴 속에선 불같이 치솟는 역정이 가라앉질 않았다.
*
“몽유병이라고 주장하는군요.”
“몽유병이요?”
“예. 본인이 말하길 그렇습니다. 요즘 들어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잠든 사이에 자기도 모르는 곳에 가 있거나 의도하지 않은 행동을 한 적이 있다고요.”
제스의 설명에 리엘라가 반박했다.
“몽유병일 리가 없어요. 어제는 제가 묻는 말에 대답도 했고, 일부러 제 손을 피하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 눈빛.”
리엘라는 매서워진 제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카넬 때와 같았어요.”
집무실 안이 무거운 침묵 속으로 고꾸라졌다.
상석에 앉은 헤르한도, 그 옆에 뒷짐을 지고 선 제스와 아시온도, 모두 고개를 끄덕일 뿐 섣불리 말을 잇지 못했다.
어젯밤, 리엘라가 놀란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초점이 풀린 병사의 눈빛에서 한때 카넬에게 느꼈던 그 싸늘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래서 리엘라는 아시온에게 상황을 전했다.
그 후 병사를 감시하던 아시온이 급하게 꾸며 쓴 듯한 유서와 수상한 외출 정황을 포착했고, 숲에서 병사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저도 리엘라 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앞뒤 정황이 비슷합니다. 카넬도 정체를 들킨 뒤에 자결을 시도했었습니다. 그걸 리엘라 님이 막았고.”
“같은 적에게 세뇌당한 게 맞다면, 그게 놈들의 패턴인 모양이군요. 꼬리가 잡힐 것 같으면 스스로 죽게 만들어 버리는 것.”
“대체 어느 적이 그런 일을 해낸다는 거지? 그런 게 가능한 일인가?”
아시온과 제스가 의문 어린 눈빛을 주고받는데 다시 리엘라가 끼어들었다.
“전 알 것 같아요.”
“예?”
“꼬리가 잡힐 만한 시점에 절묘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하나 더 있잖아요.”
“그게 누구…….”
아시온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스와 헤르한은 이미 답을 떠올린 모양이었지만.
리엘라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시온 공작이요.”
“예!?”
아시온은 기겁하며 놀랐다가 점점 사색이 되었다.
천천히 곱씹어보니 과연 그럴듯한 말이었다.
동시에 무서운 말이기도 했다.
카넬과 병사를 세뇌한 자가 시온 공작을 조종해서 죽인 자와 같은 인물이라면, 그건.
“……전부 연맹이 한 짓이라는 거잖습니까.”
아시온의 말을 끝으로 전보다 더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섣불리 숨을 내쉬기도 힘들 정도로 터질 듯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 추리극의 해답에는 도달한 모양이었지만, 그걸 감당해 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카넬은 내가 황실로 오기 전부터 폐하를 모시던 사람인데. 그럼 연맹은 대체 언제부터 폐하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걸까…….’
리엘라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제, 2층 계단 위에서 병사와 눈이 마주쳤을 때만 해도 이렇게 커다란 싸움에 직면하게 될 줄은 몰랐다.
“헉!”
그때 갑자기 아시온이 뭔가를 떠올린 듯 큰 숨소리를 냈다.
“자, 잠시만요!”
대뜸 허둥지둥하던 그가 테이블에 놓인 문서들 틈에서 꺼내 든 것은 병사 라모슈의 활동 일지였다.
“라모슈를 조종한 게 연맹 세력이라면 더 큰일입니다.”
“왜요? 무슨 일이…….”
리엘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아직도 더 무서워해야 할 것이 남아 있나?
“라모슈의 최근 기록입니다. 에릭의 산하로 리오타 왕국에 파견되어서, 그레타 왕녀가 도주했을 당시에 왕궁 수색조로 활동했었습니다.”
‘그레타’.
여기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이름이었다.
“만일 라모슈가 그때부터 연맹에 조종당하고 있었던 거라면…….”
“그레타, 그 여자를 빼돌린 게 연맹일 수도 있겠네.”
아시온의 추측. 제스의 냉정한 확답.
그리고 반복되는 ‘그레타’의 이름.
여태까진 그런대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더는 리엘라도 힘들었다.
“연맹이 그레타를 살려서 어쩌려고요?”
“살리려는 게 아니라 이용하려는 거겠죠. 뭐가 됐든 우리 쪽에 반가운 상황은 아니겠지만.”
제스는 우선 대답하고 나서야 리엘라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 하나.
집무실에 들어선 이후, 주군이 여태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도.
‘……어떻게 해?’
마찬가지의 위화감을 느낀 아시온이 제스에게 난감한 눈짓을 했다.
제스는 헤르한을 살피다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침만 해도 주군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지금의 주군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회의는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설명도, 간섭도 필요 없으리라.
지금 헤르한을 잠식한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단 한 사람뿐.
“폐하. 카넬을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엘 바이스를 호출해오겠습니다. 시온 공작 건을 다시 조사해 봐야겠습니다.”
제스와 아시온이 눈치껏 물러나는데도, 그들이 나간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헤르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폐하.”
그저 석상처럼 굳어서 시야가 멀어버린 헤르한을 잡아 깨운 건 아주 가느다란 부름이었다.
“……폐하. 무서워요.”
꼭 무너진 벽에 갇혀 울던 그 어린아이처럼.
“폐하가 그런 얼굴을 하고 계시니까, 더 무서워요.”
바들바들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살아 보고자 소리를 쥐어 짜내는.
그 애처로운 목소리와 몸짓에 헤르한의 정신이 번뜩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겁에 질린 리엘라가 차마 제게 손도 뻗지 못하고 있었다.
“……아.”
헤르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짧게 탄식했다.
리엘라를 잃을까 두려운 생각에 미쳐버려서 정작 옆에 있는 리엘라를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니.
“……이리 와. 리엘라.”
다시 나긋하게 돌아온 목소리에 리엘라가 내민 손을 잡았다.
고분고분 이끄는 대로 안겨드는 몸이 잘게 전율하고 있었다.
헤르한은 그 떨림까지 다 품어버릴 요량으로 리엘라의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었다.
리엘라는 헤르한의 더운 가슴에 한참 이마를 파묻고서야 마음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저, 지켜주실 거죠?”
리엘라가 제게 매달리는 것처럼, 헤르한도 리엘라에게 매달렸다.
“물론이지.”
참 이상한 일이었다.
리엘라는 자신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그게 헤르한에게는 그 어떤 위로나 응원보다 더 강한 힘이 되어 돌아왔다.
***
“그 약. 이리 내놔.”
“글쎄. 맨입으로?”
그레타는 사내를 약 올리듯 뒷걸음질 쳤다.
그래도 사내는 따라오지 못했다. 당장 테이블을 짚은 손을 놓아버리면 한 발도 떼지 못할 만큼 약해져 있었으니까.
“싸우자는 거 아니니까 진정해. 도련님. 그냥 동료면 동료답게 정보 좀 공유하자는 것뿐이야.”
그러자 사내가 피식 웃었다.
거기에 그레타는 조금 당황했다.
송장처럼 하얗게 질려선 피 칠갑을 한 저 몰골만 봐도 사내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확실했다.
심지어 그가 서랍에 보관하고 있던 약은 자신이 전부 다 가로채지 않았나.
그것만으로도 당장 자신에게 설설 기어야 할 판인데.
저 도련님은 뭐랄까, 병약한 꼴에 비해 절박한 맛이 없어 찝찝했다.
“이대로 죽을 거야? 당신은 엔릴의 후손이잖아. 당장 이 약이 없으면 아주 곤란할 텐데?”
“잘 알고 있군.”
“그러니 묻는 말에 대답해. 당신의 정체가 뭐야?”
그레타의 물음에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야 제대로 반응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내 큭큭큭 소리를 내며 배를 잡고 웃는 것이었다.
“미친 거야?”
“아니……. 말이 웃기잖아? 내가 엔릴의 후손이라는 걸 안다면서, 바로 또 정체를 밝히라니.”
“내 말은, 그거 말고!”
그레타는 이상하게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잊지 말자, 지금 상대의 멱살을 쥐고 있는 건 나다, 생각하면서.
“엔릴의 후손인 거 말고. 당신은 어디서 온, 뭘 하는 자인지…….”
“푸흡. 왕녀. 계속 내게 꽂혀 있던 거야? 질문을 참신하게 바꿔 볼 수는 없나?”
“뭐?”
“이를테면. 내가 누군지가 아니라, 내가 쫓는 게 누구인지.”
그레타는 코웃음을 쳤다.
그거라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리엘라 블리니테잖아? 그 지긋지긋한 것.
“표정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답은 알고 있는 모양인데. 그런데도 끝까지 모르나 보네.”
대체 무엇을?
미간을 찌푸리는 그레타에게 사내는 친절하게 답을 내어주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인 게 아니라, 내가 가지려고 하는 게 대단한 거라는 걸.”
사내의 말을 끝으로 잠시 정적이 일었다.
산속 저택의 고요한 침묵을 깬 건 찢어질 듯한 그레타의 웃음이었다.
“풉……. 푸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레타가 손뼉을 쳤다. 배도 잡고, 벽도 쳤다가, 하도 웃어서 눈물이 고였는지 그걸 훔쳐내기까지 했다.
“지금 리엘라 얘길 하는 거야? 진심으로?”
그레타의 웃음은 그치질 않았다.
“걔가 대단해 봤자지!”
그렇게 얼마나 혼자서 깔깔 웃었을까.
함께 웃어주는 사람도, 말리는 사람도 없이 이어가는 웃음은 어느새 악을 쓰는 것에 가까워져 있었다.
“리엘라가 대단해 봤자…….”
그레타의 웃음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리엘라가……. 그깟 게 대단해 봤자…….”